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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國內博物館

國立慶州博物館

국립경주박물관

 (國立慶州博物館)

 

 

慶尙北道의 南東部에 있는 市 신라천년(新羅千年)의 고도(古都)로 名勝古跡이 많아 관광 명소(觀光明所)이다. 제3차 産業과 농업(農業)이 주요산업(主要産業)이며 특산물(特産物)로 유기(鍮器). 죽세공품(竹細工品) 등이 있다. 불국사(佛國寺).석굴암(石窟巖).분황사(芬皇寺)와 그 밖에 많은 명승지(名勝地)가 있다. 1995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改編)때 慶州郡을 통합(通合)하여 도농(都農) 복합형태(複合形態)의 시(市)를 이루었다. 面積은  1,323.92㎢. 우리나라 三國 時代의 三國 가운데 紀元前 57년 朴赫居世가 지금의 嶺南 地方을 中心으로 세운 나라. 首都를 慶州로 하였고, 眞興王 때에 伽倻를 倂合하였으며, 太宗 武烈王 때에 百濟를, 文武王 때에 高句麗를 滅하고 三國을 統一하였으나, 935년에 高麗 太祖 王建에게 亡하였다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수도(首都) 경주(慶州)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慶州國立博物館)은 新羅의 문화 유산(文化遺産)을 한 눈에 살필수 있는 代表的 博物館 이다. 1945년 國立博物館으로 出發하여 1975년 現在 位置로 이전 (移轉)하였읍니다.  

 

 

 

얼굴무늬수막새

(人面文圓瓦當)

 

 

경주국립박물관

(慶州國立博物館)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수도(首都) 경주(慶州)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慶州國立博物館)은 신라의 문화 유산(文化遺産)을 한 눈에 살필수 있는 代表的 博物館 이다. 1945년 國立博物館으로 出發하여 1975년 現在 位置로 이전 (移轉)하였읍니다.

 

 

숭복사쌍귀부

(崇福寺雙龜趺)

 

두마리 거북이 붙어있는  이 碑石받침은 慶州 외동읍(外東邑)말방리(末方理) 崇福寺터에 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성왕(元聖王)의 陵은 吐含山 서쪽 골짜기에 있는데 최치원 (崔致遠) 857 ~ ? 이 지은 碑文이 있다는 記錄이 있읍니다. 이로써 崇福寺는 元聖王의 冥福을 빌어주던 願刹이라는것과 그 곳에 있던 碑文을 최치원이 지었다는 것을 알수 있읍니다.

 

 

자연바위그림

 

蔚山廣域市 彦陽邑 大谷里의 太和江 支流인 대곡천 가의 깍아지른듯한 絶壁 아랫부분의 自然바위면(8m x 2m)에는 모두 191가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몸체 全面을 쪼아낸 고래.돌고래. 등이 오른쪽에는 線으로 쪼아낸 호랑이. 개. 사슴.산양 등이 새겨져 있다. 그림에는 그물이나 울안에 갇힌 짐승.여러사람이 탄배 잡은 고래를 끌고오는배, 성기(性器)가 강조된男子, 꼬리가 달린 춤추는 무사(巫師)등을 비롯하여 새끼 밴 짐승, 식도(食道),내장 등 생명선(生命線)이 표현된 짐승들이 있다. 그림가운대 짐승상은 사냥이나 고기잡이의 成功과 대상 動物들의 繁殖期原, 그리고 人物像은  사냥꾼의 들의 代表者 또는 사냥신을 象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바위 그림 內用으로보아 靑銅器時代 後期로 推定되며 國寶 제 285호로 指定 되었다.

 

 

청동기

(靑銅器)

 

우리나라 靑銅器文化중 앞 時期의 요령식(遼寧式:비파형)동검 文化期는 紀元前 10세기에서 紀元前 4世紀末에 걸쳐 中國 妖靈地方의 靑銅器 文化가 우리나라에 流入되는 시기이다. 뒷 時期의 한국식(韓國式:세형)銅劍 文化期는 北方 系統의 靑銅器 文化를 中心으로 中國 靑銅器文化를 받아들이면서 韓國靑銅器로 定着하게 되는 時期에 該當된다. 동검(銅劍)은 要領式銅劍과 韓國式銅劍으로 區分되며 모두 검몸 부분과 손잡이 부분을 따로 만들어 組立한 것이다. 韓國式 銅劍의 形態는 要領式銅劍에 비해 검몸부분이 좁고 날부분의 谷線도 緩慢하다.  靑銅거울은 지그재그무늬 사이를 촘촘한 線무늬로 채운 거친무늬거울과 세모꼴 속에 精密한 빗금무늬가 채워진 잔무늬거울(文鏡)로 나뉜다. 

