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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 1 (野外展示場)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은 307,227㎡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規模로 세워졌다. 우리의 傳統的인 建築精神을 現代的으로 再解釋한다는 槪念에 따라, 壯大하게 하나로 보이는 두 建物 가운데에 우리 建築의 固有 空間인 마루를 象徵한 열린마당을 두었다. 博物館 建物은 대지 안쪽 깊숙한 곳에 傳統方式에 따라 南向받이와 背山臨水의 樣式으로 排置되어 있다. 中心部에 연못과 屋外에 展示空間·休憩施設 등을 造化롭게 配置하여 核心空間으로 構成되어 있고, 瀑布·溪流·祿地空間 등을 造成하여 文化空間으로서 利用道를 極大化했다.  博物館은 歷史觀·高古館·美術館·寄贈館·東洋館·企劃展示室·어린이관·歷史의 길·으뜸홀 등 展示領域, 收藏庫·消毒室·整理室 등의 受贓領域, 劇場·講堂·敎育施設·圖書室·資料室 등의 敎育 領域 및 硏究管理 空間 등으로 構成되어 있다. 博物館의 展示室은 考古·歷史·美術·寄贈·東洋 關聯 文化財를 展示하는 常設展示室, 各種 企劃展과 特別展을 修行하는 企劃展示室, 展示를 通한 體驗學習空間인 어린이博物館, 石造物 등을 展示해 놓은 野外 展示場 등으로 構成되어 있다.

 

野外展示場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우리나라 最初의 博物館 建立 움직임은 1907년 純宗이 德壽宮에서 昌德宮으로 移居하게 되면서 動物園·植物園·博物館 등을 創設할 計劃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계기로 1908년부터 高麗瓷器, 三國時代 이래 工藝品, 朝鮮時代 陶瓷器·繪畵 등을 收集하여, 1908년 9월 昌慶宮 내에 二王가博物館이 設置되었고, 1909년 11월 一般에게 公開되었다. 日帝强占期에 들어 朝鮮總督府는 1915년 12월 1일 시정 5주년기념 物産共進會 開催를 위해, 景福宮 내에 建立했던 美術館을 總督府博物館으로 하여 歷史遺物 및 美術品을 展示했다.

 

 

남계원칠층석탑

(南溪院七層石塔) 

국보100호

 

이 塔은 細部 描寫에서는 統一新羅 石塔을 따르고있다. 그러면서도 塔身이 7층이고 지붕이 얇고 넓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塔身의 두께가 둔중한 느낌을 주는 高麗 塔 特有의 特徵도 보인다. 특히 이 塔에서는 高麗 충열왕 (忠烈王) 9년 (1283년)에 넣은것으로 여겨지는 쪽물을 들인 종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 알곱축이 發見되기도 하였다.

 

 

갈항사동서삼층석탑

(葛項寺東西三層石塔)

국보99호

 

統一新羅時代에는 이 塔처럼 2단의 기단부(基檀部)와 3층의 탑신부 (塔身部)로 이루어진 탑이 一般的인 形態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 塔이 있던 葛項寺는 統一新羅 초기 절(寺刹)인 감은사 (感恩寺)처럼 하나의 금당 (金堂)에 두탑이 배치 (雙塔一金堂式)였을것으로 짐작된다. 東塔의 基壇部에 새겨진 글을 通해 新羅 경덕왕 (景德王) 17년 (758년)에 영묘사 (靈廟寺)언적법사 (言寂法師)세 남매가 이 塔을 만들었음을 알수 있다.

 

 

고달사쌍사자석등

(高達寺雙獅子石燈)

보물282호

 

두마리 嗣子가 불발기집 (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形態의 石燈이다. 統一新羅 時代에 이러한 形態의 石燈이 登場하지만 이 高達寺 雙獅子 石燈은 다른 雙獅子 石燈과 달리 웅크린 嗣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石燈은 高達寺가 우리나라 3 대 禪院의 하나인 고달원 (高達院)으로 名聲을 떨치던 高麗時代 初期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홍제동오층석탑

(弘濟洞五層石塔)

 

이 石塔은 서울 弘濟洞 사현사 (沙峴寺)터에 있었던 塔으로 高麗 정종 (靖宗) 11년 (1045년) 사현사 創建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推定 된다. 全體的으로 安定感이 있으면서도 溫和하고 부드러운 새김법 과 새롭게 流行한 塔身 받침의 덧붙임 그리고 벽 테두리 裝飾燈에서 高麗前期 石塔의 造形美가 드러난다. 

