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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記念&展示館

白冶金佐鎭記念館


(白冶金佐鎭記念館)

 

 

1989년 12월 20일 將軍의 誕辰 100周年을 記念하여 記念事業회가 發足하면서 생가지 復元 등 聖域化 事業의 一環으로 記念館 建立이 推進되었고 1998년 1월 23일에 開館 하였다. 이 記念館을 통해 將軍의 敎育,獨立,活動의 모습을 接 할수 있다.

 

청산리전투

(靑山里戰鬪)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日本軍 先發 步兵 1개 中隊는 埋伏事實을 모른 채 하루 前에 獨立軍이 行軍한 길을 따라 白雲評에 進入했다. 日本군 前衛部隊의 全兵力이 空地 안에 들어서고 先頭가 北路軍征西軍 제2제대의 埋伏地点으로부터 10여 보(步) 앞에 到達했을 때인 午前 9시에 獨立軍의 奇襲攻擊이 始作되었다. 獨立軍이 隱閉하고 있는 正確한 位置도 把握하지 못한 채 應射하던 日本軍 前衛部隊 200명은 交戰한 지 20여 분 만에 全滅했다. 뒤이어 到着한 야마다[山田] 討伐聯隊 本隊는 前衛部隊의 全滅에 唐惶하여 山砲와 機關銃으로 決死的으로 應戰했지만 時間이 흐를수록 犧牲者는 늘어났다. 이에 日本軍은 步兵 2개 中隊와 奇兵 1개 中隊로 1部隊를 編成해서 埋伏하고 있던 獨立軍의 側面을 迂回攻擊하려 했으나 絶壁 위에서 조준 射擊하는 獨立軍에 의해 莫大한 犧牲을 치른 뒤 敗走했다. 日本軍은 다시 前列을 整備해 埋伏한 北路軍政署군 제2제대의 正面과 側面을 山砲와 機關銃으로 攻擊했지만 完全히 掩蔽되어 있는 獨立軍의 反擊에 死傷者만 늘어날 뿐이었다. 日本軍 討伐聯隊 本隊는 自己便의 屍體를 쌓아 隱蔽物을 만든 뒤 必死的으로 反擊했으나 1,200~1,300명의 戰死者만 더 내고 宿營地로 敗走했다. 北路軍政署軍은 戰鬪에서 크게 勝利한 후 退路가 遮斷될 것을 우려해서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二道溝) 갑산촌(甲山村)으로 撤收했다. 靑山里戰鬪의 勝利는 獨立軍 兵士들의 英雄的 奮戰, 地形을 적절히 利用한 指揮官들의 優秀한 遊擊作戰, 間島地域 朝鮮人들의 獻身的인 支持와 聲援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것이었다.

 

김좌진장군

(金佐鎭將軍)

 

本官은 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아버지는 형규(衡奎)이다. 富裕한 名門 出身으로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老婢를 解放하고 土地를 小作人에게 分配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陸軍武官學校에 入學했다. 1907년 故鄕으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大韓協會 支部를 組織하는 등 啓蒙運動을 展開했다. 기호흥학회에 參與하는 한편 1909년 漢城旬報 理事를 歷任하고,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西北學會를 組織했다. 西北學會 傘下敎育機關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設立하여 校監을 歷任했으며, 靑年學友會 設立에도 協力했다. 1911년 軍資金 募金혐의로 日帝警察에 逮捕되어 2년 6개월간 西大門刑務所에 投獄되었다.

 

대한독립선언서

(大韓獨立宣言書)

 

1918년 金敎獻,金東三,金佐鎭 등 滿洲와 러시아에서 活動하던 獨立運動家 39인이 "大韓은 完全한 自主獨立國임과 民主의 自立國임을 宣布"하고 武裝鬪爭을 통한 獨立達城을 主張한 獨立宣言書로 一名 戊午獨立宣言書 라고도 한다. 

 

장 총

(長銃)

 

獨立軍이 使用한 武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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