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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宗敎施設 (寺)

古靈山普光寺


(古靈山普光寺)

  

 

涅槃이라는 말은 完全幸福을 말하고
解脫이라는 말은 完全自由를 말합니다.

 

 

普光寺는 坡州市 廣灘面 영장리 13번지 古靈山에 자리한 大韓佛敎曹溪宗 第 25敎區 本寺 奉先寺의 末寺이다. 寺의 創建및 大體的인 沿革에 대해서는 이 절의 梵鐘閣에에 있는  梵鍾의 名文을 通해 어느 程度 살필수 있다. 이 梵鐘은 朝鮮時代인 1634年  (仁祖 12年)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名問은 절의 歷史에 관한 가장 오래된 記錄이기도 하다. 그것에 의하면 절은 新羅時代인 894年  (眞成王 8年) 王命에 따라 道詵國士가 裨補寺刹의 하나로 創建되었다고 한다.

 

 

 

해탈문

(解脫門)

 

解脫門은 寺刹로 들어가는 첫 번째 關門이다. 元來 지붕을 가진 一般的인 建築物이라고 하면 四方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下重을 支撑해야 하는 것이 常識이다. 하지만 解脫門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支撑하며 서 있는 建築物이다 普光寺는 大雄寶殿을 비롯해서 觀音殿.地藏殿.山神閣.應眞殿.萬歲樓.鐘閣.등의 殿閣이 比較的 넓지 않은 境內에 奧密稠密하게 配置되어있다. 이 가운데 大雄寶殿과 萬歲樓는 비록 後代에와서 部分的 保守가 있기는 했지만 18세기 무렵 절이 淑嬪崔氏의 原刹이 되었을때 重建또는 創建된 比較的 오래된것이고 나머지 殿閣은 最近에 지은 建物이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八角지붕에 正面3칸 側面 3칸의 比較的 큰 規模로서 京機道 有形文化財 第 83 號로 指定되어있다. 大雄寶殿은 創建 당시부터 있었던 建物이지만 지금의 殿閣은 1740년 (英祖 16年) 거의 새롭게 重建된것으로 推定된다. 建築 樣式은  다포계의 八角지붕에 겹처마 이며 正面 3칸 側面 3칸으로 構成되어있다. 石燈이 있는 앞마당보다 몇단계 높게 샇은 石築基壇 위에 西向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普光寺 境內에서 가장 中心的인 位置로서 萬歲樓와 마주하고 있다. 기둥에는 배훌림이 뚜렸하게 나타나 있고 그 밑에 주춧돌은 다듬지 않은  自然石을 그대로 利用하고 기둥 밑부분 역시 주춧돌의 윗면의 狀態에 맞추어 깍아 세운 것이 特徵이다. 또벽은 흙벽이 아닌 나무벽으로 여기에 색다른 方法과 素材로 그려진 壁畵가있다. 大雄寶殿의 글씨는 英祖의 親筆로 알려져 있다.

 

 

지장전

(地藏殿)

 

맞배지붕에 正面3칸 側面 2칸 建物로서 1994년 에 지어졌다. 안에는 地藏寶薩像을 비롯해서 無毒鬼王,道明尊者,十王像 10 체,判官,錄事,人王像 2 체,童子像 2 체동 등의 여러 종상과 地藏幀畵,地王圖 4폭,將軍幀畵 2폭 등의 佛畵들이 있다. 將軍幀畵는 그림 아래 있는 화기에 의해 1872년 (高宗9)에 그린것을 알수 있다. 나머지 聖寶文化財들은 雙溪殿에 奉安되어있으며 1863년 造成되었다.

 

 

석가여래좌상

(釋伽旅來左像)

 

釋伽旅來左像 을 中心으로  전부 5위의 佛寶薩像이 있는데 이 佛像들은 1215년 奉安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佛畵는 靈山會相後佛幀畵.七星幀畵.三藏幀畵.甘露幀畵.獨聖幀畵.現王幀畵.神衆幀畵.가 있으며 神衆幀畵를 제외한 나머지 全部 1898년 (光武2년)에 奉安된것으로 神宗幀畵는 1915년에 그려졌다.  天井에는 佛寶薩이 登場하지는 않지만 佛敎와 關係되는 內用이 表現한 그림이 天井가득히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東洋畵 技法으로 그린 花鳥畵 와 草蟲圖 도있다. 이 같은 天井畵는 그 由來가 매우드문것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어실각

