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3/記念&展示館

獨立記念館

 (獨立記念館)

 

 

 

해방(解放) 後부터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  건립(建立)에 대한 논의(論意)가 있었으나, 1982년 8월 일본(日本)의 敎科書왜곡(歪曲)事件을 계기로 獨立記念館 建立을 추진(推進)하게 되었다. 政府에서는 건립부지(建立敷地)를 매입(買入)하여 제공(提供)했고 國民들의 성금(誠金)으로 建立에 所要된 資金을 충당(充當)했다. 1987년 8월 15일 개관(開觀)된 獨立記念館은 總大地面積 99萬 3,914㎡, 37개동의 各種 建物에 國難克復史와 獨立運動 關係資料 1만여 점을 展示하고 있다.

 

겨레의탑

(겨레의塔)

 

民族의 비상(飛上)을 표현(表現)하고 있는 겨레의 塔은 막 大地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 오르는 새의 날개 같기도 하고. 祈禱하는 양손과 같기도 하다. 過去와 現在와 未來에 걸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민족기상(民族氣想)을 표상(表象)하고 民族의自主. 자립(自立)을 향한 의지(意志)를 나타낸것이다. 前.後面에 無窮花와 太極의 躍動하는 부조가 있고 塔內部에는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의 4신도를 象徵화한 모자이크 彫刻이 4면을 粧飾하고 있다. 바닥에는 花崗石으로 國土가 그려져 있고 . 黃銅鑄物管 24괘로 方向을 標示하였다. 높이가 51 m인 大形 造形物 이다.

 

겨레의큰마당

 

 겨레의 집앞 廣場으로 폭 222m 길이 258 m 面積은 약 11,657 평  民族의 독립정신(獨立情信)과 자주의식(自主意息)을 고취(鼓吹)하고 나라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光復60년의 해인 2005년 光復을 象徵하는 815기의 太極旗를 年中揭揚 하는 “太極旗한마당”을 獨立記念館에 組成하였다.

 

독립기념관

(獨立記念館)

解放 後부터 獨立記念館 建立에 대한 論議가 있었으나, 1982년 8월 日本의 敎科書歪曲事件을 계기로 獨立記念館 建立을 推進하게 되었다. 政府에서는 建立부지를 買入하여 提供했고 國民들의 誠金으로 建立에 所要된 資金을 充當했다. 1987년 8월 15일 開館된 獨立記念館은 총대지면적 99만 3,914㎡, 37개동의 各種 建物에 國難克服史와 獨立運動 關係資料 1만여 점을 展示하고 있다.獨立記念館의 象徵이자 中心 記念 홀의 役割을 하는 建物이다. 길이 126m, 폭 68m로써 蹴球場만한 크기로 높이는 15층 높이(45m)에 이르는 東洋最大의 기와집이다. 高麗時代 建築物인 修德寺 大雄殿을 본떠 設計한 韓式 맞배지붕 建物이며, 北京의 天安門보다 더 크다.

 

백련못

(白蓮못)

 

약 26.446㎡의  면적(面積)에 50.000톤이 담수(淡水)되어 있는 이 연못의 물은 흑성산 山頂으로부터 開水路를 通하여 연못으로 유입(流入)하도록 하였으며. 외각 호안은 地形의 連續性을 살려 완만하게 土沙처리를 하면서 自然石을 配置하여 녹지와 나무그늘을 만들어 觀覽客이 接할수 있는 아름다운 休息空間으로 組成되었다.

 

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

 

中國 집안에 있는 高句麗 제19대 廣開土大王의 능비(陵碑)로, 好太王碑라고도 부른다. 414년 廣開土大王의 아들 長壽王이 세웠다. 韓國에서 가장 큰 碑石으로 碑身의 높이는 5.34m, 각 면의 너비는 1.5m이다. 4면에는 총 1,802자의 碑文이 적혀져 있다. 이 記錄은 韓國의 상고사(上古史), 특히 三國의 政勢와 日本과의 關係를 알려 주는 重要한 金石文 資料이다. 民族史의 繼統을 明白히 定立하고, 高句麗인의 氣像을 보여주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獨立記念館 겨레의 큰 마당에 再現하였다. 6.4m의 거대한 廣開土大王陵碑는 4면에 새겨진 1,800여자의 碑文을 통해 高句麗의 歷史的 事實을 傳하고 있다.

