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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王&妃生家

高宗生家

(雲峴宮) 

 

 

이 곳은 朝鮮 26대 임금인 고종 (高宗)이 登極하기 前에 살았던 잠저 (潛邸)로서 生父 興宣大院君 이하응 (李昰應)의 집이다. 興宣大院君은  이곳을 舞臺로 10여년간 執政하면서 어린 아들을 代身해서 政治를했다. 서운관 (書雲觀)이 있던 고개에서 由來된 指名을 따서 雲峴宮이라 불렀다. 1864년 (高宗1년)에 老樂堂과 老安堂을 짓고 1869년(高宗6년) 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  昌德宮을 쉽게 드나드도록 高宗 專用 精勤門과 興宣大院君을 위한 恭勤門을 두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1912년에는  양관(洋館)을세워 손님을 맞는 곳으로 使用하였다. 老安堂은 興宣大院君이 國政을 論議하던 곳이며 老樂堂은 안채. 이로당은 別堂으로 쓰였다. 그 規模나 格式. 平面模樣으로 볼때 士大夫집이라 보기보다는 宮闕 內殿에 가깝다. 興宣大院君이 이 世上을 떠난후 큰 아들인 이재면을 거쳐 孫子 이준용에게 相續되었으나 韓國戰爭以後 相當部分이 팔리면서 집의 規模가 크게 줄었다.

 

 

 

 

수직사

(守直舍)

 

正門 右側에 位置한 守直舍는 雲峴宮의 警備와 管理를 擔當했던 사람들이 居處하던 곳이다. 당시의 雲峴宮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아니라 高宗이 王으로 卽位하면서 興宣大院君이 莫强한 勸力을 行事 宮에서 派遣된 警官들과 管理하는 人員이 많았다.

 

 

노안당

(老安堂)

 

雲峴宮에서 사랑채로 쓰였던 老安堂은 大院君의 日常居處였으며 破格的 人事政策, 中央官制復舊, 書院撤廢, 服飾改革 등 國家主要政策을 論議 했던 곳이다. 典型的인 우리나라 韓式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角木을 길게대어 차양(遮陽)을 단 數法은 오늘날 이곳에만 남아 있는 特徵이다. 老安堂 이란 現版은 노자 (老者)를 안지 (安之)하며에서 딴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돤 德澤으로 좋은 집에서 便安하게 老年을 살게되어 스스로 洽足하다는 뜻으로 興宣大院君이 추사 (秋史) 김정희 (金正喜)의 글씨를 集字하여 만든것이다. 末年에는 庭園에서의 退陣과 靑나라에 拉致되는 등 이곳에서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現在 老安堂에 게시된 扁額은 2006년 文化財廳의 許可를 받아 重要無形文化財 제 106호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모각되어 게시된 扁額이며 現 扁額은 서울歷史博物館에서 保管하고 있다.

 

 

노락당

(老樂堂)

 

老樂堂은 雲峴宮에서 가자크고 中心이되는 建物로서 正面 10칸 측면 3칸 規模이다. 1866년 (高宗 3년)三揀擇이 긑난후 明成皇后가 王妃 受業을 받던 곳이자 高宗과 明成皇后가 家禮가 行 해진곳이기도 하다. 老樂堂은 初翼工 樣式의 士大夫家 建築美를 느낄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실문양 (불발기창호)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붕의 龍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龍紋梁이 그려져 있어 建物의 權威와 位相을 잘보여 주고있다. 雲峴宮 落成式에 參與했던 高宗이 大提學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 (老樂堂記)를 지어 記念할것을 指示했던 事實만으로도 老樂堂이 상징하는 意味를 斟酌할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老樂堂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고 했는데 다소 過狀된 表現이기는하지만 당시 興宣大院君의 權勢가 天下第一이었다는 것을 잘나타낸 表現이다.

 

 

가 마

(輦)

 

朝鮮時代 王이 탔던 가마이다. 지붕, 몸체, 가마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네 모서리에 龍을 그린 둥근 기둥을 세우고 둥근 기둥 사이에 각기둥을 세운 後 아랫 부분에만 난간을 돌렸다. 몸체에 주칠을 한 後 난간 部分에 금색으로 백택(白澤), 기린(麒麟) 등 多樣한 想像의 動物들을 그려 넣었다. 네 면에 珠簾을 드리우고 다시 揮帳을 내려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지붕 네 모서리 鳳凰 粧飾에 고리를 달아 유소(流蘇)를 고정시켜 내려뜨렸으며 가마채의 끝 부분에는 鍍金한 龍머리 粧飾을 끼워 磨勘하였다.