 

 

천수사오층석탑

(泉水寺五層石塔)

 

하층기단 (下層基壇)덮개돌 (甲石)아래 부재는 없어졌다. 各各의 탑신부 (塔身部)몸돌은 한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처마에는 各層마다 3 단의 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風景의 一種인 풍탁 (風鐸)을 단 작은 구멍이 네개씩 남아있다. 塔 꼭대기 粧飾인 상륜부 (上輪部)는 現在 남아 있지 않다.

 

 

천수사삼층석탑

(泉水寺三層石塔)

 

 塔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 (基壇部)는 統一新羅 石塔에서 보이는 2층 基壇 形式이다. 탑신부 (塔身部)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고 2층 塔身 아래에는 굄돌이 놓여져 있다. 지붕처마 층단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지붕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塔의 꼭대기에 해당되는 상륜부 (相輪部)에는 네모난 지붕모양 粧飾 만 남아있다.

 

 

영전사보제존자사리탑

(令傳寺普濟尊者舍利塔)

보물358호

 

보제존자 (普濟尊者) 나옹 (나옹 1320 ~ 1376)의 사리 (舍利)를 모시기위해 高麗 우왕(禑王) 14년(1388)에 세운 승탑 (僧塔)이다. 普通僧塔이 팔각 집(八角堂)模樣이거나 鐘 模樣을 띠는 것에 비해 이 僧塔은 특이하게 불탑 (佛塔) 과 같이 네모난 形態의  두탑으로 이루어져 매우 이채롭다. 奈翁의 舍利를 모신 僧塔은 이 塔 외에도 그가 입적 (入寂) 한 여주 (驪州) 신륵사 (神勒寺)와 그가 주지 (住持)로 있던 양주 (楊州) 회암사 (會巖寺) 터에도 남아 있다.

 

 

안흥사오층석탑

(安興寺五層石塔)

 

이 塔은 2층 基壇위에 5층의 塔身과 상륜부 (相輪部)가 있는 一般的인 形態이다. 塔身높이는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며 처마밑 층단받침은 네단인 5층을 除外하고는 모두 다섯단을 이루고 있다. 相輪部에는 네모난 지붕모양의 粧飾만 남아 있다. 塔의 細部 數法이 統一新羅 石塔의 樣式을 띠며 均衡잡힌 比例로보아 統一新羅 말에서 高麗 初期에 만들어진 石塔으로 보인다.

 

 

부 처

石造佛 立像 高麗 10 ~ 11世紀

 

 

보신각종

(普信閣鐘)

보물2호

 

朝鮮 세조 (世祖) 14년 (1468년) 圓覺寺 (現在탑골公園)에 걸기위해 만든 鐘 이다. 절이 없어진후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光海君 11년 (1619년) 普信閣으로 옮겨져 파루 (罷漏) 오전 4시에 33 번 인정 (人定) 오후10시에 28 번 울려 都城 門을 여닫는 時間을 알리는데 쓰였다 하나의 몸체에 양 쪽으로 龍머리가 달린 粧飾 고리가 달려 있으며 몸통한 가운데는 세 겹의 띠가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模樣의 종은 高麗末부터 流行하기 始作하여 朝鮮時代에 들어와 널리 만들어진다

 

 

염거화상탑

(廉居和尙塔)

국보104호

 

이 승탑 (僧塔) 은 탑지 (塔誌)가 함께  傳해져 僧塔의 主人公과 만들어진 年代를 알수 있는 매우 貴重한 塔이다. 新羅 문성왕 (文聖왕) 6년 (844)에 선종 (禪宗) 산문 (山門)가운데 하나인 가지산문 (迦智山門)의 제 2 대 先師인 염거화상 (廉居和尙) 을 위해 만든 것으로 팔각집 (八角堂)모양에 四天王 등의 浮藻像을  새긴 典型的인 僧塔의 모습이다. 以後 만들어진 僧塔들은 이 僧塔을 따라 大部分 八角 構造에 華麗한 浮藻像을 새겼다.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

