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年의古都慶州訪門
내연산보경사
(內延山寶鏡寺)
大韓佛敎曹溪宗 제11교구의 本寺인 佛國寺의 末寺이다. 四溟大師의 〈금당기문 金堂記文〉에 의하면 서역승 마등(摩謄)과 법란(法蘭)이 中國에 가져온 팔면경(八面鏡)을 弟子인 일조선사(日照禪師)가 黃海를 건너 海東 땅에 가져와 終南山 아래에 있는 연못 속에 묻고 메운 다음 절을 지어 寶鏡寺라고 했다 한다. 745년(景德王 4)에는 철민(哲敏)이 重創하고, 1214년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僧房 4동과 正門 등을 重修했다. 1677년에는 도인(道仁)이 重創을 始作하여 三尊佛像과 靈山殿의 喉佛撑畵를 製作했다. 1725년(英祖 1)에는 성희(性熙)와 관신(寬信)이 冥府殿을 移建했다. 現存 唐虞로는 大雄殿·大寂光殿·靈山殿·八相殿·冥府殿·山神閣·天王門·一周門 등이 있다. 重要文化財로는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보물 제252호)와 寶鏡寺浮屠(寶物 제430호)가 있으며, 이밖에 11기의 浮屠가 있다.
보경사
(寶鏡寺)
大韓佛敎曹溪宗 제11교구의 本寺인 佛國寺의 末寺이다. 四溟大師의 〈금당기문 金堂記文〉에 의하면 서역승 마등(摩謄)과 법란(法蘭)이 中國에 가져온 팔면경(八面鏡)을 弟子인 일조선사(日照禪師)가 黃海를 건너 海東 땅에 가져와 終南山 아래에 있는 연못 속에 묻고 메운 다음 절을 지어 寶鏡寺라고 했다 한다. 745년(景德王 4)에는 철민(哲敏)이 重創하고, 1214년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僧房 4동과 正門 등을 重修했다. 1677년에는 도인(道仁)이 重創을 始作하여 三尊佛像과 靈山殿의 喉佛撑畵를 製作했다. 1725년(英祖 1)에는 성희(性熙)와 관신(寬信)이 冥府殿을 移建했다. 現存 唐虞로는 大雄殿·大寂光殿·靈山殿·八相殿·冥府殿·山神閣·天王門·一周門 등이 있다. 重要文化財로는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보물 제252호)와 寶鏡寺浮屠(寶物 제430호)가 있으며, 이밖에 11기의 浮屠가 있다.
천왕문
(天王門)
寺刹의 門. 一周門 다음에 있다. 一周門을 지나 깨달음을 渴求하며 길을 가는 求道者에게 다다라야할 부처의 世界는 눈에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가야할 길만이 앞에 놓인 狀況 앞에서 求道者들은 쉽게 葛藤을 겪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천왕문(天王門)이다. 天王門에 있는 四天王은 이곳에서 求道者들을 맞이한다. 이들은 그 길을 지키면서 힘겨워하는 衆生들에게 다시 한번 精進을 위한 覺醒의 契機를 마련해 주고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煩惱를 떨쳐내도록 무서운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淸淨道場인 寺刹을 잡스런 것들이 接近하지 못하도록 막고 神性한 佛法을 지키는 役割을 擔當하기도 한다. 天王門은 金剛力士와 더불어 佛法을 守護하는 외호신(外護神)인 四天王을 모신 全閣이다. 外護神이란 佛國征討의 外廓을 맡아 지키는 神이라는 뜻이며, 東, 西, 南, 北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를 사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金剛力士가 守護의 意味를 가진다면 四天王은 여기에 더하여 人間을 보살피고 萬物을 所生시키며 福樂을 나누어주는 役割까지 擔當한다. 方位에 따라 靑, 白, 赤, 黑의 얼굴색을 가지고 있는 四天王은 佛敎에서 말하는 서른 세 개의 하늘 중 욕계 여섯 번째 하늘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支配者이다.
