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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文化&樹木園

茶山文化館

(茶山文化館)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學文과 思想을 繼承하여 朝鮮 後期 實學을 集大成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主張하면서 胄子 性理學의 空理空談을 排擊하고 封建制度의 各種 弊害를 改革하려는 進步的인 社會改革案을 提示했다. 本官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京畿道 光州市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茶山의 生涯와 學文課程은 1801년(純祖 1) 辛酉邪獄에 따른 流配를 前後로 크게 두 始期로 區分되며 그의 社會改革 思想 역시 이에 對應되어 나타난다.

 

 

 

정약용

(丁若鏞)

 

정약용(丁若鏞,  1762년 陰曆 6월 16일, 京畿道 光州 ~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朝鮮正祖 때의 文臣이며, 實學者·著述家·詩人.哲學者.科學者.工學者이다. 本官은 羅州.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天主敎 校名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重農主義 實學者로 專制 改革을 主張하며  朝鮮 實學을 集大成하였고, 水原.華城 建築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儒敎 慶典에 대한 새로운 解釋을 통해 당대 朝鮮을 支配한 朱子學的 世界觀에 대한 根本的인 反省을 視度하였다. 文集으로 流配 生活 중 大部分이 著述된 《餘裕堂典書》가 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

 

48권 16책. 筆寫本. 全羅道 康津에서 歸養살이를 하다가 해배(解配)되던 해인 1818년(純祖 18)에 完成한 것으로, 우리나라와 中國의 歷史書를 비롯해 자(子)·집(集) 등에서 치민(治民)과 관련된 資料를 뽑아 收錄함으로써 地方官理들의 弊害를 除法하고 地方行政을 刷新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권16~29에 실려 있다. 丁若鏞은 어려서부터 父親의 임지(任地)를 따라다니면서 百姓을 다스리는 것을 익혔고, 그후 금정찰방(金井察訪)과 谷山郡守로서 직접 百姓을 다스렸으며 18년 동안의 康津 歸養살이를 通해 百姓이 國家 勸力과 管理의 橫暴에 도저히 배겨내지 못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背景으로 〈牧民心書〉가 著述되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

 

朝鮮後期 代表的 싫가자인 丁若鏞 (1762 ~ 1836)이 全羅南道 康津에서 流配生活을 하는 동안에 著述한 것으로 流配가 끝나는 해인 1818년 完成되었다. 牧民 이란 百姓을 다스려 기른다는 뜻으로 地方官이 지켜야할 道理를 論하고 있다.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與猶堂은 著者의 당호이다. 1934~38년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외현손 김성진이 編輯하고 鄭寅普·安在鴻이 교열에 參加해 活字本 154권 76책으로 刊行되었다. 信條선사판 〈與猶堂全書〉를 底本으로 해서 1962년 文獻編纂委員會가 茶山年報를 添加해 〈정茶山全書〉라는 題名으로 影印本을 냈고, 1970년엔 京仁文化史가 〈與猶堂全書保維〉 5책을 追加해 影印本을 出刊했다. 典書의 體制는 內容에 따라 7집으로 分流되었는데, 1집은 詩文集으로 25권 12책, 2집은 경집(經集)으로 48권 24책, 3집은 예집(禮集)으로 24권 12책, 4집은 악집(樂集)으로 4권 2책, 5집은 정법집(政法集)으로 39권 19책, 6집은 地理集으로 8권 4책, 7집은 醫學集으로 6권 3책이다.

 

 

여유당

(與猶堂)

 

生家 與猶堂은 1925년 乙丑年 大洪水로 流失되었던것을 1986년 復元한 것으로 집앞으로 내 (川)가 흐르고 집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地形에 자리 잡고 있어 先生은 수각 (水閣)이라고도 表現 하였다. 당호 (堂號)인 여유 (與猶)는 先生이 1800년 (正祖 24년)봄에 모든官職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故鄕으로 돌아와서 지은것으로 여유당기 (與猶堂記)를 通하여 記錄하였다.

 

 

마재

(馬峴)

 

茶山 丁若鏞은 1762년 마재에서 태어나 15년을 살았다. 已後 成均館 儒生時節과 過擧에 及第하여 官職에 있을때에도 마재마을을 수시로 다녔다. 正祖가 돌아가신 後인 1801년 康津으로 流配되어 돌아온후 또 18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마재(馬峴)라는 地名은 壬辰倭亂 때 外寇들이 山의 定氣를 누르기 위해 山頂上에 묻었던 武쇠로 만들었다는 철마(鐵馬)에서 由來한다.

 

 

문도사

(文度祠)

 

丁若鏞 先生의 學文과 精神을 기리고 追慕하기 위하여 그 詩號를 따서 세운 祠堂이다. 다산은 1910년 7월 18일에 正憲大夫 奎章閣 提學으로  추증(追贈)되었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를 받았다.  문도는 學文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하고 마음을 능히 의리로서 제어함을 도 (度)라고 한다는 뜻이다.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

 

丁若鏞은 억울하게 流配生活을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學文에 힘써 業績을  남기는 등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 묘지명 (墓誌銘)이란 죽은이에 대해 간략히 一生을 整理해 밝히는 것으로 대게 가까운 親知가 쓰게된다. 그런데 丁若鏞은  스스로 썼다. 그래서 자찬 (自撰) 묘지명이다. 自讚墓誌銘은 結局 一種의 自敍傳인 셈이다. 自身의 삶에 대하여 잘모르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意圖를 엿볼수 있다.

