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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加耶本性(劍과絃)

(國立中央博物館)

 

가야본성

(加耶本性)

 

弁韓의

  

(劍과絃)

 

1.3 世紀 韓半島 南海岸에는 여러 작은나라가 있었으며, 各 나라에는 여러명의 우두머리가 있었읍니다. 우두머리는 勢力의 크기에 따라 臣智,險側,樊濊,殺奚,邑借로 나뉘었읍니다. 伽倻 以前 弁韓 最高의 支配者인 臣智는 鐵을 바탕으로 交易을 하며 富를 蓄積한 사람들로 생각 됩니다. 그들은 이런 交易을 通해 中國과 日本 등지의 多樣한 奢侈品을 所有하고 있었읍니다. 金海 양동리 162호 무덤은 中國 韓나라 桓帝 와 靈帝때 中國의 混亂한 政治的 狀況으로 韓과 濊가 强性했다는 歷史的 記錄과 符合하여 거대한 덧널무덤을 韓半島 南部에서 처음으로 만든 事例 입니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高麗 忠烈王 때의 僧侶 一䔳 (1206 ~ 1289)이  正史에는 없는 內容을 年代順으로 모아서 엮은 歷史書 입니다.  이 冊에 실린 駕洛國記 에는 駕洛의 建國에 간한 이야기가 收錄 되어 있읍니다. 伽倻 하면 首露를 떠올림니다. 首露가 伽倻를 세운 課程은 神話로 남아 있읍니다. 42년 3월 首露는 나라 이름도 없고 身分秩序도 뚜렸하지 않았던 어느 南海岸의 바닷가에서 나라를 세우고 아유타국의 公主 許黃玉과 婚姻을 합니다. 비록 神話지만 伽倻의 始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武力)

 

伽倻는 이 없었나요?  武士

 

42年부터 562年 까지, 520年間 伽倻가 存續할수 있었던 것은 힘을 가졌기 때문 입니다. 伽倻의 힘은 文化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鐵에 있읍니다. 당시 鐵은 最高의 첨잔素材로서 鐵을 다루는 技術은 곧 나라의 國力과도 直結 되었읍니다. 將軍들은 鐵로 만든 갑옷과 칼을 使用했고 말도 鐵로만든 갑옷과 投球를 썼읍니다. 4 世紀 伽倻는 새와 고사리무늬 등을 粧飾한 종장판 갑옷이라는 獨創的인 갑옷을 만들어 使用 했읍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三國時代의 갑옷 大部分은 伽倻에서 만든것 입니다.

 

파사석탑

(婆娑石塔)

 

48년 7월 許黃玉은 머나먼 바다를건너 金海에 到着 합니다. 三國遺事는 許黃玉이 무서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왔다고 傳 합니다. 이 塔은 元來 바다를 航海할때 均衡을 잡기위해 배의 바닥에 실었던 것으로 推定해 볼수 있읍니다. 科學的 分析結果 婆娑石은 붉은 빛이 도는 기이한 特徵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찿기 힘든 암질 인것을 밝혔읍니다. 全體的으로 變形이 深海 元來의 模樣은 알수 없지만 거친바다를 건너 伽倻에 오게된 說話를 傳 하고 있읍니다.

 

머리뼈

(頭骨)

 

駕洛國의 金海 예안리 古墳群에서서는 北方系와 南方系 사람의 特徵 편頭를 가진 人骨등이 發見되어 여러地域에서 온 사람들이 共存하며 살았음을 알수 있읍니다.

 

이동식부뚜막

 

부뚜막은 北方 地域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伽倻로 傳 해졌읍니다. 紀元後 1 世紀 日本 北部 九州에도 부뚜막에 登場하고 5 世紀 즈음에는 나라와 おおさか(오사카)등 기내 地域에서도 確認 됩니다.

 

伽倻  百濟

 

4 世紀  무렵 百濟와 高句麗 같은 强大國의 出現은 伽倻에게 큰 威脅이 되었읍니다. 百濟는 伽倻를 적절히 支援하여 新羅의 膨脹을 抑制 하기도 하고, 여러伽倻 중 어느 한나라가 커지는것도 警界 하였읍니다. 4  世紀  후엽 百濟는 强性한 駕洛國보다는 駕洛國과 다라국을 돕기도 합니다. . 고령 지산동 73호 무덤에서는 百濟에서 만든 鳳凰무늬 로 粧飾된 큰칼이 나왔고, 합천 옥전 23호 무덤에서는 金銅冠帽와 귀걸이가 出土 되었읍니다. . 이 밖에도 아라국과 고자국등 여러 伽倻의 支配者가 所有한 큰칼과 靑銅그릇등은 제각기 百濟와 政治的 關係를 맺었음을 말해 줍니다. 