적광전
(寂光殿)
이 建物은 주존(主尊)인 비로자나불(毘盧子那佛)과 左右에 문수보살(文殊普薩)과 보현보살(普賢普薩)의 삼존불(三尊佛)을 모신 적광전(寂光殿)으로 創建年代는 알수없고 1678년 肅宗 3년에 重建한 것이며 그 후 몇차례 중수(重修)가 있었다. 정면(正面)3칸 측면(側面)2칸의 5량(樑) 가다포(架多包)집으로 朝鮮中期 寺刹建築의 特徵을 比較的 잘 間直하고 있다. 寶鏡寺 境內의 現存 建物 가운데서는 가장 오래된것이며 특히 주출돌형이 청옥(靑玉)으로 만들져 있다.
대웅전
(大雄殿)
이 建物은 조선 숙종(肅宗) 3년 (1678)에 새로 지었고 그 후 몇차례 補修하였다. 現在의 建物에는 1932년의 大大的인 중수(重修)에 의한 樣式的 特徵이 주로남아 있다. 正面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앞으칸은 통칸으로 處理하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基壇은 花崗石으로 된 長臺石을 3단으로 쌓고 가장자리로 덮개돌을 둘럿으며 윗쪽면은 1978년에 벽돌을 깔아 고친 것이다. 부처를 모신 불단(佛壇)은 고주에 의지하여 設置하고 三尊佛像을 모셨으며 上部에는 낙얀으로 華櫚하게 장식한 보개(寶盖) 를 設置 하였다.
팔상전
(八相殿)
八相殿은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일대생애(一代生涯)를 시기적으로 여덟가지로 나누어 그것을 팔폭화면(八幅畵面)으로 그려 모신 전각(殿閣)이다. 이 八相殿에는 釋迦牟尼佛을 가운데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왼쪽에는 미륵보살(彌勒普薩)바른쪽에는 제화가라보살(提華가羅普薩)을 모시고 양주변(兩周邊)에 팔상탱화(八相撑畵)를 配列하였다. 이 全閣은 朝鮮肅宗 3 년 (1618년)에 지총(志聰)스님이 화주하여 세웠다.
산령각
(山靈閣)
山靈閣은 內延山 山神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山神을 奉安한 全閣인데 山神은 寶鏡寺 境內를 守護하고 불법(佛法)과 선행(善行)을 行하는 사람을 守護하는 선신(善神)이다. 이 全閣은 元來 여기서 北쪽 으로 100 m 산록(山麓)에 있던 것을 1914년 現 場所로 이건(移建)하였다.
원진각
(圓眞閣)
이 全閣은 당사(堂寺)창건주 지명법사(智明法師)의 영탱(영탱)과 圓眞國師의 등상(等像)을 모시고 그밖에 瑞山 四溟大師와 당사에서 修道와 敎化를 하시다가 입적(入寂)하신 대덕(大德)스님들의 진영 (眞影)을 모신 全閣이다. 이 全閣의 建立은 朝鮮 肅宗 3년에 학열(學悅)스님이 화주하여 세웠다.
원진국사비
(圓眞國師碑)
이 비는 高麗 고종(高宗) 11년 (1224)에 만들어진 圓眞國師承逈(承逈 1187 ` 1221)의 塔 碑이다 그는 俗姓 이 신씨(申氏)이며 자는 영희(永廻)로 희양산(曦陽山)봉암사(鳳巖寺) 동순사(洞純寺)에게 나아가 僧侶가 되었고 금산사(金山寺) 계단(戒檀)으로부터 具足戒를 받았으며 승과(僧科)에서 상상품(上上品)으로 合格 하였다. 그후 지눌(知訥)로부터 佛法을 배웠고 고종 2 년 (1215)대선사(大禪師)에 任命되어 寶鏡寺에 머물렀다. 그는 능엄경에 능하였으며 世上을 떠난 後에 국사(國師)로 追增 되었다. 塔의 크기는 183 cm 너비 104 cm 두께 17 cm 로 龍模樣 의 비머리 가없고 碑石의 위쪽 양끝을 귀접이한것과 둘레에 독특한 당초문(唐草文)문얀의 粧飾을 쓴것이 特徵이다. 비신(碑身)에는 上端에 圓眞國師碑 라는 題額이 있고 碑文은 斷定한 楷書體로 쓰여져 있다. 이공노(李公老)가 지었고 글씨는 김효인(金孝印)이 섰다.
