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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國內博物館

西大門刑務所歷史館


(西大門刑務所歷史館)

 

 

 

 

自由平和向한 80

 80 YEARS FOR FREEDOM AND PEACE

1908  ~  1987

 

 

우리民族은 日帝에 의한 强制占領이라는 아품을 間直하고 있읍니다.  그 時期는 民族의 自尊心을 毁損당하고 民族 스스로의 發展이 中斷하는 苦痛의 歷史였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歷史的 現實에 屈服하거나 妥協하지 않는 民族獨立을 향한 鬪爭의 歷史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存在하는 것입니다. 여기 西大門刑務所歷史館은 바로 그러한 歷史의 繼承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읍니다. 未來를 責任질 靑少年들은  물론 온 國民들이 殉國先烈들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歷史를 克服하기 위한 愛國愛族의 뜻을 배우는 歷史의 산 敎育長 이다. 獨立門은 1963년 1월 21일에 史蹟 제32호로 指定되었다. 原來는 現在의 위치에서 東南쪽으로 약 70m 떨어진 復元 네거리 中間지점에 있었는데, 城山大路를 開設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現在 位置로 옮겨 復元하고 옛 자리에는 ‘獨立門址’라고 새긴 標識板을 묻어 놓았다.

 

 

 

독립문

(獨立門)

 

獨立門은 우리나라 最初의 西洋式 建物로 프랑스의 凱旋門을 모델로 삼았고 높이 14.28m로 45㎝×30㎝ 規格의 白色花崗巖 1,850여 개로 세워졌다. 中央에는 아치형의 虹霓門 模樣으로 되어 있고, 大韓帝國 皇室의 象徵인 李花무늬가 방패模樣을 한 文樣板에 새겨져 있다. 內部의 왼쪽에는 屋上으로 通하는 돌 層階가 있다.또한 上段에는 ‘獨立門’이 한글로 새겨져 있고, 反對便에는 ‘獨立門’이란 漢字가 새겨져 있다. 獨立門은 1963년 1월 21일에 史蹟 第32號로 指定되었다.  元來는 現在의 위치에서 東南쪽으로 약 70m 떨어진 復元 네거리 中間地点에 있었는데, 城山大路를 開設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現在 位置로 옮겨 復元하고 옛 자리에는 ‘獨立門址’라고 새긴 標識板을 묻어 놓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西大門刑務所歷史館)

 

우리民族은 日帝에 의한 强制占領이라는 아품을 間直하고 있읍니다.  그 時期는 民族의 自尊心을 毁損당하고 民族 스스로의 發展이 中斷하는 苦痛의 歷史였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歷史的 現實에 屈服하거나 妥協하지 않는 民族獨立을 向한 鬪爭의 歷史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存在하는 것입니다. 여기 西大門刑務所歷史館 은 바로 그러한 歷史의 繼承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읍니다. 未來를 責任질 靑少年들은  물론 온 國民들이 殉國先烈들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歷史를 克服하기 위한 愛國愛族의 뜻을 배우는 歷史의 산 敎育長 이다.

 

 

서대문형무소

(西大門刑務所)

 

패통

 

監房 門옆 패통은 監房 安 危急한 狀況을 看守에게 알리기 위한 道具

 

독방

(獨房)

 

이곳은 1坪도 안되는 좁은 空間으로 日帝가 愛國志士들에게 肉體的인 拷問과 心理的,精神的 苦痛을 주기위해 設置한 獨房이다. 日帝는 抗日獨立運動을 彈壓하고자 愛國志士들을 惡辣한 拷問과 혹독한 受刑生活로 抑壓 하였다. 특히 愛國志士들을 特殊犯罪者로 分類하여 電氣와 便器도 없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러한 獨房에 投獄시킨 後 拷問과 暴行등 갖은 惡刑을 일삼았다.    

 

한국병합기념장지증

(韓國倂合記念章之證)

 

고문도구

(拷問道具)

 

태형틀

(笞刑틀)

 

笞刑은 受刑者의 양손을 좌우로 펼쳐서 形板 위에 엎드리게 하고 양팔 關節과 양다리를 묶고 바지를 벗겨 볼기 부분을 露出시켜 執行하는것이다.