 

제1展示館인 民族傳統館은 獨立運動의 歷史的 背景을, 제2展示館인 近代民族運動館은 帝國主義 侵略 및 義兵 戰爭·啓蒙運動을, 제3展示館인 日帝侵略館은 日帝의 時期別 植民統治를, 제4展示館인 3·1運動館은 3·1運動의 展開科程 및 1910년대의 獨立運動을, 제5展示館인 獨立戰爭館은 海外 獨立軍의 活動 및 國內 各界 各層의 獨立運動을, 제6展示館인 臨時政府館은 臨時政府와 光復軍 및 海外 僑胞들의 生活相을, 제7展示館인 大韓民國館은 解放 以後 지금까지의 變天史를 각각 展示하고 있다.

 

독립문

(獨立門)

 

서울特別市 西大門區 峴底洞에 있다. 史蹟 제32호. 높이 14.28m, 너비 11.48m. 中國使臣을 接待하던 모화관(慕華館)의 正門인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建陽 1) 美國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組織한 獨立協會 發議로 高宗의 同意를 얻어 3,825원을 募金해 1896년 11월 21일 定礎式을 擧行하고 이듬해 11월 20일 完工했다. 獨逸 公使館의 스위스인 기사가 設計했으며, 당시 西洋建築의 조영경험이 있던 木手 심의석(沈宜碩)이 工事監督을 맡아 中國人 勞動者를 雇用해 만들었다. 設計者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많은 建物을 設計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라는 說도 있다.

 

고난극복의한국인상

(韓國人像)

 

日帝의 殘酷한 植民統治 아래 온갖 試鍊과 苦難을 당해 民族의 精氣가 말살된뻔한 危機를 겪으면서도 祖國의 獨立과 民族의 回生을 熱望하는 韓國人의 象을 象徵的으로 表現한 作品이다   이상갑  작품

 

 

이밖에 겨레의 집 內部에는 不屈의 韓國人 象, 詩碑·追慕碑 및 祖上들의 生活을 엿볼 수 있는 105m 길이의 부채꼴 模樣 彫刻이 있다. 原形劇場에는 360°의 스크린이 附着되어 있어 各種 內容을 上映하고, 野外庭園에는 51m 높이의 겨레의 塔이 세워져 있다. 한편 獨立運動의 關係資料 收集·保存·展示 및 學術硏究를 擔當하기 위해 附設로 韓國獨立運動硏究所를 設置·運營하고 있다.

 

불굴의한국인상

(不屈義韓國人像)

 

겨레의 집 內部 大形홀 中央에 位置하며 愛國愛族의 정이 솟아오르게 하는 記念館 象徵 造形物로서 불굴의 獨立精神과 강인한 韓國人 象을 象徵한다. 1개당 무게가 3∼4톤 나가는 花崗岩 274개를 적석하여 하나의 群像을 이루는 丸彫이다. 뒷면에는 白頭山 天地의 부조가 彫刻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彫刻像이 連結되어 용솟음치듯 蒼空을 向해 前進하는 姿勢를 취하고 있는 것은 白頭山 精氣를 받은 우리 民族의 自主와 獨立, 人類平和와 繁榮을 向해 쉼없이 表出되었던 불굴의 기상을 表象한 것이다. 뒷면 양쪽에 抑壓의 사슬을 끊고 自由와 나라의 獨立을 위해 나아가는 獨立鬪爭의 勇士 象이 부조되어 있다.

 

衛國獻身    軍人本分

 

(太極旗)

 

 

韓國에서 國旗制定에 대한 論議가 試作된 것은 1876년(高宗 13) 1월이었다.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韓日 사이에 江華島條約의 締結이 論議되는 동안 日本側은 "운요호에는 日本의 國旗가 揭揚되어 있었는데 왜 砲擊을 가했는가?"하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나 당시 朝鮮은 國旗가 갖고 있는 意味와 內容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朝廷에서는 國旗制定의 必要性이 活潑하게 擧論되기 始作했으며, 1882년 8월 9일 特命全權大使 겸 修信使인 朴泳孝 등 一行이 仁川에서 日本 船舶 메이지 마루[明治丸]를 타고 日本으로 건너갈 때, 태극사괘(太極四卦)의 圖案이 그려진 기를 國旗로 할 것에 意見을 모아 船上에서 이것을 만들었다. 이는 도일(渡日) 하기 전에 이미 朝廷에서 構想되고 論議되어 어느 정도 贊成을 본 것을 다소 修訂한 것이라 한다. 당시 修信使 一行에는 後日 開化黨의 主役이었던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도 있었다. 이들 一行은 8월 14일 고베[神戶]에 到着해 니시무라야[西村屋]에 宿所를 定 하고, 이 建物에 배 안에서 만든 太極師卦가 圖案된 기를 揭揚했는데, 이것이 太極旗의 曉示이다.