 

금동모관

(金銅帽冠)

 

伽倻  

 

伽倻와 新羅는 基本的으로는 敵對關係였지만, 늘 그랬던것은 아니었읍니다. 新羅는 伽倻를 包攝 하거나 懷柔 하기도 하고 必要에 따라서는 同盟을 맺기도 하였읍니다. 가령 합천 옥전 M1호 무덤에서 나온 다라국의 支配者가 가진 유리잔은 新羅의 政治的 要請을 받아들인 代價였을 것입니다.  6 세기 고령 지산동 45호 무덤의 主人公이 가진 큰칼은 가라국과 新羅 王室 사이에 이루어진 政治的 關係를 보여 줍니다. 한편 고성 송학동 고분군에서 나온 新羅土器는 고자국의 支配者가 死亡 했을때 政治的 協力關係를 이끌어내기 위해 新羅의 弔問 使節團이 들고온 것으로 여겨 집니다.

 

伽倻

 

日本書記는 伽倻의 支配者를 王 과 한기 라는 두가지 이름으로 表現 하였읍니다. 王이라는 稱號는 가라국과 아라국의 支配者에게 使用 하였는데,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함한 말이산 고분군의 規模와 出土品으로도 그 威勢를 짐작 할수 있읍니다. 이중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은 가라국 王의 面貌를 잘 보여줍니다.  32개의 殉葬덧널에 함께 묻힌 사람은 護衛武士와 馬夫등 王을 輔弼하는 專門 집단 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런 伽倻의 成長으로 말미암아 蟾津江 流域의 여수와 남원 등지의 勢力들도 共存하려는 伽倻의 旗幟 아래 함께 하였읍니다.

 

항아리

大王을 새긴 긴목 항아리

 

왕의말을부린사람

 

바닥이 扁平하고 둥근 손잡이가 붙은 뚜껑을 덮은단지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요?  꿀 단지는 아니었을까요?  머리말에 따로 空間을만들어 所重하게 두었읍니다. 여기에는 말을 탈때 쓰는 발걸이와 재갈도 함께 있읍니다. 말을 부려서 王을 모셔야 하니까요.

 

금관과 금제장식

(金冠,金製裝飾)

 

가라국의 冠은 6 세기 즈음에 이르러 관테에 풀과 꽃 모양의 세움 裝飾을 세우는 것으로 形態를 갖추어 갑니다.

 

금관과 금제장식

(金冠,金製裝飾)

 

가락바퀴를간직한 남자

 

6 호방에는 귀걸이를 한 20 ~ 30대의 健壯한 男性 두명이 있읍니다. 한 사람은 금귀걸이를, 다른 사람은 金銅귀걸이를 하고 있읍니다. 둘의 身分은 조금 달랐나 봅니다. 金귀걸이를 한 男者는 王의 옷을 짓고 관리하던 코디네이터였는지 머리 쪽에 실을 잣는 가락바퀴가 놓여있습니다.

 

보국장군본국왕

(輔國將軍 本國王)

 

가라국은 三韓의 한 種族이다. 建元 元年(479년)國王 荷知가 使臣을 보내와 方物을 바쳤다. 이에 調書를 내리기를 널리 헤아려 비로소(조정에)올라오니 멀리있는 이 가두루덕에 感化됨이라. 가라王 하지는 먼 東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官門을 두드렸으니 輔國將軍 本國王의 벼슬을 제수함이 合黨 하도다라 하였다.

 

말탄무사모양뿔잔

(騎馬人物形角杯)

 

왜계토기(야요이계)

(倭系圡器)

 

南海岸 곳곳에서는 日本 야요미 土器가 자주 出土되곤 합니다. 金海 구산동 遺跡에서는 야요미 土器가 全體土器중 무려 80 % 정도 차지 합니다. 이러한 狀況으로 미루어 볼때 日本 北部 규슈의 倭人들이 南海岸 地域에 자주 往來 하였으며 심지어는 마을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수 있읍니다.

 

 

3 ~ 4 世紀 이르러 變換으 伽倻로 成長 합니다. 伽倻는 强力한 國家가 登場하는 國際環境 속에서 三國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發展해 나갔습니다. 伽倻의 支配者는 많은 祭祀飮食을 담은 土器를 발치에 늘어놓고 武力을 意味하는 갑옷과 武器를 多量으로 副葬하였읍니다. 이와 함께 死後世界에서 함께할 侍從을 殉葬했읍니다. 金海 대성동 29호 무덤은 名實相符한 伽倻 最高 支配者의 무덤 입니다. 이 무덤에서는 회청색의 도질土器,殉葬,달개가 달린 金銅冠,오르도스형 靑銅솥 등의 韓半道 南部에서 最初로 確認되고 있읍니다.

 

 

亡國의 설움으로 故鄕땅을 떠났어도

그들의 文化는 지키며

新羅人들의 무덤사이에

自身들의 무덤을 옹기종기 모아

加羅國의 土器를 만들어

죽어서도 나라를 잊지 않았네

 

 

526년 싸움에 져서 伽倻는 新羅에 倂合 되었지만

伽倻琴은 新羅 千年의 樂器가 되었고

오늘의 旋律(선율)이 되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