(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

보물362호

 

이 僧塔은 (僧塔)은 統一新羅 末期의 高僧으로 新羅 선종 (禪宗) 산문 (山門)중 하나인 봉림산문 (鳳林山門)을세운 진경대사 (眞鏡大師) 심희(審希) 855 ~ 923의 묘탑 (墓塔)이다. 八角집 模樣을 充實히 따르고 있으며 全體的으로 날씬한 몸체에 粧飾을 節制하면서도 變化를 시도한 造形的 特徵을 보인다. 특히 基壇部 가운데 꽃띠를 두른 북모양 中臺石은 같은시기 石燈에서 보이는 形式 가운데 하나이다. 

 

 

보리사대경대사현기탑비

(普리寺大鏡大師玄機塔碑)

보물361호

 

이 塔碑는 新羅末에서 高麗初期에 活動하던 성주산문 (聖住山門)의 대경대사 (大鏡大師) 여엄 (麗嚴) 862 ~ 930 의 業績을 記錄한 碑石이다. 대사가 입적 (入寂)한지 9 년이지난 高麗太祖 22년 (939년)에 세워졌다. 거북 받침돌 (龜)의 거북머리가 龍머리로 바귀었는데 이러한 傾向은 統一新羅 末부터 高麗初期에 만들어진 塔碑에서 나타나는 特徵 가운데 하나이다. 머릿돌의 구름과 龍은 매우 生動感 있게 彫刻되었다.

 

 

흥법사진공대사탑.석관

(興法寺眞空大師塔.石棺)

보물365호

 

이 승탑 (僧塔)은 新羅 신덕왕 (神德王)과 高麗태조(太祖)의 왕사 (王師)를 지낸 진공대사 (眞空大師) 충담 (忠湛) 869 ~ 940 의 묘탑 (墓塔)이다. 眞空大師 입적 (入寂)과 함께 세워진것으로 여겨지는 이 僧塔의 塔身은 八角집 模樣을 基本 平面으로 하고 있지만 基壇 中臺石은 圓筒形에 구름과 용무니(雲龍文)가 華麗하게 彫刻되어 있어 매우 이채롭다. 이 塔과 함께 發見된 석관 (石棺)을 통해 高僧의 屍身을 화장 (火葬)뿐만아니라 매장도 (埋葬)도 했음을 알수 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

(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

보물190호

 

원공국사 (圓空國師)지종 (智宗) 930 ~ 1018년 의 묘탑 (墓塔)이다. 江原道 原州 거돈사 터에는 이 僧塔과 짝을 이루는 圓空國師의 塔碑가 남아있다. 統一新羅의 典型的인 僧塔形式을 이어받아 丹精하고 均衡잡힌 八角의 形態에 四天王 八部衆 등의 浮藻像을 새겼다. 塔身正面 문위에 탑 이름을 새긴 점이나 塔身에 꽃띠 粧飾을 한것등은 高麗時代에 새롭게 始睹된것이다.

 

 

훈민정음

(訓民正音)

 

"나랏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내 이 爲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노니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미니라"라는 序文에는世宗이 訓民正音을 만든 目的과 함께 새 글자 唱題의 바탕을 이룬 精神이 나타나 있다. 즉 첫째 우리가 中國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中國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强調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民族자주精神이 强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百姓'이란 一般 百姓을 가리키는 말로, 漢字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民本精神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백과사전)

 

 

현화사석등

(玄化寺石燈)

德壽2735

 

高麗 현종 (顯宗) 10년 (1020) 開城 玄化寺에 세운 石燈이다. 規模가 큰 이 石燈으로 미루어 당시 國家 大刹로 創建된 玄化寺의 名聲을  斟酌할수 있다. 一般的으로 石燈의 불발기집(火舍石)은 八角으로 된것이 많은데 이 石燈은 四角이며 불빛창 (火窓)도 따로없이 四方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다. 石燈 앞에 있는 배례석 (拜禮石)은 供養 가운데 으듬으로 치는 등공양 (燈供養)을 할때 禮를 갖추기 위해 만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