 

 

 

 

 

(茶山記念館)

 

거중기

(擧重器)

 

거중기(擧重器)는 水原 華城을 쌓을 때 쓰인 複合 도르래이다. 丁若鏞에 의해 考案되었다고 하며 華城城役儀軌에 設計圖가 실려 있다. 丁若鏞이 考案한 機械로 1792년 水原 華城을 쌓는데 利用되었다. 도르래의 原理를 利用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物件을 들어 올리는 裝置이다. 丁若鏞은 正租가 中國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冊을 參考하여 擧重機를 開發하였다. 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連結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物體를 달아매고,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連結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連結된 끈을 通해 물체가 위로 들어올려지도록 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完全히 組立된 모습의 全體 그림과 각 부분을 分解한 그림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水原城(華城) 工事를 위해 製作한 기구의 種類, 數量이 나와있는데, 擧重機는 1대가 使用되었으며 王室에서 直接 製作하여 工事現場에 내려보냈다고 한다.

 

 

녹 로

(轆轤)

 

轆轤는 土木이나 建築工事에서 도르래와 물레 하나씩을 利用하여 무거운 物件을 들어올리는데 쓰이던 機構의 一種이다. 朝鮮後期 (19세기)에 城을 쌓거나 큰 집을 지을때 使用하였다. 角木으로 네모난 틀을 만들고 틀의 앞족으로 긴 지주 (支柱)구싱을 하는 간목 (竿木)둘을 비스듬히 세운 다음 간목 꼭대기에는 滑車를 달고 나무틀의 뒤족에는 얼레를 設置하여 동아줄을 얼레와 활차에 連結하고 줄의 반대쪽에 物件을 달아맨뒤 얼래를 돌려 줄을 감으면서 物件을 들어올리도록 한것으로 1796년 (正祖 20년)華城 (水原城)城郭을 쌓을때에 두 틀을 만들어 使用하였다.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完全히 造粒된 모습의 全體 그림과 各部分을 그림이 실려있다.

 

 

다산초당

(茶山艸堂)

 

당대 最高의 學者였던 秋史 金正喜 先生이 全南 康津의 茶山草堂에 流配중인 茶山先生을 찿아와 머물면서 가르침을 받고 돌아갔다는 因緣을 따져 茶山先生의 弟子들이 秋史의 親筆을 模刻한 懸板이다. 즉과도인 이라는 觀智로 보아 과천시절에 쓴 작품(解書)으로 보여진다.

 

 

다산동암

(茶山東庵)

 

茶山草堂의 東쪽과 西쪽에는  동암 (東庵)과 서암 (西庵)이 있는데 東庵은 茶山先生이 居處하면서 著述하시던 곳이며 西庵은 주로 18명의 弟子들이 寄居하면서 工夫하던 곳이다. 茶山東庵의 현판은 茶山先生이 戊辰年 봄 茶山에 옮겨 대 를 쌓고 못을 파서 花木을 심고 물을 글어들여 비류폭포 (飛流瀑布)를 만들고 東庵과 西庵을 修理하여 손수 懸板하신 글씨체로 곧고 우뚝한 그시체가 茶山의 性品을 잘나타내고 있다.

 

 

보정산방

(寶丁山房)

 

秋史 金正喜 先生이 茶山先生을 찿아와 머물러 배우면서 茶山 先生의 높은 學識과 思想을 尊敬하고 思慕하여 直接쓴 글씨로 中國 옹방강이 蘇東坡를 좋아해서 보소 (寶蘇)라는 堂號를 썼듯이 丁若鏞 先生을 보배롭게 여긴다 는 뜻이며 茶山東庵에 걸려 있다. 글씨는 전혀 멋을 부리지 않으면서도 全體的인 區都가 빈틈없이 짜여져 있고 茶山先生을 尊敬하는 秋史 金正喜 先生의 무한한 뜻이 배어있는 全書體서 名筆로 評價되고 있다.

 

 

관어재

(觀漁齋)

 

茶山草堂의 回廊을 돌아 오른쪽 연못이 보이는 곳의 문위에 걸려있는 懸板으로 茶山 先生의 글씨를 模刻한 것이며 茶山先生이 草堂에 붙은 문을 열고 바로 앞 연못속에서 노닐던 물고기를 바라보다 라는 뜻이다.

 

 

다성각

(茶星閣)

 

18명의 弟子가 머물며 工夫하던 서암 (西庵)을 말하며 이곳에 걸린 懸板은 秋史體를 模刻한 것으로 차 (茶)를 벗하며 밤 늧도록 學問을 탐구 (探究)한다는 뜻이다.

 

 

조형물

(造形物)

 

茶山 丁若鏞先生께서 著述한 약 500여권에 이르는 書冊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實學者思想의 精神을 造型物로 形象化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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