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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族/兪 仁 植

靈鷲山通度寺

(靈鷲山通度寺)

 

 

通度寺는 부처님의 眞身舍利와 금란가사(金欄袈裟-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삼보 가운데 가장 으뜸인 佛寶寺刹의 位置를 갖게 되었다. 通度寺를 韓國佛敎의 으뜸인 불지종찰(佛之宗刹)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 하는 理由가 여기에 있다. 특히 釋迦牟尼 부처님의 眞身舍利를 모신 舍利塔이 있는 제1寂滅寶宮이기에 大雄殿에는 佛像이 없는 寺刹로 有名하다. 通度寺 大雄殿은 實弟로 부처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는 空間이기 때문에 다른 寺刹의 大雄殿과는 다른 宗敎的 象徵性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정자형(丁字形) 法堂 四面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데, 東쪽은 대웅전(大雄殿), 西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南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北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쓰여 있다.

 

 

 

영축산통도사

(靈鷲山通度寺)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란 扁額은 興宣大院君의 筆蹟으로 有名하다. 주련(柱聯)에는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다.

 

 

 

일주문

(一柱門)

 

주련(柱聯)에는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다.

 

 

부도원

(浮屠院)

 

通度寺 境內 아래쪽에 마련된 駐車場에서 개울을 건너면 南향한 터에 자리한 浮屠院을 만난다. 이곳은 通度寺의 歷代 高僧들의 舍利塔과 塔碑를 奉安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浮屠와 塔碑들은 原來 通度寺 周邊과 山內庵子에 흩어져 있던 것인데, 1993년 伽藍을 整備하면서 모두 이곳으로 移轉하여 부도원(浮屠院)으로 造成한 것이다. 現在 浮屠院에는 歷代 高僧들의 浮屠 60여 기와 塔碑 및 重修碑ㆍ功德碑 등 석비(石碑)가 60여 기가 즐비하게 줄지어 있다

  

 

통도사천왕문

(通度寺天王門)

 

天王門은 절 안으로 들어올때 一周門 (일주문)을 지나 通過하는 곳으로 通度寺 全體의 大門이자 通度寺 境內 세개의 領域 가운데 下位 領域의 出入門에 該當한다. 天王門을 通過한 사람은 이미 부처의 世界에 들어온 샘이다. 이 거무은 1337년 (高麗 忠肅王 6)에 취암 大師가 創建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造成 修法으로 미루어볼때 現在의 建物은 19세기 以後에 重建한 것으로 보인다.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 (廣目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 지국천왕 (持國天王)

 

 

동 종

(銅鐘)

 

朝鮮中期에 僧侶 사인비구가 만든 鐘이다. 이 鐘은 맨위의 용뉴 종 몸통의 常態와 下隊 遊廓등을 모두갖춘 傳統的인 梵鍾의 모습이다. 上隊에는 위 아래 두줄로 梵字가 配置되었고 遊廓 안에는 아홉개의 乳頭가 있는데 中央의 하나가 特別히 突出되었다. 鐘 몸톹 가득히 名文이 새겨진 까닭에 遊廓 사이의 菩薩像은 작게 表現되었다. 鐘으로는 唯一하게 八卦가 돌려 새겨져 있는 점도 特旨的이다. 鐘의 名文에는 1686년에 사인비구가 만든것이 記錄되어 있다. 사인비구는 17세기 候班부터 18세기 前番까지 약 50년동안 京畿 慶尙地域에서 주로 活動하였던 僧侶이자 朝鮮을 代表하는 鐘 만드는 匠人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산전

(靈山殿)

 

靈山은 靈鷲山의 준말로 釋迦牟尼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自身의 가르침을 弟子들에게 傳하던 곳이다. 바로 이 靈山을 이땅에 再現할 것이 靈山殿 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參拜하는 것은 부처가 弟子들애개 法華經을 說破한 靈山畵像에 參席하는 것과같은 效力이 있다고 한다. 이 靈山殿은 神眼의 程度에 따라 나누어진 通度寺의 세 領域 가운데 入口에서 가장 가까운 下位 領域의 中心 佛殿 으로 東西로 양옆에 藥師殿과 極樂殿을 거느리고 있다. 

 

 

극락보전

(極樂寶殿)

 

阿彌陀如來를 奉安하는 極樂殿은 阿彌陀佛 이라고도 한다. 또 極樂世界에서 永遠히 平安한 삶을 누린다 하여 無量壽殿 이라고도 한다. 阿彌陀如來가 다스리는곳이 西方 極樂淨土 이기 때문에 極樂殿은 언제나 中心 佛殿의 西쪽에 位置하여  參拜하는 사람들이 그곳을 向하도록 세워져 있다. 極樂淨土는 苦痛이 전혀 없고 즐거움만 있는 理想의 世界이다. 따라서 이 世界를 염원하는 사람은 南無阿彌陀佛 이라는 念佛을 외우고 極樂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을 祈願한다.

