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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古宮博物館

國立古宮博物館

고궁

(國立古宮博物館)

 

 

建國60周年을記念하여 2008년 5월 1일부터 12월31일까지 無料觀覽 國立古宮博物館이 새로운 모습으로 첫선을 보인지도 어느덧 두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開館 당시에는 1개 층만 우선 展示하여 朝鮮王室의 文化財를 가까이 接하고자 하는 國民들의 熱望에 報答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國立故宮博物館은 全館 開館을 目標로 2년 동안 誠實히 準備를 해왔습니다. 展示室 全體의 雰圍氣와 施設을 改編하고 더욱 水準 높은 王室 文化財들을 展示對象으로 選定하였습니다. 展示空間도 3개 층의 13개 展示室로 擴張되었으며 敎育, 休息, 偏意 空間도 새롭게 設備되었습니다.이러한 國立故宮博物館의 새로운 跳躍에 맞추어 더욱 規模가 커진 國立故宮博物館의 소식을 國內外에 널리 알리고 온 世上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往來하고 感想하며 時間과 空間의 制約 없이 自由롭고 便安하게 情報를 주고받을 수 있는 畵像空間을 새롭게 丹粧하여 여러분 앞에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國立故宮博物館에서 펼쳐지는 아름답고 品格 있는 展示室, 貴重한 王室文化財의 感想, 그리고 모든 뜻 깊고 興味로운 프로그램들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곳을 찾은 모든 분들께 우리의 王室 文化遺産이 더욱 愛情과 觀心으로 다가서기를 眞心으로 祈願합니다.

 

 

순정황후어차

(純貞皇后御車)

 

純宗의 皇后인 순정효 황후(純貞孝皇后) (登錄文化財 제319호)가 탔던 것으로, 英國 다임러DAIMLER사가 製作한 리무진이다. 7인승, 20마력,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으로 추정된다. 純貞皇后御車는 純宗御車보다 크기가 작으나 自動車의 形態나 粧飾이 純宗御車에 비해 더욱 유려하다. 내부는 皇室紋章인 오얏꽃을 수놓은 黃金色 비단으로 꾸며져 있으며 車體는 木材, 外部塗裝은 칠漆로 되어 있다. 運轉席 뒷편 의자를 접어 空間을 活用할 수 있는 것은 純宗御車와 같다. 全世界的으로 3대만 남아 있고 國內에 現存하는 古의 自動車로 純宗御車와 함께 世界 자동차 발달사는 물론 우리나라 自動車의 歷史 및 皇室의 生活相 등을 硏究하는 데 重要한 歷史的 資料이다.

 

고궁박물관입구

(古宮博物館入口)

 

고종

(高宗)

 

朝鮮 제26대 王(1863~1907 재위).資本主義 列强이 侵入하는 중에 在位했다. 1897년 國號를 大韓帝國으로 바꾼 뒤 皇帝라 칭했고, 光武改革을 實施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萬國平和會議에 密使를 派遣해 日本의 朝鮮 侵略에 대한 不當性을 世界에 呼訴하고자 했으나, 이 事件으로 廢位되었다. 1919년에 죽었는데 그의 毒殺說은 3·1運動의 한 계기가 되었다.

 

순종및영친왕의책봉시금보

(純宗,英親王冊封時金寶)

 

朝鮮時代 國家와 王權을 象徵하고 帝王의 權威와 王室의 威嚴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印章을 어보(御寶)라고 한다. 이 御寶는 王位를 물려 주거나[傳國], 外交文書, 行政, 書跡 반사(頒賜), 책봉(冊封)·존숭(尊崇)·추숭(追崇)의 儀禮 등에 使用하였다.

