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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族/家 族 (募臨)

가족모임2

2023

 

일시 :  4 월  23 

 

 

손자와 함께하는 6. 25 戰跡地 探訪

 

 

고석정 한우촌

 

노동당사

(勞動黨舍)

 

鐵原 勞動黨舍는 1946 년 北韓 勞動黨이 鐵原과 그 隣近 地域을 管轄하기 위해 지은 建物 이다.  地域 住民의 勞動力과 資金을 强制로 動員하여 지었으며 住民을 統制하고 思想運動을 抑壓하는 口實을 하였다.  이곳은 韓國戰爭으로 인해 모든  建物 이 破壞 되었지만 鐵筋構造에 벽돌과 시멘트로 壁을 쌓아 매우 堅固하게 지어진 建物인 勞動黨舍는 現在의 모습으로 남아 分斷과 戰爭의 慘狀을 證言하고 있다.

 

 

철원역

(鐵原驛)

 

鐵原平野 한가운데 位置한 鐵原驛은 1912년 서울과 原山을 잇는 京元線의 漣川 ~ 鐵原간 開通으로 門을 열었으며 1931년 金剛山 電氣鐵道의 開通과 함께 鐵原地域의 發展을 이끄는 重要한 役割을 하였읍니다. 京元線을 通해 서울龍山에서 鐵原驛까지 2 시간, 鐵原驛에서 內金剛 까지 4 時間 半이 걸리게 되면서 鐵原은 江原 北部의 交通, 物流등의 , 産業의 中心地가 되어 春川, 原州와 더불어 江原道의 3 대 都市의 位相을 갖춘 地域으로 急成長 하였읍니다.  1937년 發行된 鐵原군지에 따르면 乘下車 人員 약 28 萬名, 手貨物 약 6 萬 3 千ton 가량이 鐵原驛을 通해 運送 되었다고 하며  驛務員도 80 여명이 勤務 하였다고 합니다.

 

 

철원극장

(鐵原劇場)

 

京元線과 金剛山 電氣鐵道의 開通으로 鐵原地域이 江原北部의 中心地가 되면서 都市人口가 急增하고 公演文化 需要가 늘어나면서 1934년 最初의 近代式 劇場鐵原劇場이 문을 열게 되었읍니다. 鐵原劇場은  우리나라를 代表하는 最高의 文化 藝術人들이 公演을 펼쳤던 곳으로 當代 最高의 舞踊家였던 최승희를 비롯하여 배뱅이굿의 名唱 이은관이 데뷔한 곳이기도 하며 多樣한 歌手와 演劇人들의 公演場이기도 했읍니다. 公演 이외에도 無聲映畵 觀覽이 可能하였고, 1939년 改築을 通해 地方劇場으로서는 드물게 專門 公演場의 面貌를 갖춘 文化施設로 거듭났으며, 北朝鮮 巡廻公演의 마지막 旅程地 였읍니다. 

 

 

철원약국

(鐵原藥局)

 

西洋醫學이 導入된 後 1880 年代 後半 생긴 洋藥局은  以後 傳統的인 藥房을 對處 하면서 全國에 普及되기 始作 하였읍니다.  初期에는 洋藥뿐만 아니라 韓藥도 함께 販賣 하였으나 西洋醫學에 대한 理解度가  一般 大衆 에게도 漸次 높아지고, 正規 醫學敎育을 받은 사람들이 漸次 늘어나면서 藥局에 대한 숫자도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藥局鐵原地域에 正確하게 언제부터 門을 열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읍니다. 다만 1931년 江原道立 鐵原醫員이 開院 했을때 職員構成 으로 약제수가 任命된 것으로 보아 鐵原醫員 開院 以後에는 近代的 意味의 西洋式 藥局이 運營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읍니다.

 

 

철원우편국

(鐵原郵便局)

 

1884 년 6월 郵政總局이 設置되면서 近代的 郵便制度鐵原地域에서 始作된 時期는 1897 년 12월  29일 금성 郵遞司가  設置되고 開國 되면서 부터 였읍니다.  以後 1898 년 3월 금성 郵遞司가 鐵原으로 옮겨져 鐵原郵遞司가 設置되고 郵便, 小包, 換錢, 貯金등의 業務가 始作되었으며,  1907년 電信도 取扱 하면서 郵便電信 取扱所로 昇格 되었읍니다.  以後 1924년 鐵道 郵便路가 延長되고 鐵原 驛前郵便所 (1941년 鐵原驛前郵便局으로 改稱)가 設置되면서 더욱 發展하였으며, 1954 년 鐵原郵遞局으로 名稱 變更後 現在까지 이어지고 있읍니다.

 

 

백마고지 전적비

白馬高地戰蹟碑

 

白馬高地 戰鬪는  1952 년 해발 395 m 의 이름없는  高地를 奪還하기 위해 國軍 제 9 師團과 中共軍 제 38 군 3개 師團이 벌였던 戰鬪 입니다.  열흘간 高地의 主人이 24차례나  바뀌었을 만큼 激烈했던  戰鬪는 우리軍 약 3,500 명 中國軍  약 1 萬名의 死傷者를  發生 시켰으며 쏟아진 砲彈만 28 만발에 이름니다.

 

 

백마고지위령비

(白馬高地慰靈碑)

 

1952년 10월 6일부터 中共軍 2개 師團과 10일 동안 主人이 스물 네번이나 바뀌었던 戰績地.  당시 흙먼지와 屍體가 뒤엉켜 惡臭가 코를 찔렀으며 砲擊으로 山이 本來의 모습을 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白馬가 누워있는 形狀과 같다하여 白馬高地로 불리게되었다.

