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2/宗敎施設 (寺)

淸凉山淸凉寺

(淸凉寺)

 

 

淸凉寺는 新羅 文武王 3년(663)에元曉大師가 創建했다고 傳 해지며 松廣寺 16國師의 끝 스님인 法匠 孤峯先師(1351-1426)에 의해 重創된 千年 古刹이다.創建 당시 승당등 33개의 附屬 建物을 갖추었던 大寺刹로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庵子 에서는 스님들의 讀經소리가 淸凉山을 가득메웠다고 한다. 또한 自然景觀이 秀麗한 淸凉山에는 한때는 新羅의 古刹인 연대사(蓮臺寺)와 망선암 (望仙菴)등 대소 27개소의 庵子가 있어서 당시 新羅 佛敎의 搖籃을 形成하기도 하였다.하지만 朝鮮時代 佛敎를 抑壓하는 朱子學者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現在는 淸凉寺와 附屬建物인 응진전만이 남아있다.淸凉寺의 法堂인 琉璃寶殿은 創建年代가 오래되고 짜임새 있는 建築物로 인하여 慶尙北道 有形文化財 제47호로 指定 되었다.

 

일주문

(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寺刹로 들어가는 첫 번째 關門이다. 元來 지붕을 가진 一般的인 建築物이라고 하면 四方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支撑해야 하는 것이 常式이다. 하지만 一柱門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支撑하며 서 있는 建築物이다. 一柱門이란 名稱은 바로 이런 建築的인 特徵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佛敎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意味를 附與한다. 즉 神性한 寺刹에 들어서기 前 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眞理의 世界로 向 하라는 象徵的인 意味가 담겨 있는 것이다. 一柱門의 경지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는 位置이다. 다만 短狐한 決心과 實踐 意志를 보이면서 求道者로서의 길을 始作하는 段階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一柱門을 基準으로 衆生이 사는 世上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生死 煩惱에서 解脫한 깨달음의 世界人 출세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청량정사

(淸凉精舍)

 

蓮花峰과 金塔鐘 사이에의 溪谷에 자리잡은 淸凉精舍는 退溪 李滉이 淸凉山에 올라 유산한것을  記念하기 위해 寺塔을 들여 論意하여 1832년(純祖33)에 建立하였다. 以後 淸凉精舍는 先生의 뜻을 기리는 後學들에게 學文과 修養의 자소가 되었으며 舊韓末에는  淸凉精神이 組織되어 義兵鬪爭에 根源地가  되었다. 

 

범종루

(梵鍾樓)

 

寺刹에서 梵鍾이 있는 곳을 말하며 全閣이 2층의 樓閣일 경우에 범종루(梵鍾樓)라고 한다. 梵鍾閣은 一般的으로 不二門과 同一先上에 位置하는데 그 까닭을 不二門과 關係지어 生角해 볼 수 있다. 梵鍾閣에서는 범천(梵天)의 종소리가 흘러나온다. 힌두교의 創造神인 범천은 하늘에서 不二門으로 들어오는 求道者를 歡迎하고 그가 불이의 境地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하늘의 音樂을 演奏한다. 이 범천의 소리는 더 나아가 아직 不二門에 이르지 못한 求道者에게 勇氣를 북돋우어 주고 일주문 바깥에서 苦痛 받는 衆生들의 煩惱를 씻어주는 부처의 소리인 것이다. 이 梵鍾閣에는 때로 梵鍾만이 홀로 있기도 하지만, 規模 있는 절에서는 梵鍾 외에도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등의 불전사물(佛殿四物)이 함께 配置하기도 한다.

 

청량사

(淸凉寺)

 

淸凉山은 太白山에서 갈려 나온 日月山의 西南쪽 24km 지점에 우뚝 솟은 神靈한 山으로 奉化郡 재산면 남면리,명호면 북곡리, 安東市 도산면, 예안면과 接境을 이루고 있으며 道立 公園 지정 면적이 52.8㎢이다.옛부터 小金剛이라 불릴 정도로 自然景觀이 秀麗하고 奇巖怪石이 壯觀을 이루고 있는 山으로 全南 靈岩의 月出山,慶北 靑松의 周王山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山의 岩石은 變成岩류와 堆積岩類로 되어 있는데 堆積岩類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特徵이다. 淸凉山은 주세붕이 명명한 열두봉우리를 主軸으로 하고 太白山 潢池에서 시원(始源)한 洛東江이 山의 雄壯한 絶壁을 끼고 유유히 흘러 산봉우리마다 숱한 神話와 傳說을 간직하고 있는 遺書 깊은 山이다. 이 산은 1894년 甲午改革 이전까지는 安東에 속해 있다가 1895년 行政區域 改編시 奉化에 束하게 되었다.

 

삼각우송

(三角牛松)

 

三角牛松에 얽힌 傳說 옛날 淸凉山에서 멀리 덜어진 곳에 남민(南敏)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집에서 기르던 소가 뿔이 셋 달린 송아지를 낳았는데 자라서 어찌나 크고 힘이 세고 사나운지 도무지 부려먹을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淸凉寺 주지가 남민의 집을 찾아가서 절에 施主하도록 권하여 承諾을 받았다. 이 소는 절에 온후 차츰 고분고분해져 절에서 石築을 쌓는 돌을 運搬하거나 나무를 運搬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竣工을 하루 앞둔 어느날 이 소가 죽자 불쌍이 여겨 절 앞에다 묻고 墓를 만들어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 世上사람들이 이것을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 불러오고 있다고 합니다.

 

유리보전

(琉璃寶殿)

 

琉璃寶殿이란  東邦琉璃廣 世界를 다스리는 藥師如來를 모신 全閣을 뜻하는데 琉璃寶殿 안에는 藥師如來佛이 모셔져 있습니다.琉璃寶殿이라는 懸板은 高麗 恭愍王의 글씨라고 하지요.  琉璃寶殿이 다른 곳에서는 "藥師殿"이라고도 합니다.  동이 아닌 서방은 阿彌陀如來불이 계신데 阿彌陀如來를 모신 全閣을 阿彌陀殿, 彌陀殿, 無量壽殿 등으로 부른 답니다. 1361년 10월 紅巾賊이 侵入하자 高麗恭愍王이 淸凉山으로 피란갈 때 지금의 奉化郡 명호면 북곡리와 관창리를 連結하는 나분들(廣石)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이때 恭愍王은 말을 타고 건너고, 魯國公主와 侍女들은 隣近 婦女子들의 등을 딛고 건넜다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傳해져 오고 있는 民俗놀이 "安東 놋다리밟기"의 시원이다.恭愍王은 이곳 淸凉山에 3개월여 동안 머물면서 "琉璃寶殿"의 懸板을 썼다고 한다. 

 

'歷 史 旅 行 2 > 宗敎施設 (寺) ' 카테고리의 다른 글

馬耳山塔寺  (0) 2009.04.04
南漢山惺佛寺  (0) 2009.03.27
感恩寺址三層石塔  (0) 2009.03.13
海東龍宮寺  (0) 2009.03.13
連華山臥牛精舍  (0) 2009.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