 

 

(笞)

 

日帝는 朝鮮笞刑領을 1912년 3월 18일 에 制定 恐怖하여 우리民族에게 笞刑을 適用하다가 3.1運動을 계기로 1920년에 廢止할때까지 使用하였다.

 

 

감방

(監房)

 

日帝는 監獄을 韓民族 彈壓의 重要한 手段으로 利用하였기 때문에 監獄의 繼續的인 增設에도 不具하고 受容할수 있는 面積이 絶對的으로 不足하였다. 1908년 全國에 8個所의 監獄을 設置했을때 제대로 監獄施設을 갖춘곳은 京城監獄 뿐이었고 그 외의 監獄은 不安全한 온돌監房이 2 ~ 3개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1908년 말에 收監人員은 이미 2,000名을 넘었고 坪當 7.9명이 受用되고 있었으며 監獄의 衛生 給食狀態는 마치 짐승 우리와도 같았다. 大部分의 監房은 햇빛과 通風이 잘되지 않아 어듭고 습기가 찼고 用便施設을 갖추지 않아 방안에서 便通을 使用해야만했다. 또한 獄舍는 가득 찼으나 受監人員이 날로增加하여 監房은 제대로 앉지도 못할만큼 비좁았다. 많은 受監者가 營養失調로 목숨을 잃었다. 

 

 

감시원

(監視員)

 

捕虜收容所 監視員으로 徵用 당했던 오탱석氏가 解放後 自身이 目擊한 日本軍人 들이 民間인 虐殺과 捕虜處刑등 끔찍한 蠻行들을 그림으로 再現 했다.

 

 

공작사

(工作舍第13獄舍)

 

이 建物은 1923년에 지은 獄舍로 投獄者들을 强制로 動員하여 일을 시켰던 作業場이다. 이곳에서는 刑務所 軍부대 官公署서 등에서 必要한 官用物品을 만들어 供給하였다. 그리고 日帝가 제2차 世界大戰을 일으킨 뒤에는 軍收用品을 生産하여 調達하는데 强制 動員한 곳이기도 하다.

 

 

第 12 獄舍

 

한센병사

 

한센病舍는 한센病을 앓고 있는 受刑者를 隔離 受容하기 위하여 1923년 지은 獨立獄舍 이다. 建物內部 前面에 복도가 있고 그 後面에 작은 옥방 2 개와 큰 옥방 1 개가 竝列로 配置되어있다. 오른쪽 中央 下段에 暖房을 위한 아궁이가 設置되어있는 것이 特徵이다.

 

 

 

이 무쇠솥은 蒸氣로 찜을 하여 밥을 만들던 가마밥솥으로 日本 사토鐵工所에서 製作 특주가마,증기밥솥 포트증기 食器消毒器등을 販賣 하였고 軍隊에 가마밥솥과 調理 機資材도 納品 하였다.

 

 

사형장과통곡의미루나무

(死刑場慟哭木)

 

이곳의 미루나무는 1923년 死刑場 建立 당시 植材되어 死刑場으로 끌려가는 殉國先烈들이 祖國의 獨立을 이루지 못하고 生을 磨勘해야 하는 恨을 눈물로써 吐 해낼때 붙들고 痛哭했던 것으로 痛哭의 미루나무 라고 이름 지어졌다. 또한 死刑場 안에 있는 또한 그루의 미루나무는 같은 時期에 심어졌으나 殉國先烈의  恨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逸話가 傳해지고 있다.

 

 

시구문

(屍軀門)

 

이곳은 日帝가 愛國志士들을 死刑한후 屍身을 刑務所 밖 共同墓地로 運搬하기 위해 파놓은 秘密 通路이다. 日帝는 그들의 蠻行을 감추기 위해 入口를 막았으나 1992년 西大門獨立公圓을 造成할때 약 40 m 길이로 發掘하여 復元하였다. 