 

불굴의한국인상

(不屈義韓國人像)

 

겨레의 집 內部 大形홀 中央에 位置하며 愛國愛族의 정이 솟아오르게 하는 記念館 象徵 造形物로서 불굴의 獨立精神과 강인한 韓國人 象을 象徵한다. 1개당 무게가 3∼4톤 나가는 花崗岩 274개를 적석하여 하나의 群像을 이루는 丸彫이다. 뒷면에는 白頭山 天地의 부조가 彫刻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彫刻像이 連結되어 용솟음치듯 蒼空을 向해 前進하는 姿勢를 취하고 있는 것은 白頭山 精氣를 받은 우리 民族의 自主와 獨立, 人類平和와 繁榮을 向해 쉼없이 表出되었던 불굴의 기상을 表象한 것이다. 뒷면 양쪽에 抑壓의 사슬을 끊고 自由와 나라의 獨立을 위해 나아가는 獨立鬪爭의 勇士 象이 부조되어 있다.

 

무궁화

(無穹花)

 

그루 전체에 털이 거의 없고 많은 가지를 치며 나무껍질은 회색이다. 잎은 마름모꼴의 계란 모양으로 어긋나며 얕게 3갈래로 갈라진다. 잎자루가 짧고 잎가장자리에는 불규칙한 작은 톱니가 있다. 꽃은 종 모양으로 새로 자라난 가지에 돋아난 잎겨드랑이에서 1송이씩 피며 꽃자루가 짧다. 꽃은 매일 이른 새벽에 피며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말라 떨어지는데, 3개월 동안 매일 새 꽃이 피어 계속 신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꽃은 홑꽃과 여러 형태의 겹꽃이 있는데, 꽃잎이 5장으로 된 홑꽃은 도란형(到卵形)이고 밑부분이 서로 붙어 있으며, 지름이 보통 6~10㎝이다

 

황룡사지 

(皇龍寺址)

 

史蹟 제6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의하면 553년(眞興王 14)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宮闕을 지으려고 할 때 黃龍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皇龍寺라는 절을 짓기 始作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安置하고,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建立했다고 한다. 645년(善德女王 14)에는 木塔을 세웠고, 그뒤 몇 차례 重建되면서 高麗時代까지 國家王室의 保護 아래 護國寺刹로서 崇仰되었으나 1238년(高宗 25) 몽골 侵入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現在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터는 文化材硏究所 주관으로 1976년 6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發掘조사가 이루어졌다.

 

황룡사9층탑

(皇龍寺9層塔)

 

發掘報告書에 의하면 總面積 약 2만 여 평에 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南北으로 길게 늘어선 일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로 알려졌으나, 金堂의 左右에 거의 같은 規模의 建物이 나란히 있고 塔 앞쪽에도 역시 左右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建物이 對稱으로 서 있는 독특한 伽藍救助였음이 確認되었다고 한다. 이 建物들은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남회랑이 東·西 回廊보다 더 길게 延長되어 있고, 이 남회랑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北쪽으로 긴 建物地가 連結되어 있는 점 등에서 회랑이 서로 連結되어 있지 않고 獨立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특이한 嘉藍配置는 〈三國遺事〉에도 보이듯이 皇龍寺가 1, 2차에 걸쳐 嘉藍이 形成되었다는 史實과도 一致된다. 現在 절터는 民家와 耕作地로 變하여 痕跡만 남아 있지만, 특히 신라3보(新羅三寶)인 章陸尊像과 9층木塔이 있었던 石彫對坐와 心礎石이 남아 있는 곳으로 有名하다.