 

 

장신구

(裝身具)

 

사람들은 先史時代부터 여러가지 裝身具로 몸치장을 하였는데 대개 時期와 地域에따라 여러가지 形態로 바뀌게 된다. 新石器,靑銅器時代의 裝身具에는 주로 조가비.짐승의 뿔,뼈,흑 등이 쓰였다. 新三國時代에는 材料와 形態가 더욱 多樣해서 金屬物,유리등도 使用되었다. 유리구슬 수정 등으로 만든 목걸이는 오늘날의 목걸이보다 더욱 華櫚할 程度이다. 靑銅으로 만들어진 허리마고리,단추,방울 등은 裝身具로도 利用되었다. 이러한 裝身具들은 自信을 弘報하려는 慾求뿐만 아니라 社會的으로 職位를 나타내는 象徵으로 계속  增加 發達 하였다.

 

 

금동신발

(金銅신발)

 

金銅신발은 크기와 形態로 미루어보아 주검에 신기우기 위해 만든것으로 보인다. 普通 3매의 金銅版을 못으로 박아 形態를 만든뒤 안에는 천이나 가죽을 덧대었다 그리고 아래면은 各種 무늬를 맞새기거나 타출점열무늬로 華櫚하게 粧飾하였다. 新羅의 金銅신발은  자형의 맛새김장식을 잇달아 베풀었고 신발코는 버선코 처럼 살짝 치켜 올랐으며 바닥에는 못이 없는 점이 特徵이다. 그리고 製作方法은 1 매의 金銅版은 발등을 감싸고 다른 金銅版은 발뒤축을 감싸도록 만들어 발의 左右에서 固定시켰다.

 

 

귀걸이

 

新羅의 무덤에서는 世界的으로 그 由來가 없을 程度로 귀한 金귀걸이가 出土되었다 新羅의 귀걸이는 매우 精巧하였고 華櫚하여 新羅人들 마져 感覺과 水準높응  金屬工藝의 技術을 잘 보여준다. 귀걸이는 고리의 굵기에 따라 굵은고리귀걸이 가는고리귀걸이로 區分된다 굵은고리 귀걸이는 金冠이나 비단모자의 左右에 매달아 粧飾하거나 가죽으로 고리를 만들어 귀에 걸었을 可能性이 높다.

 

 

목걸이

 

先史時代의 목걸이는 짐승의 이빨이나 조가비 등의 材料로 만들어졌으나 三國時代에는 옥,유리,金屬등 材料가 多樣해졌다. 新羅의 무덤에서 出土되는 목걸이는 藍色 유리구슬을 꿰어 만든것이 大部分이나 水亭,경옥,마노 등으로 된것도 있다. 또한 王族이 묻혔던 것으로 推定되는 대형무덤에서는 금목걸이가 出土되기도 한다. 皇南大塚 北墳에서 出土된 金목걸이는 달개가 달린 속 빈 금구슬을 連結한 形態로 매우 華櫚하다. 반면 月城路에서 出土된 金목걸이는 금실을 고리로 만들어 사슬처럼 連結한것으로 單純하면서도 매우細漣된 形態이다.

 

 

말갖춤

(馬具類)

 

말갖춤(馬具類)은 말을 몰기위한 제어구(制御具) 말을 타기 위한 기승구(騎乘具) 말을 粧飾하기 위한 장식구(裝飾具)등으로 크게 나눌수 있다. 제어구에는 재갈,고삐 등이 있으며 起承具에는 鞍裝과 발걸이 등이 있다. 粧飾具에는 말띠꾸미개,말띠드리개, 말방울, 솟을장식,기꽃이, 다래 등이 있다 말은 新羅人과 親熟하고 實用的인 動物로서 말에 粧飾된 金銅製의 華櫚한 말갖춤은 權威나 身分의 象徵이기도 하였다.