 

경운궁

(慶運宮懸板)


現在 德壽宮의 옛 이름인 慶運宮의 懸板으로, 이곳에서 大韓帝國이 皇帝國임을 宣布하고 國家 發展을 위한 일련의 勞力을 했다. 글씨는 高宗皇帝의 御筆이다. 高宗은 1895년(고종 32)에 乙未事變으로 인해 身邊의 安全을 위해 러시아 公使館으로 居處를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世界 列强들 사이에서 보다 自主的인 立志를 確保하려는 計劃을 圖謀하면서 慶運宮(德壽宮)을 大大的으로 重建하여 皇帝國의 터전을 마련한 후 1897년 2월에 慶運宮으로 還宮하였다. 高宗은 慶運宮에서 주로 生活하였으며 1970년 退位 後에도 이 宮闕에서 머무르다 生을 磨勘하였다

 

규장각

(奎章閣懸板)

 

내각(內閣)이라고도 한다. 정조(正祖)가 卽位한 直後인 1776년 3월 11일에 設置되었다. 大闕 안인 昌慶宮 금원(禁苑)에 設置하여 歷代 國王의 詩文·서화(書畵)·유교(遺敎)·고명(顧命)·선보(璿譜:王世譜)·보감(寶鑑) 등을 保管·管理했다. 奎章閣은 송(宋)의 용도각(龍圖閣)·천장각(天章閣)을 모방한 것으로서, 1463년(세조 9) 양성지(梁誠之)의 建議가 있었으나 設置되지는 못했다. 1694년(숙종 20)에 御題·御筆을 保管하는 소각(小閣)을 종부시(宗簿寺)의 속각(屬閣)으로 設置하여 처음으로 奎章閣이라고 이름했고, 肅宗의 親筆로 편액(扁額)을 내걸었으나 곧 廢址되었다.

 

임금가마

(輦)


朝鮮時代 王이 탔던 가마이다. 지붕, 몸체, 가마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네 모서리에 龍을 그린 둥근 기둥을 세우고 둥근 기둥 사이에 각기둥을 세운 후 아랫부분에만 난간을 돌렸다. 몸체에 주칠을 한 후 난간 부분에 金色으로 백택(白澤), 기린(麒麟) 등 다양한 상상의 動物들을 그려 넣었다. 네 면에 주렴을 드리우고 다시 徽章을 내려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지붕 네 모서리 鳳凰 粧飾에 고리를 달아 유소(流蘇)를 고정시켜 내려뜨렸으며 가마채의 끝 부분에는 도금한 龍머리 粧飾을 끼워 磨勘하였다.

 

자격루

(自擊漏)

 

朝鮮 時代 王의 重要한 任務 가운데 하나는 百姓들에게 正確한 時角을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王은 百姓들의 日常生活 리듬을 規制하고 統制함으로써 社會生活의 秩序를 維持하고자 하였으므로 時計는 權威와 秩序의 象徵이었고 統治의 手段이었습니다. 自擊漏室에서는 朝鮮의 科學水準을 가늠해볼 수 있는 물시계, 自擊漏(復原)을 通해 본 朝鮮時計의 歷史를 볼 수 있습니다.

 

마폐

(馬牌)

 

발마패(發馬牌)라고도 불렀다. 高麗·朝鮮 時代 역제를 運營하면서 役馬를 使用할 수 있는 경우와 말 수도 規程했다. 役馬를 지급하는 경우는 工務를 遂行하는 官員, 戰死者 運送, 供物受納, 報告書 郵送 등이다.

  

일월오봉도

(日月五峰圖)

 

景福宮 勤政殿과 昌德宮 仁政殿 등 각 宮闕의 正殿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 뒤에 반드시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屛風이 세워져 있다. 또한 宮中에서 열린 大規模 잔치 場面을 그린 진찬도進饌圖와 같은 宮中 行事 記錄畵에서도 室內와 室外를 區別하지 않고 어느 곳이든 王의 자리 뒤에는 日月五峰圖 屛風이 設置되어 있는 것을 確認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王의 肖像畵인 어진御眞 製作과 關聯된 의궤儀軌의 記錄들을 보면, 御眞을 奉安하는 곳에도 반드시 日月五峰圖 屛風을 設置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생시生時나 사후死後의 區別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王이 임하는 곳에는 日月五峰圖가 놓여졌음을 알 수 있다. 日月五峰圖는 곧 王의 象徵이었던 것이다

 

어좌

(御座)

 

宮闕의 便殿과 正殿의 中央에 위치한 御座는 王이 앉아 百官의 賀禮를 받고 朝會를 行하며 執務를 하는 座席으로 옥좌玉座 또는 보좌寶座라고 한다. 太祖 御眞에 그려진 御座의 形態와 文樣이 이것과 거의 同一하여 이러한 形態의 御座가 朝鮮 初期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御座 뒤에는 日月五峰圖 屛風을 놓아 神性과 威嚴을 갖추었다.