 

황룡사치미

(皇龍寺鴟尾)

 

대체로 용마루에 얹을 수 있도록 밑부분에 半圓形의 홈이 패어 있고, 옆면에는 몸통과 깃부분을 구분하는 굵은 융기선이 있는데 그 바깥쪽에는 날짐승의 깃털이 층단을 이룬 形態를 띠고 있다. 치미의 紀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象徵으로 鳳凰에서 由來되었다는 것이 가장 一般的이다. 三國時代 以後 高麗 中期까지 盛行했으나, 唐나라 後期에 流行된 치문(鴟吻)의 影響을 받아 화마(火魔)를 잡아먹고 살아서 억화(抑火)와 금화(禁火)의 效能이 있다는 물고기 形象으로 儀仗이 바뀌면서 衰退했다. 따라서 朝鮮時代의 지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으며 대신 용두(龍頭)·취두(鷲頭) 등이 登場한다. 現在 남아 있는 遺物로는 扶餘 서복사지(西復寺址)에서 出土된 百濟時代의 치미(國立扶餘博物館 所藏),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出土된 古新羅時代의 치미(國立慶州博物館 所藏), 慶州 천군리사지(千軍里寺址)에서 발견된 雉尾(國立慶州博物館 所藏), 기림사(祇林寺)에서 出土된 花崗岩제로 된 치미(東國大學校 博物館 所藏) 등이 있다. 이 皇龍寺는 三國時代에 가장 큰 規模의 절로 新羅 佛敎受用 初期에 지은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6세기 候班의 代表的인 王室寺刹이었다. 〈三國遺事〉에 나오는 印度에서 傳來된 象을 母本으로 만든 章陸尊像이나 9層塔에 대한 傳說, 가섭불이 앉았던 연좌석(宴坐石)의 記錄 등에 의해서 新羅가 釋迦誕生 以前부터 佛敎와 因緣이 깊은 불국토(佛國土)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出土된 遺物들은 新羅佛敎 文化硏究에 重要한 資料가 된다.

 

거북선

(거북船)

 

거북선에 관한 記錄은 朝鮮 初期의 太宗實錄에 처음 보이기 始作한다. 1413년(太宗 13)에 "王이 壬辰江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倭船으로 꾸민 배가 海戰演習을 하는 模樣을 보았다"라는 句節이 있고, 또 1415년(太宗 15)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귀선의 戰法은 많은 敵과 衝突하더라도 敵이 해칠 수가 없으니 決勝의 良策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 譴告하고 正敎하게 만들게 하여 戰勝의 道具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上訴하고 있다. 이러한 記錄 內容으로 보아 거북선은 倭寇의 擊退를 위하여 突擊線으로 특수하게 製作된 장갑선(裝甲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거북선의 紀元을 倭寇의 侵害가 가장 심했던 高麗 末期로 보는 見解도 있다. 이와 같이 거북선은 高麗末, 또는 朝鮮 初期에 이미 製造·使用되었으며,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는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創製된 鐵甲船으로서의 거북선이 實用化되었다. 鐵甲船으로서 世界的 船具인 李舜臣의 거북선은 壬辰倭亂 初盤의 잇따른 海戰에서 艦隊의 先鋒이 되어 突擊線의 威力을 남김없이 發暉하였다. 그러나 李舜臣의 投獄과 더불어, 또는 그의 戰歿 以後에는 거북선의 實用이 저하되고 만다. 壬辰倭亂 後 거북선은 時代에 따라 當初의 制度를 喪失하고 變貌하면서 朝鮮 末期까지 각 水營에 存在하였다. 따라서 가장 큰 關心의 對象이 된 거북선은 壬辰倭亂 당시 李舜臣에 의하여 창작, 구사된 거북선이다.

 

측우기

(測雨器)

 

예로부터의 잦은 洪水와 가뭄으로 인한 被害 및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農業生産構造는 일찍부터 降雨現狀에 注目하고 雨量을 測定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傳統的인 降雨量 測定方法은 매우 不正確한 것이었으므로 보다 科學的인 測定의 必要性이 대두되어 1441년(世宗 23) 8월에 서운관(書雲觀)에서 測雨器를 製作하게 되었다.

 

장군갑옷

 

승자총통

(勝字銃筒)

 

寶物 제648호. 소화기(小火器)의 일종으로 육전용(陸戰用)이다. 1575~78년에 全羅左水使와 慶尙兵事로 있던 김지(金墀)가 만든 것으로, 1583년에 일어난 니탕개(尼蕩介)의 난 때 이 火器로 敵을 물리치는 데 功을 세웠다. 使用하는 方法은 銃口에 火藥과 實彈을 奬進하는 전장식(前裝式)이다. 〈火砲式諺解〉 勝字銃筒조에 의하면, 중약선(中藥線:약선 구멍에 꽂는 火藥선)은 3촌(寸), 화약은 1냥(兩), 토격(土隔:흙으로 火藥을 견고히 하기 위해 밀폐시킴)은 6분이다. 철환(鐵丸) 15개를 長進하여 發射하거나 피령목전(皮翎木箭)을 發射했는데, 그 거리는 600보(步)였다. 國立中央博物館에 所藏되어 있다.

