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삼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感恩寺址에 있는 統一新羅時代 3층石塔 2기. 國寶 제112호. 높이 13.4m. 동서로 建立된 두 塔의 規模와 形式은 同一하며, 現存하는 石塔 중 거탑(巨塔)에 속한다. 基壇은 上下 이중으로 되어 있고 地臺石·重石·甲石은 12장의 石材로 이루어져 있으며, 下層基壇에는 3개, 上層基壇에는 2개의 탱주(撑柱)를 세웠다. 塔身部의 1층은 우주(隅柱)와 면석(面石)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屋蓋石은 비교적 넓고, 落水面 部分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上下基壇과 塔身部에 宇宙와 탱주를 表現한 것, 落水面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木造建築樣式이 보이며, 層段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의 痕跡이 보인다.
감은사지3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史蹟 제31호. 〈三國遺事〉에 문무왕(文武王)이 倭兵을 鎭壓하기 위해 歷史를 始作했으나 中途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 (神文王)이 卽位해 682년(神文王 2) 完成했으며, 金堂의 基壇 아래에 動向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文武王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遺書에 따라 골(骨)을 埋葬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記錄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意味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神文王이 父王의 護國忠情에 感謝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감은사지3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感恩寺는 新羅 문무왕(文武王)이 三國을 統一한 뒤 倭寇의 侵略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기 始作하여 신문왕(神文王) 2년 (682)에 完城 된 절이다. 感恩寺에는 죽어서도 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文武王의 遺言에따라 東海의 대왕암(大王岩)에 葬師지낸뒤 龍 이된 父王이 드나들수 있도록 금당(金堂) 밑에 특이한 구조로 된 空簡이 만들어져 있다
감은사지3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金堂 앞에 東西로 마주보고 서 있는 三層石塔은 높이가 13.4m 로 壯大하다 三層石塔은 이중(二重) 기단위에 몸체돌이 올린모습으로 처마밑은 받침이 5단이며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統一 新羅기의 典型的인 樣式을 보인다 1959년 12월 西탑을 解體保手할때 3층 몸돌에서 建立당시 設置하였던 매우 正敎하고 貴中한 사리장치(舍利裝置)가 發見 되었다 1996년에 銅塔을 解體保守 하였는데 3층 지붕돌의 上面 사리공에서 금동사리함(金銅舍利函)이 發見 되었다 慶州에 있는 3층 石塔으로는 가장 巨大하며 옛 新羅의 1 탑 中心에서 三國統一 直後 雙塔으로 變貌한 最初의 가람내치를 보이고 있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發掘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南北보다 東西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中央部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確認되었다. 또한 金堂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東西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模樣으로 된 것은 〈三國遺事〉의 記錄과 一致하는 것으로 매우 興味롭다. 原來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北쪽 講堂은 後代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