(御室閣)

 

朝鮮 第 19代 淑宗의 後宮이며 生母 淑嬪崔氏 동이의 僞幣를 모신 殿閣이다. 淑嬪崔氏씨는 7세에 宮에 들어가 宮女가 된後 肅宗의 承恩을 받아 淑嬪에 奉해지고 1694년 英祖를 낳았다. 御室閣은 1740년 (英祖16) 普光寺를 淑嬪崔氏의 墓所堂 昭寧園 의 祈福寺刹로 삼으면서 建立되었다. 建物은 正面,側面 모두1칸 規模의 사모지붕 建物로 御室閣 안에는 淑嬪崔氏의 僞幣를 모시고 있다. 御室閣 앞쪽에 英祖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直接 심었다고 傳해지는 300 년된 香나무가 있다.

 

 

향나무

 

壽齡이 300年이 넘은 이 香나무는 英祖가 御室閣을 造成할때 함께심은 나무라고 한다. 멀리 漢陽에 있는 자기를 代身하여 어머니를 지켜주기를 바랬던 마음으로  御室閣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망토를 두른 將軍의 모습이다.

 

 

숭정칠년명동종

(崇禎七年銘銅鐘)

 

大雄寶殿에 있던 이 梵鐘을 절 入口에 梵鐘閣을 짓고 옮기다. 仁祖 12年 (1634년) 僧侶 天寶와 尙倫 敬立등에 의해 製作된 이 鐘은 朝鮮後期에 만들어진 外來形 鐘으로서 鑄鐘匠 硏究에 도움이 되는 좋은 資料이다. 鐘의 模樣을 보면 全體 눞이 98.5cm 입지름 63 cm 의 中型 鐘 으로서 全體的으로 푸른 녹빛이 감돌고 立體感과 安定感이 있다. 이 鐘은 우리나라 鐘의 特徵인 소리의 울림을 돕는 音筒 이 없는 대신 中國鐘의 特徵인 雙龍으로 表現된 鐘을 거는 고리가 있다. 有形文化財 第 158號로 指定되었다.

 

 

 


(昭寧園)

 

 

昭寧園은 朝鮮 第21代 英祖의 어머니 淑嬪 崔氏(1670 ~ 1718)의 墓所다. 淑嬪 崔氏는 崔孝元의 딸로 第 19代 肅宗의 後宮이다. 肅宗 20年 (1694)에 英祖를 낳았으며 淑宗 44年 (1718) 49世로 돌아가셨다. 孝心이 지극한 英祖는 어머니의 죽음을 哀痛해하며 墓所 東南쪽에 侍墓幕을 짓고 親筆碑와 碑閣 4곳을 세웠다.

 

 

 

묘비명

(墓碑名)

 

淑嬪海州崔氏昭寧墓

 

만세루

(萬歲樓)

 

1740년 (英祖 16年)에는 附近에 肅宗의 後宮으로 英祖 임금을 낳은 淑嬪 崔氏의 墓  昭寧園 과 近接하여  이 절을  淑嬪 崔氏의  元刹로 삼아 大雄寶殿과 光恩殿을 增築하고 萬歲樓를 創建하였다고 한다.

 

 

영조

(英祖)

 

朝鮮의 第21代 王(在位 1724~1776). 蕩平政策을 施行하여 朋黨의 對立을 緩和하였고 여러 차례 奢侈風潮 禁斷의 措置를 내렸다. 《農家集成》을 普及하고 均役法을 施行하였으며 淸溪川을 浚渫하고 申聞鼓를 設置하는 등 많은 業績을 남겼다. 昭寧園은 朝鮮 第21代 英祖의 어머니 淑嬪 崔氏(1670 ~ 1718)의 墓所다.昭寧園은 朝鮮 第21代 英祖의 어머니 淑嬪 崔氏(1670 ~ 1718)의 墓所다. 淑嬪 崔氏는 崔孝元의 딸로 第 19代 肅宗의 後宮이다. 淑宗 20年 (1694)에 英祖를 낳았으며 淑宗 44年 (1718) 49世로 돌아가셨다. 孝心이 지극한 英祖는 어머니의 죽음을 哀痛해하며 墓所 東南쪽에 侍墓幕을 짓고 親筆碑와 碑閣 4곳을 세웠다.

 

 

古靈山에서 바라본 普光寺 全景

  뜻을 알았읍니다' 이것은 完全한 幸福 自由입니다.

곧 遂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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