명부전
(冥府殿)
冥府殿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靈魂)이 다음생(次生)을 받기전에 이 世上에 있을때 行한 선악(善惡)간의 行爲를 審判받아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데 그 審判하는 관부(官府)를 형상화(形像化)한것 으로서 中央에 지장보살(地藏普薩)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그리고 십대왕(十代王)을 모신 全閣이다. 일명(一名)십왕전(十王殿)지장전(地藏澱)이라고도 한다. 이 建物은 肅宗 3년 (1678)에 建立 하였다.
보경사탱자나무
(寶鏡寺)
이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년으로 推定된다. 높이 6 m 밑부분 둘레 97 cm 가슴높이둘레 60 cm 로서 ,나무 模樣은 원형(圓形)이고 수세(樹勢)는 매우 旺盛하다. 京畿道 江華郡 江華面 甲觀里와 사기리에 각각 1 그루 씩 (天然記念物 78호 79호)이 더 있으나 이 나무들에는 미치치못한다.
삼척죽서루
(三陟竹西樓)
現在 三陟市 城內洞 五十川 絶壁에 위에 位置한 寶物 제219호인 죽서루(竹西樓)는 누각(樓閣)이다. 樓閣이란 一般的으로 기둥 층 받침이되어 마루높이된 중충(重層)의 다락집을 말한다. 普通樓閣의 1층 바닥은 自然狀態 혹은 기단으로 남겨두고 그 上層에 우물마루 바닥이나 온돌바닥을 깔았다 이러한 樓閣은 그 技能上으로 볼때 여러 種類로 區分 할수있으나 竹西樓는 朝鮮時代에 一種의 官衙 施設로 活用된 樓閣이었다고 하겠다. 즉 朝鮮時代 三陟部의 객사(客舍)였던 진주관(眞珠館)의 附屬 建物이었다. 客舍란 地方에 派遣된 中央管理들이 묵던 宿所를 말한다. 따라서 朝鮮時代 竹西樓는 公共施設로서 接待와 饗宴을 위한 場所로 活用되었다.물론 三陟 地方兩班 士大夫의 三陟을 찿아오는 詩人 墨客들의 精神 休養을 위한 休息空間으로 使用되었다.
삼척죽서루
(三陟竹西樓)
이 樓閣이 언제 創建되었는지는 確實하지 않지만 高麗 明宗때의 文人 김극기(金克己)가 쓴 竹西樓詩가 남아 있는것으로보아 12세기 候班에는 이미 存在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구후 1403년 太宗3년 당시 三陟副使 김효손(金孝孫)이 고쳐 지었다. 絶壁 위 自然巖盤을 基礎로 하여 建築되어 있고 누(樓)아래의 13개 기둥중 9개는 自然岩盤을 基礎로 나머지 여덟개의 기둥은 동로많든 基礎위에 웠으므로 13개 의 기둥길이가 각각다르다. 上層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形成하고 있다. 自然主義 의 傳統 建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 할수있다. 現在는 正面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元來는 5칸이었을것으로 推定되고있다. 元來 建物인 가운데 5칸 內部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後에 增築된것으로 보이는 兩側칸의 기둥배열은 元來樣式에 求愛받지않고 서로다르게 配置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天仗은 연등 天仗인데 左側 뒷간一部는 우물天仗으로 하였다. 樓閣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亭) 1662년 顯宗 3 부사 許穆(허목)이 쓴것이고 關東第一樓는 1711년 肅宗 37 副使 이성조(李聖肇)가 섰으며 해유회지소(海由회之所)는 1837 顯宗 3 부사 이규헌(李奎憲)이 쓴것이다. 이 밖에 肅宗 正祖 栗谷李珥先生 등 많은 名士들의 시(詩)가 걸려 있다.