 

 

십이지상

(十二支像)

 

십이지(十二支)는 각각 방위(方位)와 時間을 지키는 일두신장(神將)으로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의 12종의 動物을 象徵化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十二支는 統一新羅時代에 流入되어 무덤彫刻과 佛敎美術 兩面에서 常好聯關을 가지면서 彫刻의 重要한 主題로 자리잡는다. 처음에는 토우형태의 조그만 十二支像이  무덤안에 껴묻히거나 무덤 주위의 땅속에 묻혀 方位神으로서의 性格을 띤다. 그뒤 十二支가 陵을 지키는  守護神의 性格으로 確立되면서 신장상(神將償)의 모습으로 무덤둘레의 둘레돌에 直接彫刻되는대 평복(平服)과 갑옷을 입은 두기지 型式으로 나타난다. 한편 統一新羅時代의 十二支像은 독특하고 多樣하네 發展되는데 塔이나 浮屠,石燈,등의 佛敎建築物에 새겨진 十二支像은 다른나라에서 볼수없는 特徵이다. 

 

 

사천왕사

(四天王寺)

 

사천왕사(四天王寺) 의 創建科程은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자세히 전합니다. 문무왕(文武王)재위 661 ~ 681 과 11년 (671)에 당군(唐軍)의 侵入을 막기위해 新羅人들이 오래전 부터 神聖視 여겼던 신유린(神遊林)에서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인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施行한것이 四天王寺 創建의 始作이고 文武王 19년(679)에 이루었읍니다.  이렇게 創建된 四天王寺는 統一新羅 時期 내내 寺刹가운데 新羅에서 가장 으뜸가는 地位를 누렸읍니다. 이는 三國史記 직관지(職官志)에 寺刹의 管理를 맡은 官處인  성전(成典)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다른 寺刹에 앞서 言及 된것을 보면 알수있읍니다.

 

 

조각가양지

(良志)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에의하면 四天王寺 녹유 四天王上殿은 양지스님이 만든것임을 알수있읍니다. 그는 여러가지 在住에 通達하여 神妙함이 비길데가 없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天賦的인 藝術家 였던 셈이지요 三國遺事에는  양지의 作品으로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법림사(法林寺) 주불삼존(主佛三尊)등 많은 예를 들고 있으나 이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석장사(錫杖寺)터에서나온 소조상과 전(塼) 그리고 四天王寺 四天王像을 들수 있읍니다. 이 밖에 記錄은 없지만  양지의 作品으로 推定되는것은 감은사(感恩寺) 舍利갖춤을 들수 있읍니다. 특히 感恩寺 舍利갖춤의 四天王像은 갑옷의 細部 表現이 四天王寺 四天王上殿과 매우 恰似합니다. 양지스님의 出身에 대해서 中央아시아風을 띠면서도 唐나라 彫刻의 特徵을 反映한 그의 作品을 근거로 中央아시아人 혹은 中央아시아係 中國인이라는 主張이 있는가하면 新羅人이라는 主張도 있읍니다 .

 

 

석조약사불좌상

(石造藥師佛坐像)

 

모든 疾病뿐만아니라 無智의 病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인 藥師佛 입니다. 왼손에 약단지를 쥐고 잇는 것으로 藥師佛임을 쉽게알수 있읍니다. 元來 南山 용장골에 있는것으로 처음 博物館에 옮겼을 때에는 머리와 몸체가 떨어져 있었는데 1975년 復元한 것입니다. 그런대 약단지를 빼면 石窟庵 本尊佛과 그 모습이 비슷합니다. 오른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항마촉지인(降摩燭地印) 오른쪽어깨를 드러낸 모습 편단우견(偏短右肩)등이 石窟庵 本尊佛과 닮은것입니다. 石窟庵 本尊佛이 만들어진 다음부터 곧바로 그 佛心이 만들어졌는데 이佛像 역시 그러한 佛像가운데 하나 입니다.

