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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 (墓誌銘)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그리고죽음

 

(墓誌銘)

 

슬프다 서러운지고 

아프다 서러운지고 

평생을살며 

좋은시절살다가 

가엾은 그대가떠나니 

이제는 조금도 좋은일이 없네 

 

영조후궁영빈이씨묘지명

(御製映嬪李氏白磁墓誌銘)

 

英祖 임금의 後宮 映嬪李氏의 墓誌이다. 後宮이란 왕의 正實 夫人인 王妃를 除外한 王의 女人 즉 王의 첩을 말한다. 映嬪에서 嬪 이란 後宮 가운데 가장 높은 品階人 政 1 品의 이름이다. 映嬪 李氏는 6살에 宮女가 되어 以後 英祖임금의 後宮으로 思悼世子를 비롯한 1남 6녀를 낳았으며 英祖임금으로 부터 매우깊은 사랑을 받았다.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

 

丁若鏞은 억울하게 流配生活을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學問에 힘써 業績을  남기는 등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 묘지명 (墓誌銘)이란 죽은이에 대해 幹略히 一生을 整理해 밝히는 것으로 대게 가까운 親知가 쓰게된다. 그런데 丁若鏞은  스스로 썼다. 그래서 자찬 (自撰) 墓誌銘이다. 自讚墓誌銘은 結局 一種의 自敍傳인 셈이다. 自身의 삶에 대하여 잘모르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義徒를 엿볼수 있다.

 

휘지

 

代理淸淨을  委任받은 王世子가 命令을 내릴때 使用한 證票이다. 英祖 25년 아들인 思悼世子에게 政治를 가르치기 위해 代理淸淨을 시키자 世子는 이 徽旨로 政事를 處理하였다. 徽旨에는 英祖의 署名이 陰刻되어 있다.

 

허재석관묘지명

(許載石棺墓誌銘)

 

高麗 中期의 文臣의 墓誌銘이다. 바깥 4면에 무덤의 守護神으로 使臣과 12지신이 排置되었으며 墓誌銘은 안쪽에 새겼다. 火葬 뒤 남은 뼈를 담기위한 작은 石棺形態로 佛敎의 影響을 잘 보여준다.

 

부인양씨묘지.명기

(南原梁氏墓誌.明器)

 

朝鮮前期의 武臣 윤사신의 夫人 梁氏 墓誌 와 名技이다. 네모난 板形의 鐵花白瓷 墓誌와 뚜껑단지,뚜껑사발,병,접시 및 말과 人形등 多樣한 명기가 함께 묻혀 후히 葬事 지냈음을 알수있다.

 

한명회묘지명

(韓明澮墓誌銘)

 

朝鮮前期의 文臣 한명회의 墓誌銘이다. 네모난 棺 模樣의 粉靑沙器 墓誌銘으로 中宗反正 이듬해인 1527년 2차로 製作된 것이다. 韓明澮가 죽자 사위인 成宗이 매우 슬퍼했다는 內容이 담겨있다. 忠南公州 가마터에서 修習된 破片중 一部가 韓明澮의 墓誌銘임이 밝혀졌다

 

부인김씨묘지

(義城金氏墓誌)

 

朝鮮世宗代의 武臣인 윤득홍의 夫人 金氏 墓誌 이다. 現在 傳해지는 墓地  가운데 唯一한 靑瓷 墓地로 象嵌技法으로 글씨를 새겼다. 高麗時代에도 없던 靑瓷墓地가 朝鮮時代에 出現했다는 점에서 資料的 價値가 높다. 

 

정소공주태항아리

(貞昭公主胎壺)

 

胎항아리는 胎室에 묻는것이 一般的이지만 이 胎항아리는 墓에서 發見된 점이 특이하다. 製作年代가 分明하여 朝鮮初期 粉靑沙器 硏究의 基準이 되고있다.,

 

조존성묘지명

(趙存性墓誌銘)

 

朝鮮中期의 文臣 조존성의 墓誌銘이다. 大理石材로 모두 3매이며 그중 2매는 兩面에 글자를 새겼다. 특이하게 王室이 아닌 士大夫家에서 大型 石材로 製作된 墓誌銘이다. 널 위를 덮는 墓誌로 使用되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이영유묘지

(李永유墓誌)

 

朝鮮前期의 武臣 이영유의 墓誌 이다. 네모난 甁模樣으로 製作된 粉靑陰刻 墓誌로 네 면에 글씨를 새기고 植物무늬를 粧飾한 粉靑沙器 墓地의 初期作 이다.

 

旌麾翁主副馬全彰君柳貞梁夫婦墓誌銘

 

김원행묘지

(金元行墓誌)

 

朝鮮後期 文臣 김원행의 墓誌 이다. 靑華白瓷 墓誌銘으로 漢湖先生 金公之墓 라는 題目인 적은 別途의 환을 만들었다. 맑고 投影한 柏子板에 단정한 書體로 써내려간 모습에서 朝鮮後期 士大夫 墓誌銘의 品格이 잘나타낸다.

