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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國內博物館

國立扶餘博物館

(國立扶餘博物館)

 

 

百濟 文化가 華櫚하게 꽃피었던 사비시기 首都 扶餘에 位置하며 당시의 文化財를 硏究 調査하고 展示敎育하는 百濟專門博物館 입니다. 國寶3 점과 寶物 5 점등 총 25,000여점의 遺物을 所藏하고 있으며 약 1,000여점의 遺物을 展示하고 있읍니다. 특히 每年 百濟文化를 中心으로 한 特別展 開催를 通해 觀覽客에게 多樣한 볼거리를 提供하고 있읍니다. 

 

 

 

백제금동대향로

(百濟金銅大香爐)

 

 百濟金銅大香爐는 1993년 12월12일 百濟 羅城과 百濟王陵院 中央칸 西쪽의 한구덩이에서 出土된 이 香爐는 높이 61.8 cm 무게 11.8kg의 大型香爐로 몸체와 뚜껑으로 區分되어 있으며 위에 附着한 鳳凰과 받침대를 포함하며 뚜껑에는 피리와 소비파,현금,북들을 演奏하는 5인의 樂士와 各種 武人像,騎馬狩獵像등 16인의 人物像과 鳳凰,龍을비롯한 動物을이 表現되어있다 百濟時代의 工藝와 美術文化,宗敎,思想,製造技術까지도 把握케하는 貴重한 文化財이다 (國寶제287호) 복제품

 

 

무늬벽돌

 

부여 외리에서 出土된 무니벽돌은 산경치,龍.鳳凰,연꽃,구름,도깨비등 여덟가지 무늬로 構成된다. 벽돌에 表現된 무늬는 百濟사람들이 自身들이 살아가는 自然과 그 世界의 아름다움을 藝術的으로 드러내는 方式이 여덟가지의 象徵으로 表現되어 있어서 百濟文化를 利害하는 重要한 열쇠가 된다. 이러한 象徵은 百濟의 藝術作品 곳곳에 그 痕跡을 남기고 있으며 이러한 要所가 가장 藝術的으로 集約된 아닌 百濟金銅大香爐이다.

 

 

부여석조

(扶餘石槽) 

 

王宮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傳說이 전해오는 것으로 "工" 자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 形態의 石造가 오려져 있다.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사용한것으로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谷線으로 처리되어 百濟人의 簡潔하고 素朴한 美的 感覺을 잘보여주고있다. 石造의 表面에는 日程한 間隔으로 세로줄을 새기고 그 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痕跡만 보인다. 글은 唐나라가 百濟를 平定했다는 內容으로  扶餘 정림사터 五層石塔 (國寶5호)의 1층 탑 몸돌에 새긴것과 같은것이다.

 

 

동사리석탑

(東寺里石塔)

 

元來 扶餘郡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石塔이다. 2층의 基壇위에 5층의 塔 몸돌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基壇의 네면에는 角面마다 무늬를 얕게 새겼고 위층 基壇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모퉁이 마다 돌출된 꽃彫刻을 두었다. 塔의 몸돌은 모서리 마다 기둥 模樣을 彫刻 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차이를 보이고있다. 꼭대기 粧飾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粧飾은 훗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高麗時代에 流行한 石塔 樣式이다. 

 

 

지붕돌

高麗時代 의 것으로 推定됨 

 

비석받침

 

高麗時代 의 것으로 推定되며 서천 군사리에서 出土 

 

비머리

 

비머리는 니무기를 새긴 碑石의 머릿돌로 이수 라고 부른다 비머리는 일찍이 中國 漢나라에서 使用되기 始作 하였으며 唐나라에 이르러 絶頂期를 이룬다. 이 聖住寺터 發見 비머리는 攀龍 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彫刻 되어 있는데 石碑를 들어올리는 形象이다. 中央 上端部에는 元型으로 된 提掖 이있다. 統一新羅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彫刻이 纖細한 作品이다.  

 

비석받침

 

碑石받침은 거북 模樣의 돌碑石 받침돌을 가리킨다. 거북이 殘燈에 長方形의 碑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碑身을 세우는 것은 中國 唐나라 때부터 始作되었다. 이 碑石받침은 머리와 몸의 一部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등 모양이 매우 事實的이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彫刻되어 있다. 上部에는 碑身을 꽃을수 있게 碑座가 마련되어 있다. 統一新羅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碑石받침硏究에 重要한 資料이다. 

 

 

연꽃무늬석등받침

 

統一新羅時代의 것으로 推定되며 扶餘 석목리에서 出土 

 

 

석탑

 

統一 新羅時代 의 것으로 推定되며 保寧市 미산면 삼계리에서 出土 

 

 

동남리석탑

(東南里石塔)

 

扶餘 석목리 논절마을의 高麗時代 절터에 있었던 것을 博物館으로 옮겨 세웠다. 2층의 基壇위에 5층 의 塔 몸돌을 올린 石塔이 었으나 아래층 基壇의 一部만 남아 있고 塔몸돌의 4층 石塔이었으나 아래층 基壇의 一部만 남아있고  塔 몸돌의 4층 몸돌은 없어진 常態이다. 위층 基壇의 맨 윗돌은 塔몸돌의 1층 몸돌을 괴어주는 部分 周圍에 넓게 테두리를 두른 뒤 연꽃무늬를 粧飾하엿다. 2층 몸 돌부터는 갑자기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 큰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粧飾을 받쳐주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高麗時代 後期樣式을 잘 間直하고 있는 石塔이다.

 

 

모든 旅行은 즐겁다. 그래, 旅行은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거야. '살까 말까 망설이는 물건이 있으면 사지 말아야 하고, 갈까 말까 망설이는 旅行이 있으면 가야 한다' 라는 말은 언제나 명언이다.  - 박혜란의《다시, 나이듦에 대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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