관동제일루
(關東第一樓)
숙종(肅宗) 36년 (1710년) 三陟副使 이성조(李聖肇)글씨
해선유희지소
(海仙遊戱之所)
헌종(憲宗) 3년 (1837년) 三陟副使 이규헌(李奎憲)글씨
제일계정
(第一係亭)
현종(顯宗)대 1660 ~ 1662년) 三陟副使 허욱(許穆)글씨.
송강정철
(松江鄭撤)
정철(鄭撤)1536 ~ 1593년 은 朝鮮의中期의 詩人이자 政治家이다. 本官은 연일(延日,또는迎日)자는 계함(溪函)이고 ,호는 송강(松江) 詩號는 문청(文靑)이다. 敦寧府 판관(敦寧府 判官) 정유침(鄭惟沉)의 아들이다 奇大升 김인흥 양응정(梁應鼎)의 文人이다.
용문바위
(龍門巖)
新羅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사후(死後) 護國龍이 되어 東海바다를 지키다가 어느날 三陟의 五十川으로 뛰어들어 竹西樓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護國龍이 五十川으로 뛰어들때 竹西樓 옆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龍門바위다. 그후 龍門바위는 아름다움과 長壽 多福의 祈願處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찿아와 龍門을 드나들며 所願을 빌었다. 竹西樓 東쪽 옛 蓮根堂 자리 가까이에 있는 바위문 行草書 露(龍門)이라 새긴 陰刻글씨가 남아 있으며 바위 上部에 聖血遺跡이 있다. 聖血은 豊饒와 多産을 意味하는 先史時代의 象徵物이지만 朝鮮時代에 와서는 民間信仰으로 定着되어 得男의 祈願處로 變貌하게된다. 즉 七月 七夕날 子正에 婦女子들이 聖血터에 찿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致誠을 드린후 좁쌀을 치마폭에 감추어가면 아들을 낮는다고 믿는 民間信仰이 있다. 龍門바위 聖血은 크기가 직경 3 ~4 cm 정도의 크기로 10개가 만들어져 있다.
정동진역
(正東津驛)
嶺東線의 철도역(鐵道驛)이다. 江原道江陵市 江東面 正東津里에 있으며, 코레일 管理한다. 驛의 이름인 “正東津”은, 朝鮮 時代에 光化門에서 보아 正東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1962년 11월 8일 에 旅客과 貨物을 取扱하는 驛으로 開業하였다. 以後 持續的인 人口 減少로 閉驛이 考慮되었으나, 드라마 모래時計의 撮影地로 알려지면서 觀光 需要가 急增하여 비둘기호만 停車하는 簡易驛에서 새마을호가 停車하는 主要 歷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歷은 乘降場이 바로 白沙場으로 連結되어 있어서 入場券으로 歷 乘降場은 물론 白沙場까지 나갈 수 있는 특이한 形態를 갖추고 있다.
모래시계소나무
(沙時計松樹)
江原道 江陵市에 조그만 바닷가로 全國에서 가장 海岸에 가까운 歷이 있는 곳이다. 드라마 '모래時計' 의 촬영장소(撮影場所)이기도 하다. 지명(地名)의 大部分이 그러하듯 정동진(正東津)은 서울 광화문(光化門)의 正東쪽에 자리잡고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강릉(江陵)에서 7번 국도(國道)를 따라 南쪽으로 내려가면 바닷가와 나란히 기암절벽(奇巖絶壁)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그 아래 우거진 송림(松林) 사이로 아기 자기한 백사장(白沙場)이 펼져 친다. 正東津驛은 '모래時計'의 舞臺로 알려지면서 朱抹이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바다와 소나무, 閑寂한 역사(歷史)와 기차(氣車)라는 浪漫的인 경치(景致)를 갖추고 있다. 1995년 年初에 放映된 모래時計는 韓國 放送使(史)를 다시 쓰게 할 程度로 驚異的인 視聽率을 記錄한 드라마였다. 現在까지 모래時計의 感動을 記憶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래時計 撮影地를 찾아 江原道로 向하고 있다.