 

 

이로당

(二老堂)

 

二老堂은 정면 7간 측면 7가능로 바깥 男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入口 (口)자 模樣으로 된 建物로 가운데 중정 (中庭)이 있다. 놀가당과 더불어 안채의 技能을 擔當하고 있어 女子들만 살수있게 別途의 空間을 形成하고 있는 철저한 禁男地域이라 할수있으며 二老堂의 안주인은 雲峴宮 全體 안살림의 最高 責任者가 되었다.

 

 

운하연지

(雲下硯池)

 

구름 아래 벼루 연못

 

 

창 고

 

石氷庫 形態를 닮은 倉庫로서 그 크기로 보아 당시 雲峴宮의 살림의 規模가 一般 宮의 버금가지 않았나 봅니다.

 

 

우 물

 

雲峴宮의 우물은 몇개가 있는지는 알수없으나 살림規模로보아 翠水量이 많았을거라 生角 됩니다

  

 

경송비

(慶柗碑)

 

高宗이 어렸을때 함께놀던 소나무가 있었는데 임금된후 雲峴宮 落成式 參席次 이곳을 찿았다가 소나무에 正二品 대부송(正二品 大夫柗)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金貫子를 달았다고 합니다. 이를 記念하기위해 競訟碑를 세움.

 

 

유물전시관

(遺物展示館)

 

遺物展示館은 雲峴宮 大院君 關聯 遺物展示를 通해 歷史束의 雲峴宮이 지녔던 가치와 韓國 近代史의 흐름을 把握할수 있도록 構成한 展示 演出 空間이다. 18 개로 나뉘어진 各各의 展示空間에는 各種 遺物 展示는 물론 模型.映像.판넬등의 展示媒體를 活用 觀覽客들이 復元된 雲峴宮의 모습과 沿革.그리고 大院君가의 年報,遺品등을 通해 雲峴宮과 大院君에 대한 認識과 理解의 場이 되도록 構成하였다. 특히 遺物展示館 入口에 資料引出機를 配置 各各의 展示空間의 理解가 容易 하도록 하였다.

 

 

고 종

(高宗)

 

朝鮮 26대 國王으로 초휘 (初諱)재황 (載晃)아명 (兒名) 명복 (命福) 초자 (初子) 명부 (明夫) 자 성림 (聖臨) 호 주연 (珠淵) 영조의 5대손인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다. 후사 (後嗣) 없이 僧下한 鐵鐘의 뒤를 이어 12세였던 1863년에 卽位 하였다. 1866년에 明成皇后와 結婚하였고  1897년에 國號를 大漢으로 年號를 光武로 고치고 경운궁 (慶運宮) 즉조당에서 大韓帝國의 初代 黃帝로 卽位 하였다.

 

 

고종임금의글씨

(高宗御筆)

 

