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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歷 史 物

安東 (河回마을)

(河回마을)

 

 

重要民俗資料 제122호. 예로부터 儒林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韓國의 代表的 同族부락으로, 國寶를 비롯해 寶物·重要民俗資料·重要無形文化財 등 값진 文化遺産을 간직하고 있어 1984년 1월 民俗保存마을로 指定되었다. 東쪽은 太白山의 地脈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洛東江이 西·南·北 境界를 따라 마을 全體를 太極型으로 감싸 흐른다. 이는 風水地理的으로 山太極水太極을 이루는 吉地로 壬辰倭亂 때는 戰禍를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작천고택

(鵲泉古宅)

 

이 建物이 지어진 年代는 確實하지 않으며 처음에는 두 채였으나 1934년에 大洪水로 門間채가 쓸려 나가고 지금은 " - "자형의 안채만 남아있다. "鵲泉古宅" 이라는 이름은 류도관 (류도관 1823 ~ 1894)의 宅號 에서 따온 것이다. 한 建物인데도 사랑방가 안방사이에 작은 토담을 세워 사랑손님과 婦女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토록 한 점이 특이 하다. 이는 女性과 男性들의 空間을 區別하였던 朝鮮時代의 社會上을 그대로 보여주는 部分이다. 단출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朝鮮時代 士大夫 兩班들의 꼿꼿한 氣槪를 느끼는 듯하다.

 

충효당

(忠孝堂)

 

이 집은 西厓 柳成龍 (1542 ~ 1607)의 宗宅으로 17 세기에 지어졌다. 柳成龍은 벼슬을 마치고 歸鄕한 後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傳해지는데 그의 孫子와 第子들이 生前의 學德을 追慕하기 위해 지은것이다. "忠孝堂"은 柳成龍이 平素에 나라에 忠成하고 父母에게 孝道하라는 말을 强調한데서 由來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柳成龍의 8 대 孫人 柳相祚가 兵曹判書를 제수받고 部下 軍事를 受容하기 위해 지은것이다.

 

충효당

(忠孝堂)

보물 414호

 

이 집은 一生을 淸白하게 지나신 領議政 文忠公 西厓 柳成龍 先生게서 晩年에 豊山 西美洞 三間草屋 에서 돌아가신 後 先生을 推仰 하던 儒林의 힘을 입어 지은것인데 堂號 懇版은  許 先生이 쓰신것이다.

 

류성룡투구

(柳成龍鬪具)

 

柳成龍이 壬辰倭亂 당시 使用 했던 鬪具

 

갑 주

(甲胄)

 

柳成龍은 壬辰倭亂때 宰相으로 李舜臣 權慄등 名將을 登用하였던 文臣겸 學者이다. 柳成龍은 당시 全國에서 일어난 義兵을 官軍으로 便入하여 朝鮮軍의 戰鬪力을 높였다. 柳成龍의 種家에는 그가 直接 使用하던 遺物이 傳해지는데 이 갑옷은 壬辰倭亂 당시 使用 하던것이다.

 

양진당

(養眞堂)

 

이 집은 豊山 柳氏  大種宅으로 豊山 에 살던 柳從蕙가 河回마을에 들어와 最初로 지은 집이기에 유서가 깊다. 14세기 무렵에 지은후 壬辰倭亂 때 火災를 겪기도 하였고 여러대에 걸쳐 지어진 痕跡 이 남아있다. 大種宅 답게 雄將한 規模를 자랑하며 文衆의 모임을 이 곳 사랑채에서 가진다. 養眞堂 이라는 이름은 豊山 柳氏  族譜를 最初로 完成한 柳泳 (1687 ~ 1761의호 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懸板 立巖古宅은 柳雲龍의 아버지인 柳仲英의 號 에서 따온 것이다.

