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
(烏竹軒)
寶物 제165호. 이 建物은 1452년(文宗 2)에 登第하여 大司憲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古宅에 딸린 別堂으로, 1536년(中宗 31) 李珥가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平面構造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일(一)자집이며 大靑·온돌방·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李珥가 태어난 房은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커다란 長臺石으로 쌓은 斷層 기단 위에 막돌礎石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結構했으며,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으로 處理한 이익공(二翼工)집이다. 앞면에는 띠살窓戶를, 옆면에는 骨板門을 달았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이 建物은 韓國住宅史에서 現存하는 유구(遺構)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重要하다. 그러나 房과 大靑으로만 構成된 別堂만 남아 있고, 본채가 없어 朝鮮 初期의 住宅構造를 알 수 없는 것이 有感이다.
오죽헌
(烏竹軒)
申師任堂(1504∼1551)과 栗谷 李珥(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師任堂 申氏는 뛰어난 女流 藝術家였고 賢母良妻의 본보기가 되는 人物이며, 申씨의 아들 栗谷 李珥는 朝鮮時代 退溪 李滉과 雙璧을 이루는 훌륭한 學者였다. 烏竹軒은 朝鮮時代 文臣이었던 崔致雲 1390∼1440)이 지었다. 規模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模樣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大靑마루로 使用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模樣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形態로 짜은 翼工계 樣式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住宅 建築物 중에서 比較的 오래된 建物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歷史를 가진 建物이다.
非禮勿視
예가아니면 보지도말고
非禮勿聽
예가아니면 듣지도말고
非禮勿言
예가아니면 말 하지도 말고
非禮勿動
예가아니면 행동하지 말아야 할것이니
四者修身之要也
이 네 가지는 몸을닦는 요점이다.
몽룡실
(夢龍室)
1536년 12월 26일 申師任堂이 龍이 문저리에 서려있는 꿈을꾸고 栗谷 을 낳은것이다. 夢龍室 이라 부르고 있는 이 房에는 申師任堂의 影幀이 모셔져 있다.
배롱나무
江陵의 시화 (市花)로 꽃피는 期間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百日紅 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古死한 원 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 申師任堂과 栗谷 母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栗谷松 栗谷梅와 함께 오늘날 烏竹軒을 지켜주는 守護木으로서의 役割을 해오고 있다.
율곡송
(栗谷松)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할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
안채
안채 朝鮮初期에 지어진 烏竹軒 내의 建物들은 1505년 兵曹參判을 지낸 崔應賢에 傳承되어 오다가 烏竹軒 淨化事業으로 烏竹軒 (別堂)과 받깥채를 除外하고 모두撤去되었다. 現在의 모습은 1996년 政府의 文化財 復原計劃에 따라 옛 모습대로 復原한 것이다. 안채는 안主人이 生活하던곳이고 바깥채는 바깥 주인이 居處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뒷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柱聯은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바깥채
안채朝鮮初期에 지어진 烏竹軒 내의 建物들은 1505년 兵曹參判을 지낸 崔應賢에 傳承되어 오다가 烏竹軒 淨化事業으로 烏竹軒 (別堂)과 받깥채를 除外하고 모두撤去되었다. 現在의 모습은 1996년 政府의 文化財 復原計劃에 따라 옛모습대로 復原한 것이다. 안채는 안主人이 生活하던곳이고 바깥채는 바깥主人이 거쳐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뒷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柱聯은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신사임당
(申師任堂)
申師任堂은 江原道 江陵 胎生으로 그의 生家 烏竹軒은 지금도 保存되고 있다. 本名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龍仁 李氏 집안의 선비인 李思溫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號를 지었는데, 周나라의 기틀을 닦은 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傳한다.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號도 가졌다고 한다. 1522년 德修 李氏의 이원수(李元秀)와 結婚하여 江陵에서 서울로 移徙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栗谷 李珥는 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畵家로서 7살 때 世宗 時代의 畵家 安堅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肅宗, 宋時烈 등 여러 知識人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跋文을 쓸 程度였다. 書藝家이자 詩人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다. 別世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다. 詩·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士大夫 婦女에게 要求되는 德行과 才能을 兼備한 賢母良妻로 稱頌된다. 本官은 平山.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어머니는 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李珥는 〈行狀記〉를 지어 師任堂의 藝術的 才能, 優雅한 天稟, 純孝한 性品 등을 記錄했다. 師任堂은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本받는다는 뜻의 堂號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江陵 外家에서 자랐으며, 19세에 德修李氏 원수(元秀)와 婚姻했다.