 

청동용

(靑銅龍)

 

1997년 11월 景福宮 慶會樓 연못 浚渫作業 도중에 出土된 遺物이다. 경회루慶會樓 나라에 慶事가 있거나 外國의 使臣이 訪問했을 때 임금과 臣下들이 宴會를 열기 위해 使用하던 場所이다. 1592년 壬辰倭亂 때 火災로 불탄 것을 1867년(高宗 4)에 再建하였다. 慶會樓의 建築原理를 說名하고 있는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의하면 慶會樓는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周易의 原理에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연못에 火災를 防止하기 위해 구리로 만든 龍 두 마리를 넣었다고 한다. 이 龍은 그 중 하나로 慶會樓 북쪽 하향정荷香亭 앞 연못 바닥에서 發見되었다. 

 

어좌용무늬천장장식

(雙龍刻寶蓋)

 

보개寶蓋는 宮闕 正殿이나 便殿 등 王이 머무르는 建物 天井에 設置되었던 莊嚴 裝飾物이다. 朝鮮時代의 正殿은 景福宮 勤政殿·昌德宮 仁政殿·昌慶宮 明政殿·德壽宮 中和殿·慶熙宮 崇政殿이 해당한다. 龍이나 鳳凰은 王을 象徵하는 代表的인 想像의 動物로 雄壯하고 華櫚한 彫刻으로 王의 空簡을 粧飾함으로써 王의 神性과 威嚴을 强調하였다. 이 寶蓋는 原來 宮闕의 어느 前脚에 設置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建物이 헐리면서 解體되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동물조각상

(木造瑞獸像)

 

昌德宮에 保管되어 있던 것으로 宮闕 계단의 난간 역할을 한 動物相으로 推測된다. 돌계단을 만들 때 階段의 면에 해태나 龍 등을 彫刻하여 경사지게 올려놓는 돌을 소맷돌이라고 하는데 생김새로 보아 이와 같은 役割을 했던 部材로 推定된다. 一般的으로 建物 外部에 設置되기 때門에 돌로 만들에 지는 것이 大部分인데 이 海苔象은 나무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才質이나 表面에 丹靑 痕跡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室內 階段에 設置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저울

(朝鮮時代저울)

 

現在法院의象徵으로되어있죠 公平正大하게 判決하라고

 

앙부일구

(仰釜日晷)

 

仰釜日晷 寶物 제845호 는 世宗 16년(1434)에 蔣英實,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時計 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世宗 16년 10월의 記錄을 보면 처음으로 앙부일구仰釜日晷를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 설치하여 일영日影을 觀測하였다고 한다.

 

해시계

(平形)

 

이 해시계는 해 그림자를 통해 하루 중의 時角뿐만 아니라 太陽高度, 北極高度, 各 季節의 밤낮 길이 등 13가지 天門現狀을 觀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은입사귀면문철퇴

(銀入絲鬼面文鐵鎚)

 

 이 철퇴 (보물 제1444호) 는 19세기 경 儀裝用으로 製作된 것으로 쇠로 만들어졌으며 외면을 쪼이질하여 上下로 화문을 은으로 입사하였다. 퇴부는 연봉(蓮峯) 상태인데 좌우에 도깨비 文樣을 은으로 입사하였다. 그 퇴 위에는 뇌문(雷文)과 연봉 하단에는 화판문(花瓣文)이 시문되어 있다. 이러한 쪼음입사는 주로 鐵製品에 利用되었으며 朝鮮 中·後期에 登場하여 입사기법의 主流를 이루며 귀면문은 각종 災殃과 疾病 그리고 邪惡한 모든 것들을 막아내는 超自然的인 存在를 象徵的으로 圖案한 것으로 天災地變과 各種 災殃을 물리치고자 한 데서 이러한 의장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철퇴는 감입한 은사의 保存上態가 良好하고 입사무늬 역시 比較的 精巧하여 製作技術이 優數하며, 現在 同一한 遺物이 없어 稀貴性 또한 認定되어 指定 가치가 있다.

