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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高句麗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고구려

(高句麗)

 

 

高句麗는 鴨綠江 流域에서 일어나 점차 周邊地域을 아우르면서 三國중 가장먼저 古代國家 體制를 갖추었다.  313 년 平壤地域의  樂浪軍을 몰아내고 北으로는 中國 랴오허 강 에서  지린성 쑹화강에 이르고 南으로는 韓半島 中部까지 領域을 넓혀 東Asia의 强者가 되었다.  高句麗는  固有文化를 維持하면서도 中國과 西域 北方의 外來文化를 積極的으로 받아들여 力動的이고 實用的인 文化를 만들어 냈다. 高句麗 文化의 國際性과 先進性은 天文, 地理, 文化, 音樂, 舞踊, 工藝,등 여러 分野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高句麗 文化의 特長은 滿洲의 환런 지안 一帶와 平壤등 高句麗 옛 都邑地를 中心으로 남아있는 城 무덤 宮闕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出土된 土器 鐵器 꾸미개 등의 遺物에 잘나타내고 있다. 高句麗 文化는 百濟, 新羅, 伽倻와 바다건너 倭(日本)에도 影響을 미쳤으며 統一新羅와 渤海로 이어진다.

 

 

 

고구려 무기

高句麗 武器

 

뛰어난 騎馬 戰術을 바탕으로 한 高句麗의 强力한 軍事力은 國家 成長의 重要한 動力 이었다. 高句麗의 武器는 활, 창, 칼, 도끼, 쇠뇌, 등의 攻擊用과 갑옷, 鬪狗, 防牌, 등의 防禦用이 있다. 騎兵은 주로 긴 창과 활을 使用하였는데 貊弓이라 불린 高句麗의 활은 길이가 짧은 角弓 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使用 하기에 適合 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 안악 3호 무덤의 行列圖에는 창과 도끼를 들거나 칼을 맨 步兵들이 登場 한다. 

 

 

말탄 사람을 그린벽화조각

(騎馬人物圖壁畵片)

 

1913 년 平安南道 南浦市 雙楹塚의  널길에 그려진 壁畵의 一部 이다.  壁畵속 人物은 折風이라 부르는 고깔에 새 깃을 꽃아 꾸민 鳥羽冠을 쓰고 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의 모습에서 당시 高句麗人의 옷치장과 말갖춤을 엿 볼수 있다.

 

 

고구려 금동관

(高句麗金銅冠)

 

出土 사람들은 身分에 따라 다른 模樣의 冠을 着用 하였다. 高句麗 의 官人은 折風 이나 蘇骨 이라 불리는 고깔 模樣의 冠에 새깃 2 개를 꽂고 金테나 銀테를 섞어 들렀다.  지지안 일때에서 出土된 高句麗의 金銅冠 꾸미개는 두껍게 鍍金된 狀態로 대개 세움粧飾 가장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꼬아 새의 깃털처럼 表現하고 세잎무늬(三葉文) 등을 맞새김해 粧飾 하였다. 개마총 壁畵에 登場하는 人物이 쓰고 있는 冠 꾸미개의 形態가 이와 비슷하다. 이런 高句麗의 冠과 꾸미개는 金, 銀製 귀걸이와 허리띠 粧飾 金銅신발등과 함께 古代國家 支配 階層의 身分과 權威를 나타내는 象徵物 이었다. 

 

 

고구려의 말갖춤

(高句麗馬具)

 

말갖춤은 말을 부리기 위한 재갈과 고삐, 말 위에서 몸의 安定을 돕는 鞍裝과 발걸이 말을 粧飾하기 위한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金屬製 재갈과 견고한 材質의 鞍裝, 발걸이는  騎兵의 戰鬪力을 크게 向上 시켰다. 高句麗는 古代 東Asia에서 驥乘用 말갖춤의 確立과 擴散에 큰 役割을 하였다. 

 

 

호우 글자가있는 청동그릇

壺杅銘靑銅盒

 

慶州 壺杅塚에서 出土된 高句麗 靑銅 그릇이다.  바닥에 廣開土大王陵碑와 같은 글자체의 글이 돋을 새김 되어 있다. 을묘년은 廣開土大王의 葬禮를 치른 다음해 (415)이다. 따라서 大王을 葬事 지낸 1 년뒤에 高句麗에서 만들어진 이 그릇을 新羅 使臣이 가져온 것으로 推定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