이승만대통령별장
(李承晩大統領 別莊)
1948년 제1 ~ 4대 大韓民國 大統領 1960년 4.19 義擧로 失脚. 하와이로 亡命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인 李承晩이 머물렀던 곳으로 1954년에 新築된 뒤 1961년에 廢墟가 되었다가 1999년 展示館으로 復元되었다. 別莊의 外部는 別莊답지 않게 雅澹하고 素朴하며 허름하게 보인다. 內部는 寢室과 執務室로 쓰이던 방 두개와 居室로 區分되어 있으며 遺族들에게 寄贈 받은 物品들로 展示하여 李承晩 大統領이 寄居하던 時節의 모습을 그대로 再現하였다. 短出한 家具와 素朴한 物件들 그리고 生前의 寫眞들로 그 당시의 雰圍氣를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素朴하고 단출하지만 別莊安에서 밖을 바라보면 周邊의 울창한 松林과 한데 어우러진 花津浦의 두개의 湖水가 한눈에 보이는 까닭에 花津浦의 세 別莊 중 가장 景致가 뛰어나다는 評을 받고 있다. 조용히 바깥 風光을 즐기며 便安하게 쉴수 있는 平溫하고 조용한 別莊이다.
이승만박사자작한시
(李承萬博士自作漢詩)
萬枝同根 만가지로 나누어져도 뿌리는같고 尊祖崇宗 조상을 높이고 조상을 존중하여
百派一源 백번갈라진 물도 근원은 하나로서 愛親睦族 어버이를사랑하고 동족이 화목하고
敬老慈幼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一意循此 한결같이 이 뜻을 따라
斥邪護正 틀린것을 물리치고 바른것을 수호하자 永無或簪 길이길이 변함없게.
이기붕별장
1920년대 外國人 宣敎師들에 의해 建築되어 使用된 建物로써 解放以後 北韓共産黨의 幹部 休養所로 使用되어오다가 休戰以後 副統領 이었던 李起鵬씨의 夫人 朴마리아 女史가 個人別莊으로 使用하다가 閉鎖되었으나 1999년 7월 歷史 安保 展示館으로 改修하여 觀覽客에게 展示하고 있다.
화진포의성
(金日成別莊)
花津浦의 城은 地下 1층, 地上 2층의 石造 建物로 지어져 당시 建築物로는 제법 華麗함이 엿보인다. 花津浦의 城에는 옛 別莊의 모습을 담은 寫眞資料를 비롯해 金日成 家族이 使用했던 응접 세트 등 各種 遺品이 模型物로 만들어져 展示 되었다. 海岸家 산기슭에 位置한 花津浦의 城은 光復 直後 建立, 韓國戰爭 以前까지 金日成이 아들 金正日, 딸 김경희와 함께 隨時로 利用했던 곳으로 本來 地下 1층, 地上 2층의 石造물이었으나 戰爭 중 크게 毁損되어 64년 陸軍이 本來 建物을 撤去하고 지금의 1층 建物로 再建築 했었다. 새롭게 丹粧된 花津浦의 城은 內部에 金日成의 政體, 獨裁體制 構築科程, 韓國戰爭 挑發, 그리고 停戰協定 以後 北韓의 挑發漫行 등 北韓關聯 資料를 판넬식으로 揭示하고 있으며 金正日과 김경희가 어린 時節 이 곳에서 찍은 寫眞 등 關聯資料寫眞도 展示하고 있다. 花津浦의 城의 絶境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마주 보이는 금구도라 불리는 바위섬으로 花津浦 海邊에서 3백여m 떨어진 금구도는 거북 모양을 닮은데다 가을철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전체가 黃金빛으로 물든다.
