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戰爭記念館)
주한미대사보고전문
오늘 새벽 4시에 北韓軍 兵力이 事前에 宣戰布告 없이 38도線을 따라 韓國의 몇몇 防禦陣地를 侵入 하였읍니다. 現在 38도線을 따라 몇몇 場所에서 戰鬪가 벌어지고 있읍니다. 韓國의 防禦軍은 北韓軍의 攻擊에 맞설 準備가 되어 있읍니다. 韓國政府와 聯合軍 兩側은 沈着하고 能爛하게 作戰位置에 대한 調定에 들어갔읍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警告發令을 내릴 理由가 없읍니다. 아직은 北韓 共産軍이 全面的인 戰爭을 敢行할 없는지에 대한 判斷을 내리기가 힘든 事項입니다. 現 狀況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倒着하는데로 定期的으로 放送을 내보내겠읍니다. 라디오 周波數를 VTF 에 固定해 주십시오 在外 公館員들은 必要이상의 旅行을 可能한 줄이라는 指示를 받았읍니다 大使館은 除外公館들에게 狀況이 把握되기 前까지는 집에 머무르거나 現 位置를 維持하라는 指示를 내렸읍니다. 本 라디오 다음 放送은 午後 3時에 있읍니다.
피난민주거생활
(避難民住居生活)
피난민 (避難民)들은 판자 (板子)조각.종이상자.가마니.볏집.깡통.천막 (天幕)등으로 집을 지어 살았으며 또는 다리밑에 天幕을 치거나 산기슭 언덕에 굴 (窟)을 파고 비바람을과 추위(寒冷)를 피 (避)했다.
시장풍경
(市場風景)
전쟁 (戰爭)으로 生活이 어려워 남녀노소 (南女老少)모두가 생활전선 (生活前線)에 나섰다. 시장 (市場)에서는 껌을 팔거나 구걸 (求乞)하는 어린이 상이용사 (傷痍勇士) 지게꾼 등을 흔히볼수 있다.
전시교육
(戰時敎育)
戰爭期間 中에도 우리國民들이 敎育에 대한 熱氣는 식을줄 몰랐다 子女의 敎育을 위해서는 어떠한 犧牲과 代價를 치러도 좋다는 父母들은 늘어만 갔으며 子女들 스스로도 敎育을 通하여 貧困으로부터 脫皮하려는 意志가 높아만 갔다. 이같은 國民的인 敎育熱은 오늘날 우리 大韓民國이 近代化되는 科程에서 대단히 重要하고도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전사통지서
(戰死通知書)
군 (軍) 에간 남편 (男便)의 전사통지서 (戰死通知書)를 받고 통곡 (慟哭)하는 여인 옆에 어린딸이 영문도 모른채 따라 울고 있다.
피난행열
(避難行烈)
1.4 後退 中共軍의 戰爭介入으로 南쪽이나 北쪽 人民들이 自由를 찿아 南쪽으로 避難
U.N기념공원
(國聯紀念公園)
戰爭 初期의 유엔군 戰死者 들의 遺骸는 開城 仁川,大田,大邱,密陽,馬山 등지에 安葬되었고 1951년 1월 18일 釜山市 大宴洞으로 統合 移葬 되었다. 休戰後 1955년 11월 17일 大韓民國 國會는 유엔군의 高貴한 犧牲을 記念하기 위하여 專用墓地의 設置를 결의 하였고 1959년 11월 6일 유엔과 大韓民國 사이에 記念墓地 設置를 위한 定式協定이 締結되었다. 유엔은 1960년 3월 31일부터 43,600평의 墓地를 管理하여 왓으며 1974년 2월 16일 以後 現在까지는 이곳에 安葬된 戰死者들이 出身國으로 構成된 在韓國 國際聯合記念公園管理處 에서 管理해 오고 있다.
눈물방울
6.25 戰爭 당시 戰死한 韓國軍과 유엔參戰國 將兵들의 認識標 1,300여개를 素材로 尊敬과 追募의 마음을 눈물방울로 形象化했다. 가시鐵絲는 戰爭의 恐怖와 悲劇,抑壓 그리고 危險性을 象徵하며 아랫부분의 모래에 그려져 있는 原型은 방울의 波動을 意味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