 

신기전

(神機箭)

 

高麗時代 최무선(崔茂宣)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最初의 로켓 火器는 주화(走火)로, 朝鮮時代에 들어와 1448년(世宗 30) 여러 火器의 改良 때 神機箭으로 바뀌었다. 〈國朝五禮序例〉 兵器圖說에 의하면 大·中·小 神機箭과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이 있었는데, 大神機箭과 山火神機箭은 규모는 비슷하나 약통과 發火筒의 位置와 構造가 다르다고 했다. 大神機箭에는 大神機箭發火筒이 附着되어 있으며, 山火神機箭은 大神機箭발화통을 使用하지 않고 지화(地火)와 발화(發火)를 묶어 넣어 使用했다. 中神機箭도 소발화(小發火)라는 爆發物을 使用한 데 반해 小神機箭은 爆發物을 使用하지 않았다. 文宗 때 火車가 發明된 뒤 火車를 發射틀로 하여 神機箭을 發射했다. 射程距離는 大神機箭과 山火神機箭은 1,000m 이상, 中神機箭은 150m, 小神機箭은 약 100m 程度로 보인다.

 

저 울

(balance)

 

機械式 저울은 必須的으로 지렛대 받침처럼 水平 中央 나이프에지에서 흔들리는 단단한 저울대로 이루어져 있고 이 저울대 양 끝에는 中心에서의 거리가 같고 서로 나란한 2개의 나이프에지가 있다. 測定한 物體는 지지부에 매달린 접시에 놓여진다. 최상의 設計를 위해서는 2개 이상의 나이프에지가 말단 지지부과 접시 사이에 추가되어 놓이는데, 하나는 平面의 기울어짐을 防止하고 다른 하나는 말단 나이프에지의 특정한 位置에 物體의 荷重을 固定시킨다.

 

하회탈

(河回탈)

 

하회탈 및 병산탈(河回탈 및 屛山탈)은 國寶 121호로 指定된 民俗工藝類의 裝身具 文化遺産이다. 慶北 安東 河回마을과 屛山마을에서 現存하여 이어지고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가장 原流에 해당하는 하회탈은 現在 國立中央博物館에 保存되어 있으며 그 種類는 크게 11가지이다.  하회마을에서 만들어져 傳해지고 있는 하회탈의 具體的인 誕生에 대해서는 把握하기 어렵다. 다만 오래전부터 口傳으로 허도령이 탈을 만들어 이어오고 있다는 말이 있다. 하회마을 自體 記錄에 따르면 허씨 一家가 안씨가 들어오기 전에 이곳에 살았고 그 후인 朝鮮 前期에 유씨 일파가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文化財廳에서는 高麗 中期 대부터 탈이 생겨나기 始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住民들은 마을을 지키는 守護神을 敬拜하고자 每年 正月대보름 즈음에 탈놀이를 하며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했다. 一般的으로 韓半島에서 行해졌던 탈놀이는 대개 놀이가 끝나면 탈을 다 태우는 것으로 일단락 됐지만 하회탈의 경우에는 다루는 法과 保存에 있어 嚴格했으며 함부로 다루는 일은 容納되지 않았다.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만들며 그 위에 옻칠은 두세번하여 精巧한 색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턱 부분은 턱이 없는 이매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따로 彫刻되어 있어서 아래턱 부분을 끈으로 이어 움직이게 한다. 이는 더욱 生動感을 높이는 구실을 한다. 하회탈은 韓國人의 얼굴로 稱頌될만큼 造形藝術의 가치가 뛰어나다. 韓半島에서 나타난 탈의 경우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어 오래 보존되지 않거나 現在까지 把握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회탈은 드문 形態의 목조탈이기에 形態를 維持해 지금까지 알려질 수 있었으며 扮裝 道具로서 뛰어난 作品임을 表現한다.  하회탈은 별신굿 놀이에서 빠질 수 없는 道具로서 兩班社會를 批判하고 꾸짖는 役割을 遂行했으며 一般 平民을 對象으로 하여 크게 盛行했다.