高宗 (1853 ~ 1919)이 쓴 글씨이다. 학우등사 (學優登仕)란 배우고 餘力이 있으면 벼슬하고 職分을 맡아 政事에 參與한다 라고한 千字文의 句節을 따온것인데 이는 本來 배우고 餘力이 있으면 벼슬한다. 學而優則仕 라는 論語의 句節에서 온것이다. 이 글씨는 朝鮮末期 文章家 였던 한창석의 손자 한상학에게 써준 것이다.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이름 이하응 (李昰應) 자 시백 (時伯)  호 석파 (石坡) 시호 헌의 (獻懿)이며 高宗의 아버지 이다.1863년 高宗이 朝鮮의 26대 임금으로 卽位한 다음 大院君에 奉해지고 섬장이 되었다. 黨派를 初月한 人材燈用 書院撤廢 法律制度 確立으로 中央集權的 政治紀綱을 樹立 하였다. 그러나 景福宮 重建으로  百姓의 生活苦가 加重되고  鎖國政治를 고집함으로써 國際關係가 惡化되고  外來文明의 洪水가 늦어지게 되었다. 壬午軍亂도 甲午改革 등으로  하야와 再執權으로 反覆하였고 복잡한 國際關係 때문에 靑나라로 拉致되기도 하였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 10월 興宣大院君의 天主敎 彈壓에 따른 報復으로 프랑스 艦隊가 江華島에 侵略한 事件이다. 이 해봄에 프랑스 宣敎師 9명과 朝鮮人 天主敎 信徒 數千名이 處刑당했다. 1866년 프랑스의 朝鮮元正은 두 차례 端行되었다. 프랑스 外務部의 命을 받은 로즈提督은 이해 9월 18일 軍艦 3척을 거느리고 江華海峽을 거쳐 洋靴鎭과 西江에이르는 水路를 探査하면서 지도 3장을 作成하고 靑나라로 돌아갔다. 프랑스의 2차 朝鮮元正에서는 軍艦 7척과 海軍 1,500명 大砲 66문이 動員되었다. 로즈提督이 거느린 프랑스 艦隊는 10월 11일 朝鮮元正에 올라 10월 16일에 軍艦 4척과 數百名의 上陸軍으로 甲串鎭과 같은 江華島의 要衝地를 占領하였다. 프랑스軍은 잇따라 文殊山城도 占領하여 氣勢를 올렸다. 프랑스군이 江華島를 占領하자 興宣大院君이 決死의 意志로 抗戰할것을 督勵하는 등 朝鮮政府 當局者는 强力하고 機敏하게 對應하였다. 朝鮮政府는 巡撫營을 設置하여 代將 이경하 (李景夏) 中軍 이용희 (李容熙) 천양헌수 (梁憲洙)를 천양江華島 修復의 대임을 맡겼다. 양헌수는 600명의 兵力으로 어둠을 틈타 江華해엽을 건너 鼎足山城에 들어가 抗戰의 決意를 다졌다. 양헌수가 거느린 朝鮮軍은 鼎足山城 戰鬪에서 프랑스軍에 砲擊을 가해 勝利를 거뒀고 프랑스軍은 鼎足山城 敗北를 繼起로 撤軍하여 中國으로 돌아갔다. 프랑스軍은 撤軍하면서 外奎章閣 古圖書 340권 銀塊 19箱子 등 貴重한 文化財를 掠奪하고 外奎章閣을 불태웠다. 大院君은 丙寅洋擾後 江華 德津鎭에 바다 (江華)의 關門을 굳게 지킬것이며 外國배는 삼가 (絶對)通過할수 없다. 라는 內用의 碑石을 세워 鎖國洋夷 政策을 確固히 했다. 

 

 

고 종

(高宗)

 

朝鮮 26대 國王으로 초휘 (初諱)재황 (載晃)아명 (兒名) 명복 (命福) 초자 (初子) 명부 (明夫) 자 성림 (聖臨) 호 주연 (珠淵) 영조의 5대손인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다. 후사 (後嗣) 없이 僧下한 鐵鐘의 뒤를 이어 12세였던 1863년에 卽位 하였다. 1866년에 明成皇后와 結婚하였고  1897년에 國號를 大韓으로 年號를 光武로 고치고 경운궁 (慶運宮) 즉조당에서 大韓帝國의 初代 皇帝로 卽位 하였다.

 

 

명성황후

(明成皇后)

 