 

영친왕곤룡포

(英親王袞龍袍)

 

袞龍袍는 王의 始務服으로 1444년(世宗 26)부터 朝鮮 末期까지 平常時에 執務할 때 着用하였다. 겉은 대홍색이고 안은 男色으로 넣었으며 여름에는 운보문사(雲寶紋紗), 겨울에는 단(緞)으로 만든다. 깃은 곡령(曲領)으로 하여 오른쪽 어깨에서 단추를 끼워 고정시켰고 속깃은 진옥색 명주로 하였다. 袞龍袍를 입을 때에는 옥대를 차고 翼善冠을 썼으며 흑색 녹피화(鹿皮靴)를 신었다. 가슴·등·양 어깨에는 발톱이 다섯인 오조룡을 금실로 수놓은 보(補)를 붙였다.

 

영친왕비대홍원삼

(英親王妃大紅圓衫)

 

圓衫은 王室에서 皇后·王妃·王世子賓 등이 着用한 禮服이다. 地位에 따라 色을 달리하여 皇后는 황원삼, 왕비는 홍원삼, 王世子賓은 자적원삼, 公主와 翁主는 녹원삼을 着用하였다. 대홍원삼은 홍색비단에 구름과 鳳凰무늬를 華櫚하게 금실로 織造하였고, 앞뒤와 어깨에는 용무늬 보를 附着하였다. 大禮服에는 발톱이 다섯인 오조룡을 금실로 수놓은 보를 양 어깨와 앞뒤에 덧붙이고, 小禮服에는 두 마리 鳳凰무늬 보를 앞뒤에 더하여 粧飾하였다.

 

王妃의粧飾用 머리꼿이.비녀

 

이성계

(李成桂)

 

朝鮮의 제1대 왕(1392~1398 在位 卓越한 武將으로 高麗末 紅巾賊과 倭寇의 侵入을 擊退하는 데 크게 活躍했으며, 改革派 士類와 함께 高麗 王朝를 무너뜨리고 朝鮮을 建國했다. 本官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성계(李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和寧:永興) 출신이다. 아버지는 자춘(子春)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와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벼루

(荷葉硯)

 

平安北道 鴨綠江邊에 위치한 위원(渭原) 지방에서 나는 징니석(澄泥石)으로 만든 벼루이다. 벼루의 形態는 中國 宋나라에서 많이 나타나고 朝鮮時代에 流行했던 하엽(荷葉)형태이다. 벼루의 앞면 왼쪽 모서리에 드러난 연잎의 뒷면에는 잎맥과 줄기를 表現하였으며 연잎의 앞면이 되는 넓은 부분에 두 마리의 작은 메기와 모란꽃을 적절하게 配置하였다. 木製 뚜껑을 갖추고 있는데 뚜껑 윗면에는 다섯 마리의 雲龍文을 자개로 粧飾하였다. 王室에서 使用한 벼루의 品位가 잘 나타나고 있다. 

 

편경

(編磬)

 

編磬은 打樂器로 돌로 만들어졌다. 高麗 1116년(예종 11)에 編鐘과 함께 들어왔는데, 등가(登歌)에 정성(正聲)과 중성(中聲)의 編磬 각 한 틀, 헌가(軒架)에 정성과 중성의 편경 각 아홉 틀씩 들여왔다. 恭愍王 때와 朝鮮祖 太宗 때에도 明나라에서 들여와 宮中 祭禮樂에 使用하였다. 초기에는 材料를 中國에서 輸入해서 만들었으나 1425년(世宗 7)부터는 京畿道 남양(南陽)에서 질 좋은 材料를 얻어 國內에서 制作하였다.