 

 

삼층석탑

(三層石塔)

 

通度寺는 新羅 善德女王 15년(646) 煮醬律師가 創建하였고 그 有名 세만큼이나 특이하다. 부처님의 佛舍利를 奉安한 國內 3대 寺刹 중 하나로 大雄殿 內部에는 佛像이 없다. 다만 舍利를 모신 佛舍利 階段이 그 宗敎的 意味를 代身하고 있다. 極樂殿 앞에 서 있는 이 塔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基壇에는 기둥 模樣이 表現되고 특히 아래층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彫刻되어 있다. 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올려 造成하고, 지붕돌 처마의 谷線處理와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붕돌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도 탑의 外形을 決定하는데 重要한 부분으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高麗 前期에 建立된 것으로 보이는 이 塔은 1987년 解體, 復元시 基壇의 맨윗돌에서 朝鮮時代의 白瓷가 發見되어 以前에도 搭의 保守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배례석

(拜禮石)

 

佛菩薩님이나 尊敬의 對象에게 禮敬을 위한 意識行事에 사용되는 一種의 판석(板石)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拜禮石은 한결같이 옥외의 노천, 그것도 法堂의 정면이나 石燈 또는 石塔의 바로 앞에 놓이는 것이 通例다.

 

 

삼세불

(三世佛)

 

三世佛은  中央에 자리잡은 現世의 부처 釋迦牟尼佛 왼쪽에 자리잡은 過去의 부처 藥師佛 오른쪽에 자리잡은 미래 極樂世界를 主觀하는 阿彌陀佛을 말한다.

 

 

약사전

(藥師殿)

 

東方의 情遊리 世界에 있으면서 모든 衆生의 疾病을 治療하고 災殃을 燒滅시키며 衆生으로 하여금 부처의 佛性을 닦도록 도와주는 藥師如來를 모신 法堂이다. 藥師如來는 東方 世界를 다스리므로서 藥師殿은 언제나 中心 佛殿의 東쪽에 자리 잡고 있다. 藥師如來는 過去 世上에서 藥王 이라는 이름의  菩薩로 任務를 修行하면서 衆生의 아품을 消滅시키기 위해 12가지의 큰所願을 세윘다고 한다.

 

 

만세루

(萬歲樓)

 

萬歲樓는 本來 法會나 法要式을 擧行할때 使用하던 樓閣이다. 이 建物 創建年代는 알수없지만 1644년 仁祖 22년에 영숙화상이  중겅하였다고 傳한다.  本來 樓閣은 바다이 地面 높이에서 올라간 2층 다락집으로 기둥만으로 構成하는것이 一般的 形態다.

 

 

석 등

(石燈)

 

觀音殿 전방에는 석등(石燈)이 있는데, 높이는 약 300㎝로서 그 造成修法은 龍華殿 앞의 석조봉발(石造奉鉢)과 비슷하여 高麗時代에 制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부의 옥개(屋蓋)와 보주(寶珠)는 착실하게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中心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粧飾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彫刻했으며, 가운데기둥은 中央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윗 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粧飾하고, 4각의 火舍石은 각 면에 네모난 窓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게 하였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粧飾을 달았으며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놓아 머리粧飾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樣式뿐만 아니라 화문(花紋)의 조식(彫飾)으로 보아 高麗時代의 作品으로 斟酌된다. 全體 높이는 약 350cm이고, 現在 慶南有形文化財 제70호로 指定되어 있다.

 

 

개산조당

(開山祖堂)

 

開山祖堂은 龍華殿 옆 西쪽에 位置한다. 通度寺의 創建主 慈藏律師의 影幀을 奉安한 아담한 全閣이다. 全閣 正面에 開山祖堂이라는 懸板이 붙은 솟을문은 該掌寶閣의 조사문으로서 ‘솟을三門’型式이며 해장보궁(海藏寶宮)으로 通하는 문의 3칸 建物인데 中央 칸이 양 側面 칸보다 높게 솟아 ‘솟을三門’이라고도 한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建物型式은 朝鮮時代 말기의 守法으로 一般的으로 볼 수 있는 사당(祠堂)의 솟을三門과 같다.

 

 

세존비각

(世尊碑閣)

 

이 비각(碑閣)은 1706(肅宗 32)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釋迦如來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佛舍利의 行跡을 昭詳히 밝히고 있다. 곧 煮醬律師가 中國에서 舍利를 모셔온 일과 壬辰倭亂 당시 四溟大師(泗溟大師)가 불사리(佛舍利)를 적으로부터 保護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이곳에 다시 奉安토록 하셨고 한 개의 함은 태백산(太白山 : 寧邊 妙香山)으로, 다른 한 개는 現在의 階段에 奉安토록 하였던 사실들을 석비(石碑) 전면(前面)에 기록(記錄)하고 있다.