 

수동통신교환기

(手動通信交煥機)

 

送信者와 受信者 사이의 回線을 交換員이 直接 連結하는 電話 交換機

 

전 차

(電車)

 

인쇄기

(獨立記念館)

 

을사보호조약체결

(乙巳保護條約) 

 

마포형무소

(麻布僑道所)

 

韓日 倂合 條約 締結 전인 1908년에 西大門刑務所의 前身인 京城監獄이 서울西大門區에 지어졌다. 京城監獄의 受容 空間이 不足해지자 서울 麻浦區 孔德洞에 새 監獄이 新設되어 京城監獄으로 불리게 되었고, 西大門의 京城監獄은 西大門監獄으로 改稱했다. 麻浦의 京城監獄은 1023년부터 京城刑務所로 이름을 바꾸었다. 日帝 强占期 동안 大田刑務所와 함께 無期囚나 장기 受刑者를 受容하였다.김일성의 叔父인 김형권이 獄死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日帝 敗亡 後 1946년에 麻浦刑務所로, 1961년에는 麻浦矯導所로 각각 改稱했다. 1963년 京畿道 安養市에 新設된 安養矯導所로 移轉하면서 廢止되었다. 麻浦刑務所 建物은 移轉 後 사라졌고, 그 터에는 서울地方法院 西部支院이 들어서 있다. 1995년에 麻浦區 孔德洞 105번지 麻浦刑務所 자리에 "1912년 日帝가 京城刑務所를 設置하여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遺跡地"라고 적힌 表石이 設置되었다.

 

겨레의 함성

(獨立記念館)

 

독립선언서

(獨立宣言書)

 

이봉창 

(李奉昌)

 

그는 오후 2시에 觀兵式을 마친 후 馬車를 타고 돌아가는 日王의 行列이 나타나자, 群衆 속에서 달려나와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日王이 탄 馬車를 正確히 識別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旗手와 近衛兵에게 負傷을 입혔을 뿐 日王을 命中시키지는 못했다. 그 자리에서 품안에 있던 太極旗를 꺼내 '大韓獨立 萬歲'를 3번 부른 뒤 逮捕되었다. 李奉昌은 日本 警察의 審問에 一體 不應한 가운데 豫審조차 거치지 않고 進行된 그해 10월의 非公開 裁判에서 死刑宣告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刑務所에서 殉國했다.

 

안중근

(安重根)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大韓帝國의 敎育家, 獨立運動가가, 大韓義兵 參謀中將이다. 本官은 순흥, 高麗朝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1905년 朝鮮을 사실상 日本의 植民地로 만든 乙巳條約이 締結된 것에 抵抗해, 獨立 運動에 投身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中國 하열빈 驛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狙擊, 射殺했다.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天主敎 信者였던 그의 세례명은 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安重根 토마스(혹은 도마 安重根)라고도 불린다.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브쵸프와 會談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하얼빈 驛 前 驛인 채가구 驛, 창춘 驛에서도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화의 暗殺 計劃이 있었으나 각각 鐵桶 같은 수색과 驛長의 疑心으로 인해 失敗하였다. 하얼빈 驛, 安重根은 機會를 노리다가 汽車에서 내리는 이토 히로부미를 六穴砲로 狙擊하였다.이토 히로부미는 銃을 맞은 지 3분 후,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김좌진

(金佐鎭)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中心이 되어 結成한 光復團에 加擔하여 活動했다. 1918년 滿洲로 건너가서 大倧敎에 入校하고, 3·1獨立宣言의 前奏曲이 되는 戊午獨立宣言書에 39명의 民族指導者 가운데 한 사람으로 署名했다. 1919년 서일(徐一)을 中心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했다. 같은해 8월 종래의 정의단이 臨戰太歲의 군정부(軍政府) 組織으로 改編되자 中心人物로 活動했다. 12월 軍政府가 名稱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改稱했을 때, 所屬 武裝獨立軍의 總司令官이 되어 獨立軍 編成에 注力했다. 이어 왕칭 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 산골짜기에 短期續成士官學校를 세우고 仕官兩性과 武器入手에 勞力했다. 1920년 10월 日本군 대部隊가 獨立軍 討伐을 目的으로 滿洲로 出兵하자, 所屬 獨立軍을 長白山으로 移動시키던 도중 靑山里에서 日本軍과 만나 戰鬪를 벌였다. 10월 20~23일까지 繼續된 10여 차례의 戰鬪에서 나중소(羅仲昭)·박영희(朴英熙)·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日本軍 3,000여 명을 殺傷하는 戰果를 올렸다. 그뒤 北쪽으로 移動하여 헤이룽 강[黑龍江] 부근에 到着, 여기에 集結한 10여 개의 獨立軍 團體를 統合하여 大韓獨立軍團을 結成하고 副總裁로 就任했다.