 

편종

(編鍾)

 

朝鮮의 宮中音樂은 儒敎의 예악禮樂사상에 基礎하여 끊임없이 整備되고 變化하였다. 儒敎에서 예禮는 自然의 이치를 절차로 만들어 스스로 體得하게 하는 것이고 악樂은 마음의 성정性情을 자연과 和合시키는 것으로 藝와 樂의 造花를 통해 自然의 이치를 實現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때 악樂은 音樂과 노래와 舞踊을 모두 包含하는 악가무樂歌舞의 公演藝術을 意味한다. 이러한 音樂은 사람을 感動시키고 風俗을 變化시켜 바르게 함으로써 百姓들에게 倫理와 道德意識을 북돋우는 데 活用되었다.

 

방 향

(方響)

 

철향이라기도하고 16개의 철편을 틀의 상단과 하단에 각각 8개씩 메어놓고 뿔망치로 쳐서 소리를 낸다. 철편의 크기는같고 두게가 다른데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낮다. 中國 양나라때 만들어졌다고  하며 당,송,원 에서는 주로 연향학에 쓰이다가 명,청 시대에는 아악에 쓰였다고는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종때 당악을 연주한 이래 당악과 고취에 편성되어 쓰였다. 음역이 너무높고 음색이 고르지못하고 탁하여 현재에는 거의 쓰지않고 있으며 宗廟제래악에 쓰이고 있다. 

 

엎드린 호랑이의 模樣으로 나무를 깍아 그 등에 27개의 톱니를 세운것이다. 演奏할때는 9조각으로 갈라진 대나무 채로 먼저 호랑이 머리를 세 번치고 이어 톱니를 3번 글어내린다. 한국에서는 高麗 1116년 (예종11년) 中國宋나라에서 들어온  後 文廟 및  宗廟제래악에서 끝남을  알리는 信號 樂器로 使用하였다.흰색을 칠해서  西쪽에 配置하여 音樂의 始作을 알리는 軸을 푸른색으로 칠하여 東쪽에 놓는것과 짝을 이루었다.

 

(祝)

 

中國 古代皇帝時代에 만들었다고 傳하며 우리나라에는 高麗 예종 11년 (1116년)宋나라로부터 들어왔다. 아악과 전성헌가(殿성軒架)에 쓰였으며 등가에 쓰일때는 따로 공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축은 音樂의 始作을 알리는 樂器로 푸른색을 칠하여 東쪽에 놓고 音樂이 끝남을 알리는 어(어)는 흰색을 칠하여 西쪽에 놓는다. "ㅗ"" 모양의 막대기로 밑바닥과 左右 順序로 세 번쳤으나 오늘날에는 밑바닥만 세번친다.축은 어와 함께 宗廟 제레악 에 사용된다.

 

절 고

(節鼓)

 

절고는 音樂마디마다 북을 쳐서 音樂의 구절을 짓게하는 북이다. 기원에 대해서는 中國 수(隋)나라에서 쓰던 것이 조선 세종(世宗)때 들어온 것이라는說과 朝鮮中期에 韓國에서 製作하였다는 두가지 說이 있다. 현제 文廟와 宗廟祭禮에에 쓰이며 音樂 演奏를 始作할때와 끝날때 세번친다. 또演奏의 中間에서는 文廟제레악에서는 1소절끝 박 에 2번씩치고 宗廟제레악에서는 대개악절의 첫박에 한번씩 친다.

 

태항아리및태지석

(胎壺&胎誌石)

 

태항아리는 태어난 아이의 태(胎)를 담아 놓은 항아리로 이 胎缸아리는 조선 12대 임금 仁宗(재위 1544~1545년)의 태항아리로서 朝鮮 전기 王室 白瓷 태항아리의 가장 發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豊滿하고 긴 몸체에 맑은 담청색(淡靑色)의 백자유(白磁釉)가 곱게 발라져 있으며 어깨에 끈을 묶기 위한 4개의 고리가 달려 있고, 뚜껑의 꼭지에도 역시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함께 묻힌 태지석(胎誌石)에는 1515년(중종 10)에 태어난 인종의 태가 세자가 된 후 1521년(중종 16) 安葬된 것으로 記錄되어 있다. 仁宗大王의 태항아리를 安葬한 태실(胎室)은 경북 영천군 청통면 은해사 뒤편 태실봉(胎室峯)에 있다.