 

 

얼굴무늬수막새

(人面文圓瓦當)

 

微笑를 한껏 머금고 있는 이 막새기와는 新羅 혹은 慶州하면 떠오르는 代表的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 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기와는 益山 彌勒寺터 慶州 皇龍寺터 등에서도 出土되었지만 이 막새기와에 사람얼굴을 나타낸것은 이 기와가 唯一합니다. 이 가와는 日帝强占期 영묘사터(靈廟寺址:현재 흥륜사)에서 나왔다고 傳하며 한 日本人이 保管하다가 1972년 國立慶州博物館에 寄贈한 것입니다.  가장자리 테두리가 넓고 높은 溫度에서 구운점으로 보아 三國時代에 만든것으로 여겨집니다. 

 

 

감은사사리갖춤

(感恩寺舍利 ?具)

 

三國統一을 이룩한 문무왕(文武王 661 ~ 681)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 681 ~ 692)이 682년에 完城한 感恩寺의 東西 양탑에 넣었던 舍利갖춤 가운데 가장 바깥쪽을 감싼 외함(外函) 입니다. 西塔의 舍利갖춤은 1959년에 東塔의 舍利갖춤은 1996년에 각각 解體 復元하는 科程에서 3층 지붕돌 윗면을에 뚫린 長方形의 舍利空에서 發見되었읍니다. 舍利갖춤은 第一 안쪽에서부터  수정사리병(水晶舍利甁) -  사리기(舍利器) -  금동사리기외함(金銅舍利器外函)의 순으로 構成되어 있읍니다.

 

 

석조미륵삼존불상

(石造彌勒三尊佛像)

 

石造彌勒三尊佛은 1995년 慶州 南山의 장창골에서 옮겨온 것으로 左右夾侍菩薩의 表定이 너무 天眞爛漫하여 아기부처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통통하면서 탄력있는 모습 등에는 북재나 수대의 彫刻型式이 反映되어 있으나 부드러우면서도 옹화한 造型室은 新羅 特有의 樣式이라고 할수있다 이러한 特徵은 慶州 配慮三體石佛과도 直決된다. 또한 이 三尊佛은 本尊이 椅子에 앉아있는 姿勢로서 彌勒佛로 보고 있으며 몸에 비해 머리와 손발이 큰것이 特徵이다.

 

 

백률사금동약사불입상

(栢栗寺金銅藥師佛立像)

 

佛國寺 金銅毘盧遮那佛,阿彌陀佛과 더불어 統一新羅 3대 大型 金銅佛로 불립니다. 1909년 古跡助詞 事業 때 찍은 寫眞을보면 양손이 있고 藥盒을 들고 있는것을 確認 할수 있읍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의 藥盒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없으나 나무로 깍은 손만이 남아있읍니다. 지난  8세기 後半에 製作된 것으로 推定됩니다.

 

 

석조불입상

(石造佛立像) 

 

 

석조사자

(石造獅子)

 

慶州芬皇寺 出土 1200 ~ 1350년 전 (統一新羅 7세기 후반 -  8세기)

 

 

석조보살얼굴

(石造菩薩頭)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나 破損이 심하여 元來의 模樣을 알수없다. 머리와 어깨일부 그리고 두광(頭光)만이 남아 있다. 넓적한 얼굴은 인자한 모습이며 오목조목하게 表現된 눈 코 입은 가운데에 몰려있다. 어깨에 닿을 듯 길게 늘어져 있는 귀 목에는 삼도(三道)가 表現되어 있다. 광배(光背)는 이중의 원형두광 (圓形頭光)으로 안쪽의 면은 다듬어져 있고 바깥쪽은 선각(線刻)으로 輪廓線을 表現 하였다.

 

 

반가사유상

(半跏思維像)

 

커다란 돌하나로 彫刻한 반가사유상 (半跏思維像)입니다. 머리와 두팔은 깨어져 남아있지 않지만 남은 높이로보아 健壯한 成人 男子의 身體와 가깝습니다. 椅子에 앉아 오른발을 원 무릎위에 올리고 벗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읍니다. 아랫몸에 걸친 치맛자락은 서로 겹치어 연꽃이 막 피어올라 성스러운 부처님의 발가락과 발톱까지 나타낸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읍니다.  慶北奉化 出土 半跏思維像에 비해 造形美는 다소 떨어지지만 新羅 特有의 고졸(古拙)한 멋이 살아 있읍니다. 彫刻하기 까다로운 花崗岩에 新羅匠人의 불심(佛心)으로 生命力을 불어 넣었읍니다. 없어진 머리는 어떤모습이었을까요?