 

손기정

(孫基禎)

 

제11회 베를린 올림픽大會의 마라톤競技 優勝 副賞品으로 받은 靑銅 鬪具, 國立中央博物館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1919년 4월 13일 中國 상하이[上海]에 樹立·宣布된 以後 1945년 11월 김구(金九) 등이 還國할 때까지 日帝의 强制占領을 拒否하고 國內外를 統轄·統治했던 3勸分立의 民主共和政府.

 

안중근

(安重根)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2일~1910년 3월 26일)은 大韓帝國의 敎育家, 獨立運動가, 大韓義兵 參謀中將이다. 本官은 순흥, 高麗朝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1905년 朝鮮을 事實上 日本의 植民地로 만든 乙巳條約이 締結된 것에 抵抗해, 獨立 運動에 投身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中國 하얼빈 驛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狙擊, 射殺했다.

 

 

1995년 8월 15일 光復 50周年을 맞이하여 日帝의 殘在를 淸算하고, 民族精氣를 回復하기 위해 撤去한 구 朝鮮總督府建物의 撤去資材로 展示公圓을 造成하여 過去事를 淸算하고 밝은 未來를 指向하는 討論의 場으로 活用할 수 있도록 造成한 公園이다.

 

중앙청

(中央廳)

 

 1916년 日帝가 植民統治의 威嚴을 내세우기 위해 建立한 朝鮮總督府의 建物로서, 日帝强占期에는 日本의 歷代 總督들이 使用했고, 8·15解放 후 미군정기(美軍政期)에는 軍政廳으로 使用되었다. 이때부터 이 建物은 中央廳이라고 불리기 始作했다. 政府가 樹立된 以後에는 李承晩 大統領이 이곳을 執務室로 使用했고, 6·25戰爭 때 建物 一部가 破壞되기도 했다. 5·16軍事政變 후 復舊工事를 통해 建物을 새로이 修理했으나 朴正熙 大統領이 이곳을 執務室로 使用하지 않아, 대신 國務總理실을 비롯한 主要政府部處의 廳舍로 使用되었다. 그러던 중 日帝 植民統治의 象徵인 이 建物을 主要政府機關의 廳舍로 使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與論이 거세게 일자, 이를 國立中央博物館으로 改造하기로 決定하고 1986년 8월부터 博物館으로 開館하여 一般에 公開했다. 1993년 8월 民族精氣의 回復 次元에서 金泳三 大統領이 完全解體하여 이곳에 展示하고있다.

 

침울한역사의장

(沈鬱한歷史의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첨탑(尖塔) 등 철거(撤去) 부재(部材)를 지하(地下) 5미터의 공간(空間)에 매장(埋葬)하여 전시(展示)하는 기법(技法)을 도입(導入)함으로써 일제(日帝) 잔재(殘滓)의 청산(淸算)과 극복(克服)이라는 의미(意味)를 부여(附與)한 공간(空間)이다 첨탑(尖塔)과 돔 하부(下部)의 모서리 석조물(石彫物) 정초석(定礎石) 정면(正面)  출입구(出入口) 상부(上部) 부조물(浮彫物) 원기둥(圓柱) 등이 전시(展示)되어 있다.

 

 

겨레의 집 앞 廣場으로 폭 222m, 길이 258m, 면적은 약 38,535㎡이다. 獨立記念館 開館 記念行事나 열린音樂會 같이 수만 名 이 모이는 大規模 行事를 치룰 수 있다. 中央部는 花崗石 포장으로 되어 있고, 외부는 온양판석과 잔디마감으로 되어 있다.

 

 

'歷 史 旅 行 3 > 記念&展示館' 카테고리의 다른 글

戰爭記念館 1  (0) 2010.04.03
堤岩里3.1運動殉國記念館  (0) 2009.12.25
卍海韓龍雲記念館  (0) 2009.06.21
柳寬順烈士記念館  (0) 2009.05.14
白冶金佐鎭記念館  (0) 2009.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