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1/王 宮

(18)
景福宮 경복궁 (景福宮) 史蹟 제117호. 現在 서울에 있는 朝鮮時代 5代 宮闕 中 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北쪽에 자리하고 있어 北闕로도 불린다. 朝鮮王朝를 연 太祖 李成桂가 漢陽으로 都邑을 定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景福宮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太祖 3) 12월 4일 始作된 이 工事는 이듬해 9월 重要한 殿閣이 大部分 完工되었다. 宮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王朝의 큰 福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宮闕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王들이 머문 期間은 1405년(太宗 5) 지어진 一種의 別宮인 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世宗·文宗·端宗이 이곳에 주로 起居했으며, 王子의 亂으로 인한 開城遷都 기간 동안 빈 宮闕이었다. 王위를 簒奪한 世祖..
華城行宮 세계문화유산 (世界文化遺産) 화 성 (華 城) 華城은 正祖大王 在位 13 년만인 1789년 10월 7일 아버지인 思悼世子의 園寢을 지금의 華城市 泰安邑 安寧里 花山으로 옮기고 그곳에 있던 官衙와 民家를 지금의 水原市 中心部에 있는 八達山 東쪽 기슭으로 옮겼다. 이후 1793년 水源 都護府가 華城 留守府로 昇格되었고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華城이 築造되었다. 華城의 規模는 둘레가 약 5,74 km 城壁 높이 5 m가량이며 여장이 높이는 약 1,2 m이다. 華城 城役은 正祖의 思悼世子에 대한 孝心에서 出發한 것이지만 당시 社會 모든 分野에서 正祖大王을 頂點으로 官僚. 學者. 技術者.白性들이 함께 만든 近代的 新都市이며 實學의 總體的 結定體이다. 華城은 丁若鏞의 基本設計書인 城設 에 基礎하여 ..
景福宮夜景2 경복궁 (景福宮夜景) 史蹟 제117호. 現在 서울에 있는 朝鮮時代 5代 宮闕 中 正宮에 該當하는 것으로 北쪽에 자리하고 있어 北闕로도 불린다. 朝鮮王朝를 연 太祖 李成桂가 漢陽으로 都邑을 定하고 가장 먼저한 일중의 하나가 景福宮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太祖 3) 12월 4일 始作된 이 工事는 이듬해 9월 重要한 殿閣이 大部分 完工되었다. 宮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王朝의 큰 福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宮闕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王들이 머문 其間은 1405년(太宗 5) 지어진 一種의 別宮인 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世宗·文宗·端宗이 이곳에 주로 起居했으며, 王子의 亂으로 인한 開城遷都 기간 동안 빈 宮闕이었다. 王위를 簒奪한 世祖..
景福宮(夜景) 경복궁 (景福宮夜景) 史蹟 제117호. 現在 서울에 있는 朝鮮時代 5代 宮闕 中 正宮에 該當하는 것으로 北쪽에 자리하고 있어 北闕로도 불린다. 朝鮮王朝를 연 太祖 李成桂가 漢陽으로 都邑을 定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景福宮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太祖 3) 12월 4일 始作된 이 工事는 이듬해 9월 重要한 殿閣이 大部分 完工되었다. 宮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王朝의 큰 福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宮闕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王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太宗 5) 지어진 一種의 別宮인 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世宗·文宗·端宗이 이곳에 주로 起居했으며, 王子의 亂으로 인한 開城遷都 기간 동안 빈 宮闕이었다. 王위를 簒奪한 ..
慶熙宮 경희궁 (慶熙宮) 慶熙宮은 朝鮮後期 이궁(離宮)이었다. 1617년(光海君 9)부터 짓기시작하여 1623년 (光海君 15)에 完成 하였다. 慶熙宮의 처음 名稱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元宗의 諡號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00년 (英祖 36) 慶熙宮으로 바뀌었다. 慶熙宮은 都成의 西쪽에 있다하여 서궐(西闕)아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昌德宮과 昌慶宮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對比되는 別稱이다. 仁祖 以後 鐵宗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처 임금들이 慶熙宮에 머물렀는데 특히 英祖는 치세의 折半을 이곳에서 보냈다. 慶熙宮에는 正殿인 崇政殿을 비롯하여 便殿인 資政殿 寢殿인 隆福殿,會祥殿 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建物이 있었다. 그러나 日帝가 大韓帝國을 强占하면서 慶熙宮은 受難의 歷史를 맞이..
昌慶宮 창경궁 (昌慶宮) 朝鮮時代 宮闕로 太宗이 거처하던 壽康宮址에 지어진 建物이다. 成宗 14年(1483)에 貞熹王后, 昭惠王后, 安順王后를 위해 昌慶宮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建物은 明政殿,·文政殿의 正殿과 壽寧殿,·歡慶殿,·景春殿,·仁陽殿,·通明殿들의 寢殿이 있었으며, 養和堂·,麗暉堂·,思政閣 들이 있었다. 朝鮮時代의 宮闕中에서는 唯一하게 東쪽을 向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使用되지 않다가 壬辰倭亂 때에 京福宮·昌德宮과 함께 불에 탄 以後, 昌德宮과 같이 다시 지어져 朝鮮王祖 歷史의 中心 舞臺가 되었다. 肅宗의 사랑을 받던 張禧嬪이 仁顯王后를 毒殺하려는 못된 行動을 저지르다가 處刑을 당했는데, 당시 禧嬪은 주로 就善堂에서 生活하였다. 또한 英祖는 아들인 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
昌德宮 창덕궁 (昌德宮) 朝鮮時代 宮闕 가운데 하나로 太宗 5年(1405)에 세워졌다. 당시 宗廟·社稷과 더불어 正宮인 京福宮이 있었으므로, 이 宮은 하나의 別宮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京福宮에서 주로 政治를 하고 百姓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利用되지 않은 듯 하다. 壬辰倭亂 以後 京福宮·昌慶宮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第一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朝鮮王祖의 가장 中心이 되는 正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火災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元來의 宮闕 規模를 잃지 않고 維持되었다. 임금과 臣下들이 政事를 돌보던 外殿과 王과 王妃의 生活空間인 內殿, 그리고 休息空間인 後園으로 나누어진다. 內殿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後園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丁字들이 마련되어 自然景觀..
德壽宮 덕수궁 (德壽宮) 大韓帝國의 正宮이었던 德壽宮은 史蹟 제124호. 朝鮮의 5대 宮闕 중에서 가장 規模가 작은 것으로 朝鮮末 高宗이 살던 곳이다. 宮闕의 자리는 원래 成宗의 兄인 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先祖가 壬辰倭亂 직후 臨時 居處로 使用하면서 行宮이 되었다. 光海君은 이곳에서 卽位한 뒤 1611년 10월 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15년(光海君 7) 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宮闕이 되었으며 1618년 仁穆大妃가 이곳에 幽閉되면서 西宮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昌德宮으로 居處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宮闕이 되었다. 1896년 俄館播遷으로 王太后와 王太子妃가 이곳으로 옮겨와 生活했으며 1897년 高宗이 러시아 領事館에서 이곳으로 居處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宮闕建物의 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