 

 

이차돈순교비

(異次頓殉敎碑)

 

元來 경주백률사(慶州栢栗寺)에 있었던 비(碑)로 佛敎를 提唱 하다가 527년(法興王 14)에 殉敎한 이차돈(異次頓 506 ~ 527)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殉敎碑이다. 花崗岩을 네모꼴로 만들고 윗면을 육모꼴로 다듬은 對坐 위에는 碑文을 새긴 六面體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남아있는 석당(石幢)의 꼭대기에 있는 둥근 촉으로보아 본래는 옥개석(屋蓋石)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1 면에는 이차돈의 殉敎場面을 돋을새김하였고 제2 ~ 제6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자경(字徑) 3cm 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특히 1면에는 목을베자 머리는 날아가 慶州 소금강산(小金剛山)에 떨어지고 목에서는 흰피가 수십장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송이가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 하였다 라는 이차돈의 殉敎場面을 說明하였다.

 

 

석조

(石槽)

 

石造는 長方形 또는 圓形의 돌 內部를 파내어 절등에서 물을 담았던 것입니다. 이 石造에는 많은 글이 새겨져 있읍니다. 石造의 윗부분에는 경주 부윤(府尹) 이필영(李必榮)이 조선인조(仁祖) 재위 1623 ~ 1649)16년 (1638)에 이 석조를 흥륜사(興輪寺)新羅 最初의 절에서  慶州 邑城안 금학헌(琴鶴軒)으로 옮겼다는 內用이 있읍니다. 이 內用이 새겨진 반대편에는 이교방(李敎方)이 戊子年 유두달 이 石造를 보고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가 있읍니다 側面에는 石造에 담긴 물에 하늘이 비친것을 표현한 天光雲影(하늘,빛,구름,그림자)을 크게 새겨 넣었읍니다

 

 

고선사

(高仙寺)

 

高仙寺는  元來 알천(閼川) 上流인 慶州市 암곡동(暗谷洞)에 있던 절로 現在 이곳은 덕동땜 建設로 물에 잠겨버렸읍니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이 절은 神文王(神文王 681 ~ 692)때 元曉大師가 머므르던 곳이라고 합니다. 1914년 5월 元曉大師의 行跡을 記錄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彫刻이 發見되어 元曉大師가 入籍한 686년 以前에 寺刹의 面貌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高麗史에는 顯宗 12년 高仙寺의 金蘭嘉事와 불정골 등을 內殿에 두었다. 는 記錄이 있읍니다. 이때까지만해도 이절의 法統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廢墟가 되었는지는 알수없읍니다.  1975년 이 절터를 發掘하였는데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회랑터등의 建物터를 確認 하였고 金銅佛 기와,전돌 등 많은 文化財를 찿아냈읍니다. 여기있는 石塔과 금당터 碑閣터의 地臺石과 碑石받침은 절터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귀면와

(鬼面瓦)

 

두 눈을 부릅뜨고 아가리를 크게 벌린 무서운 表情의 귀면와 는 鬼神의 侵入을 막아주는 象徵物로 建物에 粧飾되었다. 수 기와 등 위에 얹히는 마루용 귀면화는 下端의 가운데 部分이 元型으로 패어있다. 그리고 사래용 귀면와는 아랫 부분이 평평하다.

 

 

(木船)

 

연못 東쪽의 湖岸石築 앞에서 뒤집힌채 發見되었다. 세 쭉의 나무를 통째로 파낸뒤 이물과 고물쭉 뱃바닥 참나무 角材를 가로질러 組立하였다. 이 배는 통나무 배에서 나무판을 이어 붙여서 만드는 배로 넘어가는 中間段階의 形態이다.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원래 성덕대왕(702 ~ 737)의 願刹이었던 봉덕사(奉德寺)에 있다가 이 절이 廢墟가 되면서 영묘사(靈廟寺) 慶州邑城 南門밖 東部동 옛 國立慶州博物館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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