 

 

백마고지전투지

白馬高地戰鬪地

 

1952 년 10월 國軍 第 9 師團이 中共軍  第 38 軍과 6. 25 戰爭 時期 가장 熾烈하게 高地 爭奪戰 을 展開 하였던 곳이다. 1952 년 10월 6 일 鐵原 西北方  395 高地  (효성산 南端)에 駐屯하고 있던 國軍 제 9 師團은 中共軍 第 38 軍 3개 師團의 攻擊을 받았다. 이때부터 10월 15일 까지 열흘간 395 高地 를 사이에 두고 12 차례 戰鬪가 反復 하면서 여러차례 主人이 바뀌었지만 UN 軍의  支援을 받은 國軍 제 9 師團은 마침내 高地 를 掌握 하였다.  戰鬪過程 에서 國軍 第 9 師團은 總 3 千 4 百여명의 死傷者가 發生 하였고 中共軍도 1 灣  4千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捕虜가 되었다. 극심한 空中 爆擊과 砲擊 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마치 白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以後 부터는 396 高地 一帶를 白馬高地 라 부르게 되었다.

 

 

自由의 所重함

 

三釜淵瀑布

鐵原 秘境

 

三釜淵瀑布는 이곳 明成山(870m)중턱의 花崗巖 地帶에 位置한 높이 약 20m 規模의 3 段 瀑布로 花崗巖이 오랜 기간 깎여져 만들어졌읍니다. 朝鮮 初,中期의 性理學者이자 詩人 이었던 三淵 김창흡 學者의 瀑布의 물줄기가 세번 꺾어지고 그 下部가 가마솥 처럼 음푹 패여 있는것을 보고 가마 "釜" 자를 써서 三釜淵瀑布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朝鮮時代 眞景山水畫의 大家인 謙齋鄭敾이 三釜淵瀑布의 뛰어난 景觀을 畵幅에 담은 것으로 有名 합니다.

 

 

화개산도피안사

(花開山到彼岸寺)

 

到彼岸寺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 라는 뜻을 가진 寺刹이며 大韓佛敎曹溪宗 제 3 敎區 본사인 神興寺의 末寺 이다.  國寶 제 63호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 모셔져 있고 寶物 제223호 三層石塔이 있다.  統一新羅 제 48 대 景文王( 865년)에 도선국사가 鐵原地方의 香徒 千여 名을 거느리고 山水가 좋은곳을 찾던중 花開山 現 位置에 터를 잡고 到彼岸寺를 처음 세웠다. 

 

 

일주문

(一柱門)

 

一柱門은 寺刹로 들어가는 첫 번째 關門이다. 元來 지붕을 가진 一般的인 建築物이라고 하면 四方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下重을 支撑해야 하는 것이 常識이다.

 

 

대적광전

(大寂光殿)

 

철원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상

(鐵原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

國寶 제 63호

 

佛坐像은 身體와 對坐가 모두 鐵 로된 新羅末의 보기드문 佛像이다. 뒷면에 새겨진 139자의 名文 가운데 咸通 6 년 己酉 正月 의 文句가 있어서 이 佛像의 製作時期는 新羅 景文王 5 년 임을 알수 있다. 살상투의 表現이 分明하지 않은점, 계란模樣의 斷定한 얼굴이 理想的이며 生動하는 느낌이 사라진 극히 現實的인 體軀등 에서 우리는 당시의 參禪하고 있는 스님을 대하는 듯한 친근한 느낌을 받는다. 法衣에는 얇게 빛은듯한 평행 옷주름이 全面的으로 表現되어 있는데 이러한 옷주름은 9세기 後半期 佛像에 特徵的으로  나타나고 있는 現象이다.  특히 名文에 의하여 이 佛像鐵原郡의 居士 信徒 1,500 여명의 열렬한  信仰心에서 만든 것으로써 당시의 활발 했던 佛敎信仰 結社의 한 斷面을  엿보게 한다.  이와 함께 이 佛像은 당시 流行하던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의 새로운 樣式을 代表하는 作品으로 크게 脚光 받고 있다.

 

 

철원도피안사삼층석탑

(鐵原到彼岸寺三層石塔)

寶物 제223호

 

到彼岸寺 法堂앞에 세워져 있는 塔으로 2단의 基壇위에 3 層의 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基壇은 그 構造가 특이 해서 普通 4 각의 돌을 利用하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8 각 模樣의 돌로 높게 2 단을 쌓았다. 아래층 基壇의 8면에는 인상이 彫刻되어 있다. 統一新羅에서 高麗로 넘어가는 過渡期的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塔을 만든 時期는  法堂안에 모셔진 佛像에 記錄된 內容을 通해 統一新羅 景文王 5년(865)절을 建立할 당시 佛像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사대천왕

(四大天王)

 

天王門은 金剛力士와 더불어 佛法을 守護하는 외호신(外護神)인 四天王을 모신 全閣이다. 外護神이란 佛國征討의 外廓을 맡아 지키는 神이라는 뜻이며, 東, 西, 南, 北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를 사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金剛力士가 守護의 意味를 가진다면 四天王은 여기에 더하여 人間을 보살피고 萬物을 所生시키며 福樂을 나누어주는 役割까지 擔當한다. 防衛에 따라 靑, 白, 赤, 黑의 얼굴색을 가지고 있는 四天王은 佛敎에서 말하는 서른 세 개의 하늘 중 欲界 여섯 번째 하늘의 첫 번째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支配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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