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1/王&妃生家

明成皇后生家

(明成皇后生家)

 

 

명성황후가 1851년 이곳에서 태어나 8세 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 조선숙종 13년 (1687)에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 (閔維重)의 묘막 (墓幕)으로 건립 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것은 안채 뿐었으나 1995년도에 사랑채,행랑채,별당을 복원 하였다.  

 

 

 

하마비

(下馬碑)

 

이 비석의 전면에는 ‘이곳에 이르면 대소인원은 말에서 내리라(至此 大小人員 下馬 碑)’고 쓰여 있다. 하마비는 지금 지방의 향교 등에서도 하마비가 남아있다. 종묘의 하마비는 창건과 더불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413년(태종 13년)에 종묘, 궐문(闕門)의 입구[洞口]에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大小官吏 過此者 皆下馬)’는 푯말[標木]을 세운 것이 처음 시작이라 한다. 그것이 후일 돌로 만든 석비(石碑)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이다.

 

 

명성황후

(明成皇后)

 

조선 제26대 고종의 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1866년(고종 3), 16세 때 흥선대원군(興宣大阮君)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대원군과 대립해, 민씨 척족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갔다. 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윽고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 76년 한일수호조규를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하였다. 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 윤태준(尹泰駿) 집을 거쳐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생활을 하였다. 청군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일을 꾸며 민씨정권을 재수립하였다. 84년 갑신정변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사주, 청나라의 개입으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세력의 침투로 김홍집(金弘集) 등의 친일내각이 득세하고, 94년 대원군의 재등장으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였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민비와 그 척족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을 시켜 황궁을 습격 민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 후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복호(復號)되고, 97년(광무 1)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명성황후

(明成皇后)

 

 

명성황후추모비

(明成皇后追慕碑)

 

이 추모비는 명성황후의 애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두개의 직사각형은 과거와 현대를 상징하는 기둥이며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을 비문으로 표현하였고 조각 상층부에는 빛의 표현으로 우리민족사에 길이 빛날 명성황후의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글:김 남조

 

 

명성황후탄강구리비

(明成皇后誕降舊里碑)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비석이다. 탄강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구리는 고향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탄강구리는 명성황후께서 태어나신 옛마을 이란 뜻이다.

 

 

민유중신도비

(閔維重神道碑)

 

민유중은 (1630 ~ 1687)은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장인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다. 신도비는 묘로가는 길목에 세워져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민유중은 1650년 에 과거에 그제한뒤 승문원과 예문관 등의 요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성균관대자성,호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 하였다. 묘에는 민유중과 선생의 부인이 합장되있으며 봉분 주위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다. 신도비에는 민유중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를 찬양하는 글이새겨져 있다. 비의 기단석의 몸통은 거북이 형상이며 머리는 용의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틀어져 묘소를 향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150 m 지점에 민유중의 묘가 있다.

 

 

(感古堂)

 

 

감고당은 조선 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수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1667 ~ 1701)가 장희빈과 갈등 속에서 왕비에서 물러난뒤 이후 복원될때 까지 5 년 동안 이곳에서 거쳐하였고 명성황후 (1851 ~ 1895)가 8 세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러간후 1866년 (고종3년)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 이란 편액을 하사한후 부터 이고 본래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나 1966 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고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군이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하여 수차례 수리하고 이전하면서 본래의 모습은 변형되었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전형적인 건축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감고당

(感古堂)

英祖御筆

 

안 채

 

안 공간인 안채는 몸채,내당 등으로 부리기도 하며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였다. 안채는 안방,대청,건넌방,웃방,다락부엌 등으로 구성되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임종등의 일이 이루어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외부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고 볼수있다, 명성황후가 8세때부터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렀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물러난후 이곳에서 거쳐하였다.

 

 

인현왕후

(仁顯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667년 ~ 1701년)는 조선의 왕 숙종의 계비이다. 성은 민(閔), 휘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의 딸이다. 민진우,민진원,민진영의 누이였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681년 계비가 되었다. 그녀가 태어날 때 집안에 광채가 났다고 하며 출산직후에 향긋한 향기가 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녀의 큰아버지는 그녀가 너무 아름답고 착하여 일찍 사망할 것이 염려되었다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후에 대비 김씨와 서인세력들의 추천으로 중궁으로 뽑힌다. 그 후 숙종이 병석에 눕게 되자 대비 김씨가 기도를 올린다고 하였으나 겨울에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자신만이 기도를 올려도 충분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대비 김씨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기도를 올렸다가 대비는 곧 사망하고 만다.  가례 초기부터 숙종은 궁인 출신 후궁 장씨(張氏)의 미색(美色)에 혹하여 후궁 장씨를 총애하였고 왕후를 멀리하였다. 그러자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향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다 한다.

 

 

인현왕후

(仁顯王后)역    박 하 선

 

 

행랑채

(行廊房)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도 활용하였다. 이곳에서하인들이 농한기에는 새끼를 꼬고 가마니 짜는 일을 하였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長幼)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려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하였다.

 

 

사랑채

 

사랑채는 남자주인과 귀한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행랑채와 중문채 중간에 자리하였고 대청,사랑방,누마루로 구성되어있다. 사랑채는 외부로 부터 손님들에게 숫식을 대접하고 아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어른이 자녀들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고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높은 문화생활을 한것도 사랑채에서 이루어졌으며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사랑방 문화가 발달 하였다.

 

 

명성황후

(明成皇后)

 

1851년 음력 9월 25 일 경기도 여주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에서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생가는 민유중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지은 집으로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출사하기에 앞서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하였다. 왕후는 어려서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효경》·《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민비 탄강 구리비(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역사소설 《 운현궁의봄》에서는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 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영조 가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중문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중문채는 중간계층인 청지기등이 거쳐하였던 곳이다. 또한 쌀,김치,장작등을 보관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안채의 부속건물이라 할수있고 안채와 사랑채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여성의 거주 공간인 안채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다.

 

 

 

'歷 史 旅 行 1 > 王&妃生家' 카테고리의 다른 글

盧泰愚生家  (0) 2014.08.11
盧武鉉生家  (0) 2011.09.23
尹潽善生家  (0) 2010.11.04
陸英修生家  (0) 2010.06.25
高宗生家  (0) 2010.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