 

 

격벽장

(隔壁場)

 

收監者들이 運動할때에 서로 對話하는것을 防止하고 監視를 容易하게 하기위해 여러개의 칸막이 壁 隔壁을 만들고 각 칸에 收監者들을 分離 收用하여 運動을 시켰던 一種의 運動施設 1920년대 지어졌다가 解放이후 撤去 되었던것을 2011년 源 位置에서 약 20 M 以前하여 原形 그대로 復元 하였다.

 

  

옥사빈터와붉은벽돌영구보존

(獄舍跡地瓦永久保存)

 

1987년에 서울拘置所가 京畿道로 옮겨갈때 獄舍는 15개동 이었으나 歷史性과 保存價値를 考慮하여 제9,10,11,12,13獄舍 .中央舍.나병舍를 保存하였다. 그 중 獄舍 3개동 (제10,11,12獄舍)과 死刑場은 1988년 2월 27일에 史蹟 제324호로 指定되었다. 이 길 양쪽에 位置한 部分을 未 保存 獄舍의 빈터이며 西大門刑務所歷史館  곳곳에서 볼수있는 붉은 벽돌은 日帝가 收監중에 있던 愛國志士들을 强制로 動員하여 일구워낸 歷史의 産物이다. 벽돌 한면에 日帝 强點時代에 京城監獄 에서 製作된 것임을 立證하는 京 字가 새겨져 있다. 西大門刑務所歷史館 에서는 이것을 永久保存하여 우리 愛國先烈들의 넔을 기리고 後孫들에게 自主獨立精神을 일깨워 주는 歷史의 산 敎育長으로 삼도록 하고있다.

 

 

지하감옥과 유관순열사

(地下監獄柳寬順烈士)

 

이곳은 日帝가 民族獨立運動에 참여한 女性들만 受監하고 拷問하기 위해 1916년에 新築한 女性獄舍이다. 그 뒤 1934년 경에 獄舍를 고쳐 지으면서 地下監獄의 面積은 높이는 1.48 m 로 허리를 똑바로 펼수도 없으며 채 1평도 안되는 獨監房 4개가 있어 惡辣한 日帝蠻行의 生生한 痕跡을 如實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1920년 10월 柳寬順烈士가 日帝의 彈壓에 抗拒하다가 殘酷한 拷問과 營養失調로 殉國 하신 곳으로서 一名 柳寬順窟 이라고도 한다. 

 

 

유관순열사

(柳寬順烈士)

 

柳寬順, (1902년 陰曆 11월 17일 ~ 1920년 9월 28일) 은 韓國의 獨立運動家이다. 日帝 强占期에 3.1 運動으로부터 始作된 萬世運動을 主導하다가 日本帝國의 모진 拷問으로 18세 때 殉國 하였다. 1962년 大韓民國 建國勳章 獨立章이 追敍되었으며, 1996년 梨花女子高等學敎는 名譽 卒業狀을 追敍하였다. 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竝川面 龍頭里의 生家가 復元되어  1991년 史蹟 제230호로 指定되었다. 柳寬順烈士 遺跡과  天安市  西北區 白石洞에 있는 天安綜合運動場의 ‘柳寬順體育館’은 柳寬順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하독방

(地下獨房)

 

取調後 獄舍로 移動하기전 監禁했던 곳  곳곳에서 들려오는 苦痛의 悲鳴소리와 언제다시 올지 모르는 拷問의 恐怖로 흽싸인 空間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地下獨房 에서도 獨立運動家는 萬歲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獨立의 다짐을 되새겼다.

  

 

歷史展示館

 

수갑

 

收監者 移送時 脫走防止를 위해 손목에 채웠던 수갑(철제)

 

족쇄

 

收監者 移送 이나 勞役시 脫走를 防止하기 위해 양쪽 발목에 채웠던 刑具

 

 

용수

 

收監者 移送時  一般人에게 獨立運動家의 얼굴을 露出시키지 않기 위해 얼굴에 씌웠던 道具

 

 

 

收監者 勞役시 脫走를 防止하기 위해 허리에 채웠던 刑具

 

 

저 밧줄에 숨진 殉國先烈들

 

손톱찌르기고문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苦痛을 주었던 拷問方法 심할경우 손톱뿐만 아니라 입속까지 마구 찔러 苦痛을 주기도 했으며 그 苦痛으로 奇絶하는 境遇도 있었다.