광개토대왕릉
(廣開土大王陵)
高句麗 年代記에 따르면 廣開土大王 3년(394)8월경 花津浦 거북섬에 왕릉(壽陵)축조를 始作했으며 廣開土大王 18년 8월 花津浦의 首陵築造 現場을 大王이 直接 訪問하기도 했던것으로 記錄되 있다. 廣開土大王이 逝去한 이듬해인 長壽王 2년 (414) 9월 29일 花津浦 거북섬에 廣開土大王의 屍身을 安葬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廣開土大王陵 守備隊가 王陵을 지키고 있었고 鷄林(新羅)의 軍事와 守備隊간 잦은 分爭이 잇엇던 것으로 技術하고 있다. 文咨明王 2년에 이곳에서 廣開土大王의 망계(望祭)를 지냈다는 記錄이 있다. 現在 있는 거북섬 城의 構造는 2중 構造로 되어 있는데 섬의 頂上部인 약 45 m 높이의 高地를 中心에 두고 海岸線 地形을 따라 花崗岩을 利用하여 石築으로 築造하고 城壁上段은 삭토하여 환도를 開設한 痕跡이 200 m 에 뚜렸이 남아 있으며 山頂附近의 瓦片과 주초석의 殘骸는 祠堂으로 推定하고 있다 섬 북쪽의 岩石 저지대는 협축법으로 石築한 보호벽(城)과 방파성(防波城)이 약 60m 높이 170 ~ 230 cm 3개 區間에 남아있다.
화진포해수욕장
[花津浦海水浴場]
民間人 出入이 許容되는 海水浴場 中에서 가장 北쪽에 자리하고 있다. 白沙場 길이는 약 1.7km이며, 수심 1~1.5m로 경사가 매우 완만하다. 모래에 모나즈(monaz) 性分이 많아 感觸이 부드러우며, 개미와 곤충이 들끓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모래에서 쇳소리가 난다고 하여 명사(鳴沙)라고도 불린다. 울창한 숲, 맑은 湖水, 奇巖怪石 등 조용하고 빼어난 周邊 景觀으로 인해 많은 避暑客이 몰려들며, 花津浦에 隣接하고 있어 年中 민물·바다 낚시꾼들로 붐빈다. 7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海水浴이 可能하다. 周邊의 觀光地로 統一展望臺·巨鎭海水浴場 등이 있다.
화진포
(花津浦)
둘레 16km, 水心 15m, 面積 2.36㎢이다. 이 湖水는 後氷期 海面上昇으로 海岸이 侵水됨에 따라 河谷을 中心한 낮은 곳이 灣入으로 變하고 그 入口가 衆評川과 月案川의 土沙供給으로 이루어진 石虎이다. 50~100년생의 울창한 소나무숲이 屛風처럼 둘러싸여 있고, 맑은 湖水와 奇巖怪石, 푸른 바다, 하얀 모래밭이 한데 어우러져 景致가 秀麗하다. 1971년 12월 16일 江原道 記念物 제10호로 指定되었으며, 겨울에는 白鳥(天然記念物 제201호)가 到來하고, 여름에는 海岸을 따라 海棠花가 피어 韻致를 더해준다. 日帝强占期에는 外國人들의 休養地로 利用되었고, 8·15解放 後에는 김일성(金日成)·이승만(李承晩) 등의 別莊地로 使用되었으며, 지금도 남아 있다. 湖水의 北東쪽이 바다 쪽으로 트여 있어 잉어와 같은 淡水魚와 도미·전어·숭어 등의 바닷물고기가 함께 棲息한다.
화진포금강소나무숲
(花津浦金松)
金剛소나무는 우리나라 太白山脈을 中心으로 江原道 慶尙北道,東海岸에 生育하고 있으며 代表的으로는 金剛山 地域에 分包하고 강송,춘얀목,金剛松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줄기가 곧고 붉은색을 나타내며 나무껍질이 얇고 才質이 優秀하여 文化財 建築用材로 使用되는 소중한 나무입니다 우리모두 소나무 保護에 힘서야겠읍니다. 歷史라는것이 하루아침에 알수도없지만 地域 解說士의 誠意있는 說明에 어느정도 귀가 트이는것 같읍니다. 이러한 旅行을 앞으로 計劃的으로 新羅權.百濟權.高句麗權.渤海.등으로 區分해서 내가살고 있는 이나라의 歷史를 좀 알았으면 합니다. 千年古都慶州를 3박4일간 旅行을마치고 寫眞整理도 마쳤읍니다. 推後 旅行때 參考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