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大祚榮)
王號는 고왕(高王).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그러나 그의 家系나 高句麗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社會的 地位에 대해서는 記錄이 一致하지 않는다. 〈구당서 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그를 高句麗人의 別種이라고 했고, 〈신당서 新唐書〉 渤海展에는 元來 속말말갈(粟末靺鞨)의 族屬인데 나중에 高句麗에 附屬되었다고 했으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渤海考〉를 비롯한 우리의 仙人들은 모두 그를 高句麗人으로 보고 있다.
안시성
(安市城)
水나라 에 이어 中國을 統一한 唐나라는 숙적(宿敵)인 高句麗의 征伐에 나섰다.이세적(李世勣) 장량(張亮) 등이 指揮하는 唐의 大軍은 寶藏王 4년(645년) 봄 요수(遼水)를 건너 玄道城에 이르렀다. 高句麗는 이 一帶의 城을 굳게 지키며 對抗했으나, 唐은 개모성(蓋牟城)· 卑辭省.遼東省.白巖城 등을 占領하고 安市城을 攻擊하여 왔다. 양쪽은 온갖 戰略으로 攻防戰을 繼續했다. 高句麗 軍隊의 史記는 날로 올라가고 勇敢無雙해졌으나, 唐나라 軍隊는 軍糧이 떨어지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軍隊를 돌려 돌아갔다. 한편 安市城 戰鬪를 勝利로 이끈 安市城主의 이름은 정사에 나와있지 않다. 따라서 安市城主가 양만춘이었는지는 確實하지 않다. 다만 朝鮮時代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朴趾源의 《 熱河日記》에는 安市城 城主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광개토왕릉비
(廣開土王陵碑)
高句麗의 首都였던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지안 현 퉁거우)의 東쪽인 국강상(國岡上)에 있는 廣開土王릉 東쪽편에 세워졌다. '국강상廣開土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廣開土王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好太王妃'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