 

명성황후금책

(明成皇后金冊)

 

성왕후를 皇后로 追尊하면서 金寶와 함께 올린 것이다. 從來의 玉으로 製作했던 것을 皇帝國에 合當하게 金으로 製作하였다. 明成皇后는 1895년 乙未事變의 만행응로 弑害되었으나, 1897년(光武 원년) 10월 皇后로 追尊되었고 다음달인 11월에 양주 천장산天藏山 아래 모셔 능호를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高宗이 승하하자 경기도 남양주시 現在의 位置로 移葬하였다.

 

백자대호

(白瓷大壺)

 

國寶 제310호 (기탁유물) 높이에 비하여 몸통이 둥글고 다소 커 보이지만 입 지름과 굽 지름의 비는 대체로 理想的이어서 全體的으로 安定感이 있다. 굽과 입의 높이도 적당하여 몸통이 둔하거나 무거워 쳐져 보이지 않는다. 完全한 左右對稱은 아니지만 약간 비틀어지고 變形된 상태가 全體의 造形에 障碍가 되지 않고 오히려 變化를 주면서 生動感을 갖게 한다. 胎土의 상태는 良好하며 保存上態도 매우 良好하다.

 

궁중에서사용하던제기

 

울창주鬱?酒와 현주玄酒, 명수明水 등 宗廟祭禮에 사용되는 제주祭酒를 담는 格이 높은 제기로 신실 밖 준소상에 진설한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계이鷄?와 조이鳥彛를, 가을과 겨울 祭祀에는 가이?彛와 황이黃彛를 사용한다. 계이는 닭을, 조이는 鳳凰을, 가이는 벼를, 황이는 황금 눈을 粧飾하였다 상준과 희준은 봄과 여름 제사에 술을 담기 위한 제기이다. 『예서』에 ‘희준犧尊은 주周나라의 준尊을 본뜬 것이다. 소는 큰 희생犧牲이고 기름이 香氣로우므로 봄의 形狀에 적당하고 큰 짐승이 남월南越에서 생산되니 이것이 선왕께서 희준과 상준을 봄과 여름제사에 사용했던 까닭이다.’ 라고 쓰여 있다. 朝鮮 初期에는 몸체에 술을 담았으나 후대에는 등 위에 원형의 잔을 얹어 使用하였다.

 

(所床)


宗廟祭禮를 지낼 때에는 宗廟 내실(神室) 앞에 格式에 맞추어 제상(祭床)을 차리고 그 앞쪽 건물 밖에 준소상을 차린다. 祭祀 때 올리는 飮食은 옛날식 儀禮에 따라 매우 嚴格하고 精誠스럽게 차려졌다. 곡식이나 고기 등은 익히지 않은 날 것을 그대로 올린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이 탑은 高麗時代의 高僧 智光國師(지광국사 984 ~ 1067)의 묘탑(妙塔)으로 원래 江原道 原州市 부론면 法泉寺터에 있던 것인대 1912년 日本인이 몰래 日本으로 가져갔다가 發覺되어 3년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景福宮에 세워지게 되었다. 탐의 받침대에 해당되는 기단부(基壇部)에는 여러단을 두어 꽃,상여,신선,장막등을 粧飾하고  탑 의몸체에도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粧飾을 하였으며, 지붕과 꼭대기도 불보살상(佛菩薩象),봉황,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로 粧飾되었다. 이 僧塔은 智光國師 의 장례(葬禮)때 사리(舍利)를 運搬하던 화려한 外國풍의 가마를 본떠 製作된것으로 推定되며 이러한 僧塔은 高麗時代에 들어 過去의 傳統에서 벗어나 새롭게 考案된 傑作으로 認定받고 있다, 지장국사는 고려전기(高麗前期)의 이름난 高僧으로 顯宗임금과 文宗임금으로부터 각별한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文宗임금은 智光國師를 王使로 삼았다가 훗날에는 國使로 任命하였다, 이 僧塔은 宣宗 2 년(1805년)경에 세워진것으로 推定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