 

 

삼십칠조도품탑

(三十七助道品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修行하는 37가지의 方法을 말합니다. 즉 4염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역(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37보리도법(菩提道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修行 方法을 通해서 깨달음을 成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봉발탑

(奉鉢塔)

 

高麗時代에 製作된 것으로 推定되는 奉鉢塔은 釋迦牟尼의 鉢盂를 象徵的으로 表現한 石造物이다. 鉢盂란 스님들이 供養할때 使用하는  食事用기이자 스승이 弟子에게 法을 傳하는 傳法의 象徵物이다. 이처럼 彌勒佛을 모신 龍華殿 앞에 奉鉢塔을  모신것은 釋迦牟尼께서 압멸한 후 56억 7천만년 後에 이땅에 내려와 부처가 되라는 釋迦牟尼의 뜻을 받들어 未來에 出現하실 彌勒佛의 出世를 기다린다는 意味가 담겨 있다. 寶物

 

 

용화전

(龍華殿)

 

龍華殿은 彌勒佛을 奉安한 建物로 彌勒佛이 出現한 곳이 龍華 世界의 龍華水 아래라는 데서 이 名稱이 由來하였다. 또 彌勒佛을 모시기 때문에 彌勒殿 이라고도 부른다. 彌勒佛은 釋迦牟尼가 涅槃 한후 56억 7천만년 뒤에이 땅에 出現하여 釋迦牟尼가 미처 舅弟하지 못한 衆生을 救濟할 부처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에서는 彌勒佛이 希望의 부처로 三國時代부터 폭넓게 信仰되었다. 이 龍華殿은 1369년 高麗 恭愍王 18년에 創建되었다고 한다. 現在의 建物은 英祖때 重建된것이다. 

 

 

대광명전

(大光明殿)

 

大光明殿은 通度寺의 3개 領域가운데 中位 領域의 中心으로 佛殿으로 毘盧遮那佛을 奉安하는 곳이다 毘盧遮那佛은 널리 밝은 빛을 두루 비춘다는 뜻으로 곧 사람의 눈으로는 볼수없는 빛의 부처이자 모든 부처 중에서 根本이 되는 부처이므로  이부처를 法身佛 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毘盧遮那佛이 奉安된곳을 大光明殿 또는 大寂光殿 이라고도 한다. 毘盧遮那佛의 이름을 따서 毘盧殿 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불

 

毘盧遮那佛은 널리 밝은 빛을 두루 비춘다는 뜻으로 곧 사람의 눈으로는 볼수없는 빛의 부처이자 모든 부처 중에서 根本이 되는 부처이므로  이부처를 法身佛 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大雄殿)

 

通度寺에 남아있는 여러가지 建物가운데 가장 核心이 되는 領域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15년 (646)慈藏律師에 의하여 지어진 大雄殿과 金剛戒壇 이다.

 

 

명부전

(冥府殿)

 

冥府殿은 大雄殿의 東南쪽에 서향(西向)하고 있다. 創建 年代는 1369년(恭愍王 18)이라 傳해 내려오고 있으나 現在의 建物은 「통도사사적비(通度寺事蹟碑)」에 의하면 1760년(英祖 36) 춘파대사(春坡大師)에 의해 개건(改建)되었다고 한다. 朝鮮(1888년), 慶南 有形文化財 제195호

 

 

구룡지

(九龍池)

 

스님은 歸國하여 善德女王과 함께 靈鷲山을 찾아서 나쁜 龍들이 산다는 못에는 아홉 마리의 龍이 살고 있었다.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注文과 經을 읽으며 아홉 마리의 龍에게 조용히 이 못을 떠나달라고 請하였으나 龍들이 일절 응하지 않자, 法力으로 아홉 마리의 龍과 決鬪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견디지 못한 龍들은 제각기 앞 다투어 달아나기 始作했는데, 세 마리의 龍은 달아나다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 당시 부딪힌 바위에 龍의 피가 낭자하게 묻게 되어서 後世 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혈암(龍血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다섯 마리 龍은 通度寺의 南西쪽에 있는 靈鷲山 아래의 골짜기에 이르러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그곳을 오룡동(五龍洞)이라 부르고 뒷산 중턱에 있는 검붉은 색의 바위는 이 龍들이 흘린 피가 묻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마지막 한 마리의 龍은 煮醬律師에게 通度寺 터를 守護할 것을 盟誓하자 스님은 그 龍의 請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龍을 머물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金剛戒壇 옆에는 자기마한 象徵的인 못을 두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지(九龍池)이다. 불과 작은 크기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楕圓形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水量이 줄어들지 않는 靈驗함이 있다.