 

 

추모비

(追慕碑)

 

이 碑는 獨立運動하시다. 西大門 刑務所에 投獄되어 殉國하신 愛國先烈들의 넋을 기리고 되새기기 위해 造成되었다. 목숨바쳐 祖國을 지킨 先烈들의 民族精神과 自由와 平和를 向한 意志를 한데 모으고 그 모아진 意志를 未來로 나아가는 原動力 으로 삼고자 하는 意味를 담고 있다. 內部에는 現在까지 發掘된 愛國志士 165분의 名單을 새겨 놓은것이며,持續的인 調査를 通해 追加 發掘하여 登載 할 豫定 이다.

 

 

독립선언문

(獨立宣言門)

 

1919 年 3·1 運動 때 韓國의 獨立을 世界萬邦에 宣布한 宣言書. 崔南善이 基礎하고 民族代表 33 人이 署名하여 그해 3월 1일 下午 2시에 서울 泰和館 에서 發表 하였다.

 

 

서재필

(徐載弼)

 

獨立運動家,政治家 (1864 ~ 1951) 호는 松齋 金玉均 등과 일으킨 甲申政變의 실폐로 日本과 美國에서 亡命生活을 하였다. 後에 貴國하여 獨立協會를 組織하고 우리나라 最初의 民幹新問인 獨立新問을 發刊하였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朝鮮 高宗 21年 (1884)에 金玉均 ,朴泳孝 등의 開化黨이 閔 씨 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적인 政府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政變. 甲申政變의 前衛隊로 나서 公을 세운 徐載弼은 兵曹參判 겸 正領官으로 任命되어 있었다  擧事 이틀후에 閔 씨등의 守舊黨과 淸나라 軍事의 反擊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다. 金玉均 등과 일으킨 甲申政變의 실폐로 日本과 美國에서 亡命生活을 하였다

 

 

독립문

(獨立門)

 

1895년 2월(高宗 32年) 美國에서 歸國한 徐載弼 博士가 組織한 獨立協會를 中心으로 事大主義의 象徵인 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中國·日本·러시아와 그 밖의 西歐列强과 같은 自主獨立國임을 國內外에 宣布하기 위해 獨立門을 建立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最初로 全 國民的인 募金運動을 展開한 誠金으로 工事를 始作하였다. 設計는 徐載弼의 構想아래 獨逸公使館의 스위스인 技士가 도와 細部設計圖를 作成하였고, 公事監督은 朝鮮人 沈宜碩이 맡았으며, 일은 中國人 勞務者를 雇傭하였다. 1896년 11월 21일부터 公事를 始作하여 1年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完工하였으며 總 工事費는 그때 貨幣로 3,825원이 들었다.

 

 

영은문주초

(英恩門住礎)

 

1407年(太宗 7年)에 西大門 밖에 慕華樓를 세워 明나라의 使臣을 迎接하는 곳으로 1430년(世宗12年)에 慕華館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으나, 1536년 (中宗 31年)에 金安老의 建議로 홍살문을 代身해 청기와를 입혀 延詔門이라고 하였다. 1539년(中宗 34年)에 明나라 使臣 薛廷寵이 迎恩門 으로 고쳐 使用하였으며, 그 뒤 360年 동안 事大主義의 象徵物로 남아 있다가 1895년 2월(高宗 32年) 金弘集 內閣 때에 주춧돌 2기를 남기고 撤去하였다. 주춧돌은 4각의 민흘림 長礎石의 花崗石으로 4변에 모를 죽여 8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史蹟 제33호로 指定되었다. 英恩門 住礎는 1934년에 원래의 位置에서 南쪽으로 옮겨져 獨立門 앞에 세워졌으며, 1979년에 城山大路 公事 때문에 獨立門과 함께 現在의 位置로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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