 

화경당

(和敬堂)

 

朝鮮 正祖 21년 1797에 柳師春이 사랑채,날개채,대문채를 짓고,哲宗 13년 1862에 中孫子 石號 柳道成 1823 ~ 1906이 안채,큰사랑채,祠堂을 지었다. 집의 規模가 雄將하고 대갓집의 格式을 完璧하게 갖추어 典型的인 士大夫 家屋의 面貌를 보여주고 있다. 큰사랑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아름다운 風光을 한눈에 感想할수 있다. 300여년의 歲月을 품고 서있는 큰사랑채 뒤편의 소나무는 河回마을을 굽어돌고 있는 강물의 形象을 하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 이다. 和敬堂은 화 (和)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 (敬)으로 임금을 섬긴다 는 뜻이다.

 

하회겸암정사

(河回謙菴精舍)

 

이 집은 西厓 柳成龍 (1542∼1607) 先生의 맏형인 謙菴 柳雲龍(1539∼1601) 先生이 學文 硏究와 第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것이다. 朝鮮 明宗 22년(1567)에 지었다고 하며 芙蓉臺 西쪽 높은 絶壁 위에 자리잡고 있다. 精舍(사랑채)는 河回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南쪽 絶壁 위편에 안채는 精舍 뒤쪽에 配置하였다. 精舍는 2층 樓閣 形式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크기이다. 가운데에 대청 4칸을 두고 左右로는 房을 두었다. 房 앞쪽으로 좁은 퇴를 마련하였으며 ‘謙菴亭’이라고 쓴 懸板은 스승인 李滉 先生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는 'ㄱ'자형 平面을 이루고 있고, 大廳을 中心으로 왼쪽에 부엌 2칸과 안방 2칸, 오른쪽에 건넌방 2칸을 두었다. 안방과 건넌방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마련해 놓았다. 짚을 이어 올린 헛간채는 안채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 絶壁 아래 굽이도는 강줄기, 自然이 어울려진 眞風景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精舍다운 地形 要建과 全通이 배어 있어 귀한 資料가 되고 있다.

 

빈연정사

(賓淵精舍)

 

이 精舍는 謙菴  柳雲龍이 官職을 辭退한後 宣祖 16 年 1583 년에 書材로 쓰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살림집인 養眞堂 근처에 지었는데 1914년에 風南初等學敎를 開敎하면서 이 位置로 精舍를 옮겨 養眞堂과는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 이 精舍의 이름은 芙蓉臺 絶壁 아래의 賓淵이라 부른데서 由來하였다. 지금의 形象으로는 짐작할 길이 없으나 柳雲龍은 精舍에 작은 연못을 파고 연꽃도 길렀다고 한다. 

 

부용대

(芙蓉臺)

 

芙蓉臺의 芙蓉은 연꽃을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芙蓉臺는 “연꽃”즉 芙蓉을 내려다보는 展望臺이다, 芙蓉臺에 올라 河回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을은 물위에 떠오른 한 송이 연꽃으로 보인다 하여, 蓮花부수형의 마을이라 한다.  버들가지 기지개 켜는 봄이 오면 河回마을 芙蓉臺 앞에는 나룻배가 運行된다. 河回마을 芙蓉臺 앞에서 나룻배를 타면 江을 건너 芙蓉臺에 오를 수 있다. 屛風처럼 펼쳐진 絶壁 앞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면 반대편에서 긴 막대로 배를 저으며 다가오는 沙工을 만난다.  沙工이 건네는 구수한 사투리는 깍아세운 듯 한 絶壁위에 부딪쳤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되어 들리고 흐르는 洛東江 물은 숨을 죽이며 맴돌아 흐를 때, 물속의 물고기들이 숨바꼭질 하듯 모래 속에 몸을 숨길 때면 구멍조끼를 입고 배에 몸을 싣고 뱃전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芙蓉臺 絶壁을 바라본다.

 

부용지애

(芙蓉之愛)

 

야간 公演 寫眞을 못 찍었읍니다. 그냥 구경만 했읍니다. 民泊 집에 旅裝을 풀고 저녁을 먹고 뚝방길을 걷는데 이 公演을 하는거에요 카메라를 챙기지 못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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