見得思義
利得을 보거든 옳은 일인가를 生覺하라?
율곡 이이
(栗谷李珥)
栗谷李珥(1536∼1584) 先生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學文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合格하고 명종(明宗) 19년(1564)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後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 登科 이조(吏曹)·형조(刑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歷任하였다. 조선(朝鮮) 유학계(儒學界) 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先生과 雙璧을 이루는 대학자(大學者)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形成했고 붕당(朋黨)의 조정(調停), 10만(十萬) 군대(軍隊)의 양병(養兵)을 主張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 사창(社倉)의 實施에 勞力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孝誠이 至極하였다.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20여개 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烏竹軒은 江陵 유현(儒賢)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창건(創建)으로 아들 응현(應賢)은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주고 李思溫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申命和)(師任堂의 父親)에게,申命和는 그의 사위 권화(權和)에게 물려 주면서 그 후손(後孫)들이 管理하여 오던 중 1975년 烏竹軒 정화사업(淨化事業)으로 문성사(文成祠), 記念館 등이 建立되어 現在와 같은 面貌를 갖추고 先生의 偉業과 敎訓을 길이 추앙(追仰)하게 된 것이다.
문성사
(文成祠)
栗谷 李珥의 影幀을 모신 祠堂이다. 이 자리에는 御製閣이 있었는데 1975년 烏竹軒 淨化事業때 西쪽으로 옮기고 文成祠를 지었다. 文成은 1624년 仁祖임금이 栗谷에게 내린 詩號로 道德과 學文을 널리들어 막힘이 없이 通했으며 百姓의 安定된 삶을 위하여 政事의 根本을 세웠다.는 意味를 담고 있다. 文成祠의 懸板은 朴正熙 大統領이 썼다.
어제각
(御製閣)
栗谷의 李珥 著書 [격몽요결 (擊蒙要訣)]과 어린時節 使用하였던 벼루를 保管하기 위하여 지은것이다. 1788년 正祖임금은 栗谷이 어렸을때 쓰던 벼루와 親筆로 쓴 (擊蒙要訣)이 烏竹軒에 保管되었다는 事實을 듣고 그것을 宮闕로 가지고 오게하여 親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栗谷의 偉大함을 讚揚한 글을 새기고 冊 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保管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命을받은 江原道觀察使 金載瓚이 이를 保管할수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御製閣이다.
진또배기
江陵의 진또배기는 나무로 오리세마리를 깍아 솟대위에 올려 마을의 길목에 새우고 人間과 神, 하늘과 땅을 連結하는 一種의 우주목(宇宙木)으로 숭배(崇拜)해 왔다 오랜歲月을 通하여 같은 地域에서 共同生活을 해온 바닷마을 사람들은 진또배기가 그들의 生活을 威脅하는 水災,火災,風災(水災,火災,風災)를 막아주고 마을의 安寧과 풍농,풍어(豊農,豊漁)를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다.
벼루
栗谷 李珥 先生이 어렸을때 使用하던 벼루
격몽요결
(擊蒙要訣)
1788년 正租임금은 栗谷先生이 쓴 (擊蒙要訣)과 어렸을때 使用하던 벼루를 直接보고 擊蒙要訣 序文과 벼루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며 別途의 집을 지어 保管하도록 하였읍니다. 御命으로 지었다고 해서 御製閣이라고 부르며 벼루뒷면의 內容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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