 

정철묘지명

(鄭澈墓誌銘)

 

朝鮮中期의 文臣이자 詩人인 鄭澈의 墓誌銘이다. 네모난 板形의 白瓷靑華 墓誌銘으로 모두 23 매이다. 긴 文章을 여러 版으로 엮어 書冊 形態로 構成한 士大夫 墓誌銘의 全形을 보여준다. 1688년 製作되었으나 破損되어 1706년에 다시 製作되었다.

 

윤지임묘지명

(尹志任墓誌銘)

 

朝鮮肅宗대의 丹陽郡守 尹志任의 墓誌銘이다. 두 벌로 製作된 白瓷靑瓷로 內容은 同一하지만 한 벌은 태두리를두른 書冊의 形態이다. 親舊인 남착명이 섰다.

 

윤상은부부묘지

(尹相殷夫婦墓誌)

 

별제를 지낸 윤상은과 아내 양천 허씨의 墓地이다. 아들인 윤석빈이 지었다.

 

부인전씨묘지

(潭陽田氏墓誌)

 

항아리 겉면에 墓誌를 作成하였다. 墓의 위치 墓의 風水事項과 坐向 子孫을 記錄 하였다.

 

홍발부부묘지

(洪撥夫婦墓誌)

 

洪撥과 아내 반남 朴氏의 墓誌銘이다. 近世에 製作된 墓誌銘으로 보인다.

 

이후원묘지명

(李厚源墓誌銘)

 

友誼政을 지낸 이후원의 墓誌銘이다. 白瓷靑華로 製作 되었으며 墓誌銘을 담았던 함의 뚜껑은 缺損되었다.

 

유강원지석함뚜껑

(裕康園誌石函)

 

大韓帝國 高宗41년 서울시 有形文化財 제 134호

 

청연군주대례복

(淸衍郡主)

 

朝鮮 19세기 思悼世子의 딸(정조의누이) 大禮服은 國家의 重代한 儀式 때 입던 禮服으로 朝鮮時代에는 五禮에 따라 祭服,朝服,公服,喪服,視服.을 着用하였다.이 옷은 鴛鴦文의 金箔을 입힌 元蔘으로 둿길이가 거의 바닥에이를 程度이고 앞은 그보다 약 30 cm 짧다. 火葬 (갓 中心에서 소매끝까지)의 길이가  짧아 꼭 끼게 입었던 것으로 보이며 둥근깃 으로 되어있다.

 

청연군주부장품

(淸衍郡主副葬品)

 

朝鮮 純祖 21년 (1821)경

 

청연군주묘지

(淸衍郡主墓誌)

 

朝鮮 純祖 21년 (1821년) 思悼世子의 딸

 

김현근묘지명.함

(金賢根墓誌銘.函)

 

명온公主의 男便인 김현근의 墓誌銘으로 조카인 領議政 김병학이 지었다. 夫人인 명온공주 墓誌銘과 달리 白瓷로 製作되었다. 墓誌銘에는 金賢根의 行績과 함께 아버지의 상을 치르다가 病을얻어 6일 만에 死亡한 일등이 記錄되어있다.

 

사도세자묘지명 

(思悼世子墓誌銘)

 

白磁 靑華 英祖 御製  思悼世子 墓誌銘 

  

이 墓誌는 英祖 (38년)가 죽은 아들을 위해 直接 지은것으로 늙은 아비로 하여금 萬古에 없이 子息을 죽이는 일을 하게되었다 는 英祖의 깊은 歎息과 辨明이 적혀 있다.

 

사도세자묘지

(思悼世子墓誌)

 

英祖가 아들인 思悼世子를 위해 直接지은 墓誌이다. 墓誌에는 英祖의 깊은 歎息과 辨明이 적혀있다. 이 墓誌는 思悼世子의 첫번째 무덤인 永祐園 터에서 徽旨등과 함께 發見된 것으로 正祖 13년 水原으로 移葬할때 廢氣된 것이다.

 

이연묘지

(李沇墓誌)

 

宣祖의 曾孫인 火山群 이언의 墓誌이다. 墓誌에는 題目만 적혀 있는데 이를 通해 本分이 記錄되어 있는 別途의 墓誌가 있음을 알수있다. 火山群의 墓는 서울시 西大門區 北加佐洞에 있었으나 지금은 1747년에 세운 神道碑만 남아 있다.

 

영창대군묘지명

(永昌大君墓誌銘)

 

宣祖의 아들로 光海君 때 悲運의 주음을 맞은 永昌大君의 墓誌銘 이다. 仁祖가 永昌大君의 一代記를 지어 友誼政 신흠에게 주며 永昌大君의 墓誌를 지으라고 命하였다는 內容들이 적혀있다. 크기로보아 陵地의 客識으로 製作하였음을 알수있다.

 

왕정원墓誌

 

허 목

(許穆)

 

朝鮮後期 代表的 學者인 許穆의 肖像畵 이다.

 

한글이있는벽돌

벽돌에 새긴 墓誌銘으로 한글을 쓰었다. 墓誌의 名門을 3.4조 歌辭體로 노래한 內容이다. 破損된 部分이 있어 正確한 內容은 읽을수 없으나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과 지은이의 喪失感이 드러나 있다. 바탕에 검은색을 칠하고 글씨를 새긴후 에 칠을 넣어 製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