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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歷 史 物

全州 (慶基殿)

(慶基殿)

 

 

慶基殿은 朝鮮王祖를 創業한 太王 李成桂의 影幀을 奉安하기 위하여 太宗  10년 (1410)에 創建되었다. 殿이라는 名稱에서 짐작할수 있듯 王朝 創始者의 影幀을 모신곳 답게 漢江 以南에서는 唯一하게 宮闕式 으로 지은 建物이다. 全州 慶基殿은 1614년 (光海君 6 年)에 全國에서 唯一하게 復原되었다. 慶事스러운 址에 지어진 慶基殿에는 朝鮮王朝實錄을 지켜낸 全州史庫와 睿宗大王胎室碑,造景墓 등이 있으며 壽齡 400年의 銀行나무와 느티나무,배룡나무,대나무,梅花나무 등이 있어 四季節 多樣한 볼거리를 提供하고 있다. 

 

 

 

하마비

(下馬碑)

至此眥下馬   雜人母得人

 

慶基殿에 들어서기전의 下馬碑다. 이곳에 이르는 자는 階級의 높고 낮음, 身分의 貴賤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慶基殿의 出入을 禁 한다는 뜻이다. 猛獸의 王 암,수사자 한쌍이 陰陽의 調和를 이루면서 慶基殿을 지키고 있다. 이 碑石에는 이 글이 새겨져 있다.

 

 

이성계

(李成桂)

 

朝鮮의 제1대 왕(1392~1398 재위 卓越한 武裝으로 高麗末 紅巾賊과 倭寇의 侵入을 擊退하는 데 크게 活躍했으며, 改革파 士類와 함께 高麗 王朝를 무너뜨리고 朝鮮을 建國했다. 本館은 全州 이름은 李成桂. 자는 仲潔, 호는 松軒. 王이 된 後 이름을 旦, 자를 君晉으로 고쳤다. 和寧:永興 出身이다. 아버지는 子春이며 어머니는 崔氏 이다. 妃는 神懿王后韓氏와 神德王后 康氏 이다.

 

 

제기고

(祭器庫)

 

祭享때 使用하는 各種 그릇,기구등을 保官하는 場所이다. 祭祀때 使用하는 그릇은 日般 그릇과 다리 정갈하고 聖스러운 物建이어서 別途의 建物에 保官하여야 하는것이다. 대개 祭器庫와 같은 建物은 바닥을 마루바닥 으로 만든다. 마루바닥은 地面과 分離되어 습기가 차지않아 器物을 保官하는데 適合하기 때문이다.

 

 

어정

(御井)

 

御井은 임금의 飮食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물을 기르는 우물을 말한다. 그리고 宗廟  社稷壇 등에서 임금이 참여하는 祭禮에 사용하는 우물도 御井이라고 한다. 太祖 李成桂 의 影幀을 모셨던 慶州의 집경전,平楊의 영숭전,全州 의 京機殿 우물도 御井 이라 하였다. 御井은 깨끗하고 聖스럽게 取扱해야 하므로 周圍에 담을 두르고 門을 設置해 두기도 한다.

 

 

마청

(馬廳)

 

京機殿의 意識이나  官廳 官理의 交通手段 으로 使用하기 위해 魔廳을 두었다. 특히 朝廷에서 參禮하기 위해 내려온 官理의 말을 두는 곳이다. 國立全州搏物館에 所長된 古地圖에는 魔廳의 그림이 없으며 以後 製作된 文化財 硏究所長 古地圖 와 慶基殿儀 規模와 沿革, 祭享을 맡은 官員의 役割과 各種 祭享節次 등을 漢字등으로 記錄한 冊에 魔廳이 나타나 있다.

 

 

용실

(春室)

 

이곳은 祭祀에 使用할 飮食을 만드는 방앗간 이다. 디딜방아와 절구를 두고 京機殿 祭禮에 使用되는 飮食을 만드는 곳으로 敬虔하고 神聖한 長所로 여기는 곳이다. 祭祀에 스는 여러가지 材料의 準備를 위하여 造果所나  典祀廳과 隣接해 있어야 하며 周邊에 불결한 施設이 없어야 한다.

 

 

조병청

(造餠廳)

 

造餠廳은 떡이나 油蜜菓  茶食등의 祭祀 飮食을 만들고 保官하는 場所이다. 國朝五禮儀에 記錄된 眞殿의 饌實圖에는 중박계,붉은산자,흰산자,다식,과일,각색떡 湯등을 使用 한다고 되어있다.

 

 

전사청

(典祀廳)

 

이 곳은 國家의 祭祀 에 쓸 祭需 準備와 祭司長 차리는 일을 擔當하는 典祀官이 事務를 行하면서 祭祀 를 準備하는 곳이다.

 

 

서재

(西齋)

 

祭祀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齋閣 이라고도 하며 祭享을 맡은 官員들의 齋戒意識을 하기위한 곳이다 齋戒意識은 祭祀를 임하기 前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神을 맞을 準備를 하는 意識이다.

 

 

동재

(東齋)

 

祭祀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齋閣 이라고도 하며 祭享을 맡은 官員들의 齋戒意識을 하기위한 곳이다 齋戒意識은 祭祀를 임하기 前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神을 맞을 準備를 하는 意識이다.

 

 

경덕헌

(慶德軒)

 

京機殿을 지키는 守門將 일을 맡아보는 곳이다. 京機殿의 守門將을 庚子年 新設하여 乙丑年 竣工 했다는 記錄이 있는 것으로 보아 慶德軒능 守門將廳에 붙어진 이름 이다.