朝鮮 高宗의 皇后 여성府院君 민치록 (閔致祿)의 딸이다. 8살에 父母를 잃었으며 1866년  오척 勢道政治의  勢力 基盤을 없애기위하여 興宣大院君의 夫人인 부대부인 (府大夫人) 민씨 (閔氏)의 推薦을 받아 16살에 王妃로 冊奉 되었다. 1895년  日本의 蠻行으로  景福宮에서 弑害 되었고 大韓帝國이 成立된 1897년 皇后로 追從 되었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帝國主義 政策을 推進하던 美國이 1871년에 제너럴 셔먼호 事件에 대한 膺懲과 朝鮮과의 通商關係를 樹立하기위한 目的으로 江華島를 侵略한 事件이다. 아시아艦隊 司令官 J 로저스는 軍艦 5척 大砲 85문과 海軍과 海兵 1,230명을 거느리고 5월 16일 日本 나사키를 出發하여 朝鮮元定길에 올랐다. 로우公司는 朝鮮管理에게 江華海峽을 探測하겠다고 一方的으로 通告하였다. 6월 1일 美國艦艇은 江華海峽 貞察과 測量 活動을 展開하면서 손돌목에 이르렀다. 이에 朝鮮의 江華島 砲隊는 美軍의 行爲를 領土侵略으로 간주하여 卽刻 美國艦艇에 砲擊을 가했다. 손돌목事件 以後 美軍은 朝鮮에 砲擊에 대한 謝過와 賠償을 要求하였으나 朝鮮政府는 拒絶하였다. 이에 美軍은 軍艦 2척과 644명의 戰鬪要員을 앞세워 初志鎭을 占領하고 잇다라 德津鎭까지 占領하였다. 廣城堡에 戰鬪에서는 중군 (中軍) 어재연 (魚在淵)이 거느리는 朝鮮守備兵 600명이 決死的으로 저항하면서 美軍측에도 被害를 입혔으나 武器의 質的差異를 克復하지못하고 敗北하였다. 以後 美軍은 朝鮮側의 協商拒否로 通商 交涉에 失敗한채 7월 3일 撤收 하였다. 大院君은 이를 繼起로 全國에 斥和碑를 세워 外勢의 侵略을 境界하였다.    

 

 

척화비

(斥和碑)

 

西洋을 물리치기 위하여 세운 비 (碑)이다. 크기는 가로 25.5 cm 세로 21 cm 높이 144 cm 로 花崗石에 서양 오랑캐가 侵犯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和親을 하자는것이요 和親을 主張하는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子孫萬年에 警告하노라  (洋夷 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라는 內用이 새겨져 있다 斥和碑는 丙寅洋擾와 辛未洋擾 등 西歐列强의 通商壓力을 비롯 남연군의 廟 도굴사건 등이 發生하여 通商拒否政策을 强力히 推進하겠다는 意志의 表明이다.

 

 

칙명지보                                         옥보

(勅命之寶)                                                      (玉寶)

 

1897년 高宗임금이 大韓帝國 皇帝에 오르면서 만든 國璽 가운데 하나로 通信調書에 주로 使用하였다. 그 밖에 外交文書에 使用한 大韓國璽 砲床에 使用한 皇帝御璽 高級管理의 司令長에 使用한 諸苦支保 軍隊의 統帥에 使用하던 大元帥保 등이 있다. 明成太皇后 라는 글자가 새겨진 印章 이다. 이 印章은 退位한 高宗을 太皇帝로 칭하고 明成皇后를 太皇后로 格上시키면서 만든것이다.

 

 

당백전

(當百錢)

 

11월 景福宮 重建으로 고갈된 財政을 메우기 위해 鑄造하였던 貨幣로 당시 統營되던 常平通寶보다 100배의 名目의 價値가 있었다. 그러나 多量의 當百錢이 市中에 流通되자 貨幣流通秩序가 큰 混亂에 빠졌으며 貨幣價値 下落 및 物價暴騰을 부채질하여 통用 2년만인 1868년 當百錢 鑄造를 中止하고 청전 (淸錢)을 收入 財政의 安定을 圖謀하였다.

 

 

 

사랑방

 

운현궁양관

(雲峴宮洋館)

 

雲峴宮은 興宣大院君이 살아던 집으로, 高宗이 태어나서 王位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興宣大院君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德城女子大學 本館으로 使用하던 西洋式 建物을 합쳐 史蹟(사적 257호)으로 指定하였다. 서울 雲泥洞 德城女大 안에 남아 있는 '雲峴宮 洋館'의 모습이다. 日帝强占期에는 이 建物을 "이준공저(李埈公邸)", "이우공저(李?公邸)"라고 흔히 불렀으나, 이른바 '이준공', '이우공'이란 呼稱이 日帝가 부여한 공가(公家)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요즘은 거의 이렇게 부르질 않는다. 그래서 단지 '雲峴宮 양관(洋館)'이라고 通稱하는 것이 普通이다.

 

 

운현궁양관

(雲峴宮洋館)

 

興宣大院君의 孫子 이준용의 邸宅으로 使用되다가 그후 議親王의 차남인 이우의 所有였다가 解放以後 德城學園이 所有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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