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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 (高麗)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高麗)

 

바다에서 건져올린 高麗 사람들의

 

西海岸은 개경(開京) 으로 通하는 바닷길이었다. 바다와 江을 이어 國內物流는 물론 國際交易도 活潑하게 이뤄졌다. 이러한 당시의 바닷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最近 태안(泰安)이나 비안도(飛雁島)등 西海岸 沿岸에서 高麗時代 難破船이 發掘되었다. 건져올린 여러 遺物을 通해 高麗사람들의 生活을 斟酌하게 된다. 康津에서 大量生産된 靑瓷들은 運搬하기 쉽도록 수십개 단위로 包裝되어 뱃길을 따라 開京에 供給되었다. 運搬船의 船員들은 石炭을 利用하여 조나 메밀을 調理해 먹었던것을 알수있다.

 

 

구름학무늬매병

(靑磁象嵌雲鶴畵文梅甁)

 

高麗 매병(梅甁)은 中國 송(宋)나라 梅甁에서 由來된 것이지만, 12世紀경에 이르러서는 高麗만의 豊滿하면서도 有鉛한 線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이러한 高麗 梅甁의 樣式은 이 作品에서 洗煉味의 極致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밑지름 17㎝의 크기의 梅甁의 아가리는 작고 낮으며 밖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리 아랫부분에는 꽃무늬를 둘렀으며 굽 위로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몸통 全面에는 구름과 鶴을 새겨 넣었는데, 黑白象嵌한 원 안에는 하늘을 向해 날아가는 鶴과 구름무늬를, 圓 밖에는 아래쪽을 向해 내려가는 鶴과 구름무늬를 새겼다. 鶴의 進行方向을 다르게 表現한 것은 陶瓷器 表面이라는 一定한 制約을 넘어 四方으로 空間을 擴散시켜 짜여진 區劃으로부터의 自由로움을 追求한 듯하다. 이같은 表現上의 變化 追求와 함께 文樣처리의 能熟함에서 高麗 陶瓷器의 優秀함과 高麗人의 創意力을 엿볼 수 있다. 高麗 13세기 澗松美術館 所藏

 

전주성명연화문와당

(全州城銘蓮花文瓦當)

 

後百濟 宮城터로 推定되는 곳에서 出土된 수막새이다. 灰褐色 硬質 막새로 둘레에 구슬무늬를 두르고 그 안쪽으로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에 全州城이라는 名分이 陽刻되어 있다. 수키와 부분은 大部分 남아 있지 않고 막새 部分도 많이 닳았다. 

 

고려태조

 

高麗太祖가 金剛山에 올라갔을때 曇無竭菩薩 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 엎들어 절하는 場面을 그린 그림이다.  太祖가 曇無竭菩薩 을 親見한後 正陽寺 (정양사)를 세웠다는 說話에 바탕을 둔것으로 보인다. 曇無竭菩薩 은 華嚴經의 12,000 부처중 가장 中心이되는 부처로 恒常 金剛山에 머물며 說法한다고 한다. 나무판에 黑漆을 하고 畵面을  위아래로 나누어 각각 曇無竭菩薩 과 地藏菩薩이 現身한 帳面을 금선 (金線)으로 그렸다. 이면에는 아미타구존도(阿彌陀九尊圖)를 그렸다. 金剛山 그림중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作品이다.

 

(函)

 

마름꽃 모양의  내함과 마름모 模樣의 外函이 한조를 이룬다. 내함은 靑銅으로 만들고 朱錫으로 鍍金하였다. 外函은 이임으로 만들었는데 表面에 진사등의 性分이 確認된 것으로 보아 原來 무늬를 粧飾했던 것으로 推定된다.  이 함은 精確한 用度를 알수는 없으나 統一新羅 遺跡에서 發見된 뼈항아리를 넣은 石材 外函과 比較하여 用度를 斟酌할수 있다. 高麗 王室墓地 硏究에  重要한 資料가 된다.

 

청동도장

(靑銅印)

 

開城에서` 出土된 靑銅製 도장들로 官僚中에서 使用한 것으로 여겨진다. 손잡이는 師子나 물고기등의 동물 模樣을 하고있다. 도장 면에는 글자외에도 意味를 알수없는 幾何學的 무늬가 表現 되곤 한다.

 

묘지명

(墓誌銘)

 

慶州 호장(향리의최고직) 김지원의 딸의 墓誌銘 이다. 아버지의 이름만 새긴것은 未婚으로 죽었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향리의 딸이 未婚인채 開京에 묻힌 緣由는 알수없다. 혹 地域 代表로 開京을 오가던 아버지를 따라왔다가 삼아하자 開京에 葬禮를 치른것일 수도있다. 여덟 잎에 꽃模樣 墓誌銘은 어린 딸에 대한 아비의 애듯한 사랑이 담긴 듯하다.

 

금속화폐

 

高麗時代의 基本貨幣는 쌀,베등의 物品貨幣였으나 標準化된 金屬貨幣도 및 차례 鑄造 流通되었다. 最初의 金屬貨幣는 成宗 15년(996) 鑄造된 건원중보라는 鐵錢인데 强力한 反對論에 부딪쳐 약 6년만에 流通이 中段 되었다.