 

 

수복청

(守僕廳)

 

京機殿의 祭祀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낮은 職級의 벼슬아치들이 있던곳이다. 살림집의 안채와 같은 形式이지만 주로 큰일이 있을때 行事를 準備하기 위해 日程期間 臨時로 居處하는 곳이다. 世祖實錄 世祖 8 年 6 日조에 의하면 全州 京機殿에 守僕의 數가 官奴 1名 良民 18 名이 交代로 지켰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볼때 守僕廳에는 恒常 몇명이 居住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訓民正音이 創製된後 한글로 엮은 最初의 冊으로 16 세기 言語의 文化를 硏究하는데 貴重한 資料다. 朝鮮王祖가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읆은노래 歌詞와 그 背景으로 構成되어 있다. 宮中宴會에서 演奏 되었으며 모두 125장이다. 集賢殿 學事인 鄭麟趾. 成三問. 朴彭年등이 刊行에 參與 하였다.

 

 

이성계사리구

(李成桂舍利具)

 

朝鮮建國 直前인 1390 ~ 1391년에 李成桂가 婦人 康氏를 비롯하여 自身의 支持層 萬여명과 함께 發源하여 奉安한 舍利具 이다. 銀製鍍金舍利塔과 白瓷발등 舍利具에 새겨진 名文을 통해 당시 李成桂 勢力의 면을 알수있다. 1932년 金剛山 月出峰의 石函束에서 發見되었다.

 

 

백자사발명문

(白磁沙鉢名文)

 

金剛山毘盧峯舍利遊記自釋尊入滅經二千四百余年 ... 今侍中李成桂万人同發誓願 拱藏金剛山侍彌勒出世奉以示人 

  

 

동궐도

(東闕圖)

 

朝鮮王祖의 여러王宮 가운데 가장크고 으뜸으로 삼은 王宮은 景福宮이며 그 別名은 北闕 이다. 昌德宮과 昌慶宮은 景福宮의 東쪽에 있다. 하여 東闕 이라 불렀다. 昌德宮은 宣祖 25 年 壬辰倭亂 때 景福宮이 불탄 以後 1867년 復元되기 까지 270 여년간 慶熙宮과 함께 보선의 代表的인 王宮이었다.

 

 

건원릉

(健元陵)

 

健元陵은 朝鮮의 太祖 李成桂 (1335 ~ 1408)의 陵 이다. 太祖는 1392 年 7 月 17 日 開京의 壽昌宮에서 王位에 올라 새 王祖를 열었다. 太祖는 7 년간 王位에 있면서 나라 이름을 朝鮮으로 定하고 都邑을 漢陽. (지금의 서울)으로 옮기는 등 朝鮮 王祖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陵의 形式은 單陵으로 屛風石을 두르고 있다. 이 陵에는 太祖의 行跡을 記錄한 神道碑가 있으며 八角長明燈,소전대 등은 高麗의 陵과 다른것들 이다. 奉墳위엔 잔듸가 아닌 얼새풀이 덮혔는데 이는 故鄕을 그리워하는  太祖를 위해 故鄕 咸興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로 奉墳을 덮은 때문으로 傳해진다.

 

 

대한 : 大韓

태조고황제건원릉 : 太祖高皇帝健元陵

 

 

신도비

(神道碑)

 

書前判漢城府事鄭矩篆額賜石璘鞍馬矩馬一匹

永樂七年四月 日 立石

 

 

이성계의호적

(李太祖戶籍原本)

國保 第131號

 

李成桂  (1335 ~ 1408 가 태어난 함경도 和寧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作成된 戶籍이다. 첫머리에 李成桂의 官職과 世系등이 記錄되었고 戶籍의 作成 經緯와 方針 30여 호의 戶籍이 차례로 실려 있다. 영흥부 濬源殿에 保官되다가 日帝强占期에 서울로 옮겨왔다.

 

 

이성계사리함

(李成桂舍利函)

 

朝鮮建國 直前인 1390 ~ 1391 年에 李成桂가 婦人 康氏를 비롯하여 自身의 支持層 千여名과 함께 協贊하여 奉獻한 舍利具이다. 金剛山에서 發見되었다.  

 

 

진충귀문서

(陳忠貴文書)

寶物 第1160號

 

太祖 4年 (1395) 功臣都監에서 陳忠貴를 開國原從功臣에 奉하면서 發給한 記錄文書인 錄券이다. 이때 任命된 原從功臣 106 名에게는 各各 논밭 30걸 奴婢 3구 와 함께 보모와 妻에게 職位를 내리고 子孫들에게는 科擧를 보지않고 벼슬에 오르는 特典을 주고 碑를 세워 功勞를 記錄할것을 明示 하였다. 

 

 

전동성당

(全動聖堂)

 

1791年 最初의 殉敎者 그리고 1801 年 辛酉迫害 때 풍남문 밖인 全動聖堂 터에서 迫害 를받고 많은 殉敎者들이 殉敎를 당한곳이다. 이들의 殉敎의 뜻을 기리고자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가 1908년 聖堂建立에 着手 1914 年에 完工됬다. 당시 日帝 統監府에 헐렸던 풍납문 城壁의 돌들을 가져다 聖堂 추춧돌로 使用했다고 한다. 또한 殉敎者들의 목을 梟首했던 現場의 돌도 추춧돌로 使用했다. 全動聖堂은 殉敎者 의 피가흐르는 땅에 세워진 聖地로 알려져 國內 天主敎 神者들이 반드시 한번은 訪問하는 巡禮의 1 番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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