 

 

사리탑

(舍利塔)

 

부처님의 眞身舍利를 모셔둔 塔

 

 

금강계단

(金剛戒壇)

 

階段이란 계를 受與하는 儀式이 行해지는 場所로 通度寺 創建의 根本 精神은 바로 부처님의 眞身舍利를 奉安한 金剛戒壇에 있다.靈鷲總林 通度寺는 646년(新羅 善德女王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創建되었다. 通度寺에는 釋迦牟尼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란가사(金?袈裟)가 奉安되어 있어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國內에서 가장 큰 伽藍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寺刹이라 할 수 있다. 『通度寺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原來 通度寺가 位置하고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金剛戒壇을 쌓고 通度寺를 創建하였다고 한다.

 

 

구룡지

(九龍池)

 

스님은 歸國하여 善德女王과 함께 靈鷲山을 찾아서 나쁜 龍들이 산다는 못에는 아홉 마리의 龍이 살고 있었다.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注文과 經을 읽으며 아홉 마리의 龍에게 조용히 이 못을 떠나달라고 請하였으나 龍들이 일절 응하지 않자, 法力으로 아홉 마리의 龍과 決鬪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견디지 못한 龍들은 제각기 앞 다투어 달아나기 始作했는데, 세 마리의 龍은 달아나다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었다. 당시 부딪힌 바위에 龍의 피가 낭자하게 묻게 되어서 後世 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혈암(龍血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다섯 마리 龍은 通度寺의 南西쪽에 있는 靈鷲山 아래의 골짜기에 이르러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그곳을 오룡동(五龍洞)이라 부르고 뒷산 중턱에 있는 검붉은 색의 바위는 이 龍들이 흘린 피가 묻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마지막 한 마리의 龍은 煮醬律師에게 通度寺 터를 守護할 것을 盟誓하자 스님은 그 龍의 請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龍을 머물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金剛戒壇 옆에는 자기마한 象徵的인 못을 두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지(九龍池)이다. 불과 작은 크기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楕圓形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水量이 줄어들지 않는 靈驗함이 있다.

 

 

성보박물관

(聖寶博物館)

 

博物館은 총림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오른쪽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建物은 宗務所 建物을 撤去하고 正面 7칸, 側面 3칸의 傳統 建築樣式을 본뜬 鐵筋 콘크리트 建物로 1987년 10월 주지 원명스님에 의하여 完工된 80평 規模의 展示技能 建物이다. 現在 聖寶博物館의 前身인 셈이다. 新築중인 신(新) 博物館이 完工되면 이곳은 제 5 展示空間으로 쓰일 豫定이다.

 

 

자장율사

(慈藏律師)

 

通度寺를 創建한 慈藏律師는 新羅 진골 (眞骨)出身으로 俗名은 선종랑 (善宗郞)이며 法號를 자장 (慈藏)이라 했다. 嚴格한 개율로서 修行에 專念 하던 慈藏律師는 636년 唐나라로 儒學을 떠나 文殊菩薩 주처인 五臺山에 머물렀다. 여기서 文殊菩薩의 現身을 만나 釋迦牟尼 眞身舍利의 가사등을 받은 慈藏律師는 643년 善德女王의 要請으로 歸國 하였다. 歸國後 新羅 最高 僧職인 大國統에 任命된 慈藏律師는 大大的인 佛敎 整備에 나서 佛敎를 統治 理念으로서 國力의 伸長과 國論의 統一을 꾀하고 佛敎의 土着化에 公憲하였다.  이러한 慈藏律師의 思想的 求心点은 바로 三國統一의 念願이 담긴 皇龍寺 9층 木塔과 戒律根本道場인 通度寺 金剛戒壇에 眞身舍利를 나누어 奉安함으로써 新羅 社會와 모든 佛敎勢力을 閨閤할수 있었다. 豫로부터 通度寺와 新羅最大의 巨刹 皇龍寺를 兄弟 寺刹이라 하는 理由가 여기에 있다.

 

 

성보박물관

(聖寶博物館)

 

博物館은 총림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오른쪽 大地에 자리잡고 있다. 이 建物은 宗務所 建物을 撤去하고 정면 7칸, 측면 3칸의 傳統 建築樣式을 본뜬 鐵筋 콘크리트 建物로 1987년 10월 主旨 原名스님에 의하여 完工된 80평 規模의 展示技能 建物이다. 現在 聖堡博物館의 前身인 셈이다. 신축중인 신(新) 박물관이 완공되면 이곳은 제 5 전시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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