 

배모양용기

(靑磁陰刻文舟形容器)

 

시를새긴병

(靑磁陽刻蓮塘草文瓢形甁)

주전자

(靑磁象嵌瓜形注子)

 

잔과잔받침

(靑磁托盞)

 

선박에 실은 청자 꾸러미

 

가마터에서 大量 生産된 靑瓷는 運搬하기 쉽도록 數十개 單位로 包裝되어 뱃길을 따라 開京에 供給되었다. 꾸러미에는 物件을 보내는사람 받는사람 物件과 收量등을 적은 꼬리표 毛幹을 달았다.

 

거란거울

 

거란소자 새겨진 靑銅거울이다. 거울 꼭지를 中心으로 네모난 테두리 안쪽에 위에서 時計方向으로 장수복덕(長壽福德)으로 읽히는 거란문자 네개가 陽刻되었다. 같은 樣式의 거울이 世界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점 이 거울이 開京에서 出土된 점을 미루어 당시 거란에거 大量製作한 거울이 高麗에 收入되어 實題 開京 住民이 使用한 것으로 斟酌된다.

 

백지흑화모란당초문병

(白地黑花牡丹唐草文甁)

 

백자파어문발

(白磁波魚文鉢)

 

白瓷파도 물고기무늬 사발

 

백자화당초문대접

(白磁花唐草文大楪)

 

강화고려왕실무덤출토품

(江華高麗王室陵墓出土品)

 

江華島에 남아있는 高麗王室 무덤에서 出土된 副葬品중 一部이다. 金屬,琉璃,玉등으로 製作된 裝身具와 그 외 여러 出土品을 通해 江華 天道 時期 高麗王室 文化의 一面을 알수있다.

 

사신문석관

(四神文石棺)

 

죽은 이의 遺骨을 담는 石棺이다. 뚜껑의 바깥 면에는 飛天像과 꽃을 안쪽 면에는 카시오페이아와 北斗七星을 새겼고 바닥에는 안쪽으로 격자무늬를 새겼다. 4개의 側面 板石바깥 면에는 돌아가며 사신(四神)靑龍,白虎,朱雀,玄武을 陽刻 하였고 안쪽 면에 꽃과 꽃병을 線刻 하였다. 사신이 둘러지키고 꽃이 흐트러진 石棺 內部에서 죽은 이는 安息을 누렸을 것이다.

 

화엄경

 

中國 唐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飜譯한 <大方廣佛華嚴經>에 대한 澄觀의 解釋과 부연 說明을 宋나라 僧侶 정원이 各 本分 아래 記錄하여 엮은 冊이다. 이 冊을 木板은 庭園이 高麗로 가는 商人을 通해 懿親에게 傳達한 것이다. 義天은 宋나라에 有益한 당시 庭園과 깊이 交遊하였다. 이 冊은 高麗와 宋의 代表的 高僧들을 通해 이루어진 佛敎 交流를 證明하는 貴中한 資料이다. 印刷狀態로 보아 이 板本의 印刷 時期는 14세기로 推定된다.

 

용장산성

(龍藏山城)

 

原(몽골)과 高麗 政府에 抗拒하며 珍島로 옮긴 三別抄는 이곳 勇將山 기슭에 山城을 쌓고 宮闕등 各種 建物을 지었다. 階段式의 建物配置는 高麗王宮이 있던 開城 滿月臺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이곳 建物地에서는 火刑접시등 高級靑瓷들과 多樣한 種類의 기와들이 確認되었다.

 

도교

 

高麗時代에는 政府主導하에 王室과 나라의 安寧을 비는 儀禮 中心의 道敎가 크게 盛行하였다. 首都開京의 復元宮,大淸觀과 같은 道敎 寺院에서는 十日窯나 三淸을 비롯한 여러道敎 神들에게 祭祀를 올리며 國王의 壽命長壽와 나라의 太平함을 빌고 災難이 없어지기를 祈願 하였다.

 

고려시대무덤부장품

 

서천 추동리(舒川楸洞里) 이곳은 先史時代부터 朝鮮時代에 이르는  時期의 墳墓와 住居地이다.

 

삼봉정도전문집

(三峯鄭道傳文集)

 

高麗末 性理學者이자 急進改革派  新進士大夫로 李成桂를 錐臺하여 새 王祖를 開創하고 그 文物制度를 整備하는데 決定的 寄與한 鄭道傳의  文集이다.

 

도기

(陶器)

 

高麗時代의 陶瓷器라 하면 흔히 청자(靑磁)를  떠올린다. 그러나 高麗사람들이 生活 용기(容器)로 가장많이 使用한것은 靑瓷 같은 자기(磁器)가 아닌 陶器였다. 도기(陶器)는 釉藥을 바르고 높은 溫度에서 재벌구이를 거쳐야 만들어지는 瓷器나 靑銅으로 만든 製品을 보다 크게 저렴하였다. 게다가 항아리같이 身分과 階層을 막론하고 使用한 貯藏 容器들은 대개 陶器로 만들었다.

 

 

청자병새긴

 

細鏤金花碧玉壺

豪家應是喜提壺

須和賀老乘淸興

抱向春深醉鏡湖

 

푸르고 아름다운 술병에 금꽃 아로새겼으니

호사로운 집안에서 이 술병을 사랑하였을 것이다.

옛날 하로(하지장)가 기분 좋을적

늦은 봄 강호에서 이 병을 안고 흠뻑 취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