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선암사
(曹溪山仙巖寺)
仙巖寺 는 湖南의 名山 曹溪山 에 자리잡은 韓國的인 절의 옛모습을 가장 잘 保存한 千年 古刹로 國內의 代表的인 名刹가운데 하나이다. 高麗선종 11년에 대각국사(大覺國師)의천(義天)이 이곳 대각암 (大覺庵)에서 수도하면서 산이름을 曹溪山 이라하고 寺院을 크게 중창함과 아울러 高麗佛敎의 여러 思想을 禪敎로 融合하여 겸수(兼修)토록 하였다.
일주문
(一柱門)
降仙樓 를지나 仙巖寺 境內로 들어서는 門으로 단층맞배 지붕의 다포식 建物이다. 이 일주문 (一柱門)은 누문(樓門)인 강선루 (降仙樓)를 지나 처음 들어서게 되는 門으로 1719년에 세워진 것이다 曹溪文 創建 上樑文 에 의하면 원래의 建物 은 火災로 인해 없어지고 1540년에 다시 세워으나 丙子胡亂으로 被害를 당하였다가 1719년에 또다시 세운것이라고 한다. 단층맞배 기와집으로 원형의 주춧돌위에 배흘림기등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사이에 3군의 공포를 배치해 넣은 多包式 建物 이다.
승선교
(昇仙橋)
寶物제 400호로 指定되였으며 길다란 花崗巖으로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連結하여 半圓形의 홍예(虹渤)를 쌓았는데, 결구솜씨가 精巧함.
구시
大雄殿 한쪽에 놓인 仙巖寺 구시는 길이가 3 m가 넘는 巨大한 木造容器 이다. 一般的으로 큰 통나무를 파서 그안에 밥을 保管하는것을 구유 도는 구시라고 하는데 만든 材質이나 地名에 따라 구시 앞에 名稱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仙巖寺 의 구시는 傳하는 말로 칡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그 材質 은 槐木으로 判斷되며 2 천인분의 밥을 保管 하였다고 傳해진다. 實際로 仙巖寺 는 아도화상이 비로암에 개창한 이래 수많은 禪僧과 강백을 排出하였으며 全國에서 僧侶와 大衆들이 모여들어 한때 仙巖寺 에 주석한 僧侶 들이 2 천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팔상전
(八相殿)
釋迦如來의 前生에서부터 涅槃에 이르기까지의 一代記를 여덟 場面의 그림으로 表現한것을 八相圖라 하고 八相圖를 모시고 釋迦如來를 기리는 佛殿을 八相殿 이라고 한다.
선암매
(仙庵梅)
仙庵梅는 圓通殿 覺皇殿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길에 50주 정도가 位置한다. 圓通殿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覺皇殿 담길의 홍매화가 天然記念物 제 488호로 指定 되었다. 文獻에 전하는 記錄이 없어 수령은 正確히 알수없으나 査察에서는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에 千佛殿 앞의 외송과 함께 심어졌다고 傳하고 있어 仙庵寺의 歷史와 함께 긴歲月을 지내왔음을 알수있다. 梅花꽃이 필때면 梅花를 보기위해 仙庵寺를 찿는다는 말이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天然記念物로 指定된 梅花나무중 生育狀態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도 선
(道仙)
統一新羅 後期에 活動한 禪僧인 석각國師 道仙의 진영은 두발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의좌상 (椅坐像)으로 오른손에는 주장자를 세워 들고있다. 옷주름의 表現이 특이한데 녹색장삼은 색의농담으로 븕은 가사의 옷주름은 먹선과 흰선을 重疊하여 表現 하고 있다.
동 종
(銅鐘)
1657년에 製作되었으며 鐘表面에 描寫된 하대의 唐草紋 菩薩입상의 사실적인 면이 生動感있게 表現되었다.
측 간
仙庵寺의 大便所 建物로 앞면 6칸인 맞배지붕이며 정(丁)자 模樣의 平面構成으로 북쪽에서 出入할수 있도록 되어있다. 入口에 들어서면 男子와 女子가 使用하는 칸이 分離되어있어 在來式 化粧室에서 보기드문 構成 을 하고 있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大雄殿 앞마당에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石塔은 같은 規模로서 樣式이 同一하다. 이 石塔은 統一新羅 時代의 典型的인 樣式을 承繼한 2중基壇의 방형 3층 石塔 으로 仙庵寺의 建立時期를 알려주는 遺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