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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旅 旅 行/國 內

夫婦旅行/戰跡地

2022

일시 :  10 월 23일

高會夫妻兒女

가장 훌륭한 모임은

夫婦,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다.

 

 

韓半島  중간을 가로지르는 DMZ 한 발자국도 내디딜수 없었던 그곳에서  우리는 平和를 이야기 始作 했다. DMZ는 過去와 現在를 이어주는 歷史的 空間 이자 더 나아가 統一을 이뤄낼 和解와 希望의 空間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戰爭과 分斷 緊張과 喪失이 아닌 새로운 平和의 길 DMZ 여기에 있다.  平和는 敵을 壓倒하는 힘의 源泉이다. 

 

 

백마고지전투지

白馬高地戰鬪地

 

1952 년 10월 國軍 第 9 師團이 中共軍  第 38 軍과 6. 25 戰爭 時期 가장 熾烈하게 高地 爭奪戰 을 展開 하였던 곳이다. 1952 년 10월 6 일 鐵原 西北方  395 高地  (효성산 南端)에 駐屯하고 있던 國軍 제 9 師團은 中共軍 第 38 軍 3개 師團의 攻擊을 받았다. 이때부터 10월 15일 까지 열흘간 395 高地 를 사이에 두고 12 차례 戰鬪가 反復 하면서 여러차례 主人이 바뀌었지만 UN 軍의  支援을 받은 國軍 제 9 師團은 마침내 高地 를 掌握 하였다.  戰鬪過程 에서 國軍 第 9 師團은 總 3 千 4 百여명의 死傷者가 發生 하였고 中共軍도 1 灣  4千여명이 죽거나 다치고 捕虜가 되었다. 극심한 空中 爆擊과 砲擊 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모습이 마치 白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以後 부터는 396 高地 一帶를 白馬高地 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고지위령비

(白馬高地慰靈碑)

 

1952년 10월 6일부터 中共軍 2개 師團과 10일 동안 主人이 스물 네번이나 바뀌었던 戰績地.  당시 흙먼지와 屍體가 뒤엉켜 惡臭가 코를 찔렀으며 砲擊으로 山이 本來의 모습을 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白馬가 누워있는 形狀과 같다하여 白馬高地로 불리게되었다.

 

 

백마3용사기념동판

(강승우소위 오귀봉하사 안영권하사)

 

1952년 10월 12일 제10차 戰鬪 我軍은 高地奪還을위한 세차례 突擊에도 불구하고 適의機關銃 火力으로 混戰만 거듭할때 白馬3勇士는 衛國 獻身의軍人精神으로 양손에 手榴彈을들고 탄우속을 헤치며 단숨에 高地頂上으로 내달아 適 機關銃을 搏殺내고 莊烈히 戰死 하였다. 이에 전將兵은 肉彈3勇士의 鬪魂에 使氣를 진작시켜 瞬息間에 高地頂上를 횝슬고 마침내 白馬高地主峯에  太極旗를꽃았다. 祖國을위해 초개와같이 목숨을 바친 3勇士는 白馬의 삼군신 (三軍神)으로 推仰받고있다.

 

 

백마고지전적비시계탑

白馬高地戰蹟碑時計塔

 

白馬高地 戰鬪는 6.25 右側面 당시 (1950. 6. 25 ~ 1953 . 7. 27) 1952 년 10월 鐵原群 鐵原邑 대마리 3 Km 北方에 位置한 無名의 한작은 高地 놓고 韓國軍 9 師團과 中共 第 38 軍 3개 師團이 精力을 기울여 爭奪戰을 벌인 끝에 1952 년 10월 15일 우리國軍의 勝利로 매듭지은 戰鬪를 말한다.  本 象徵塔은 멈춰진 時計塔의 바늘이 다시 돌아가길 바라는 念願과 分斷의 슬픔을 共有 하고자 세워졌다.

 

                      左側面時計                                          全面時計                                          右側面時計 

                         10 : 15                                                6 : 25                                               9 :  05

          韓國國軍 勝利日字를 意味                        6. 25 韓國戰爭을  意味           韓國戰 參戰 9 師團과 現 5 師團 責任地域을 意味 . 

 

 

백마고지 전적비

白馬高地戰蹟碑

 

白馬高地 戰鬪는  1952 년 해발 395 m 의 이름없는  高地를 奪還하기 위해 國軍 제 9 師團과 中共軍 제 38 군 3개 師團이 벌였던 戰鬪 입니다.  열흘간 高地의 主人이 24차례나  바뀌었을 만큼 激烈했던  戰鬪는 우리軍 약 3,500 명 中國軍  약 1 萬名의 死傷者를  發生 시켰으며 쏟아진 砲彈만 28 만발에 이름니다.

  

 

백마고지 전적비

白馬高地戰蹟碑

 

鐵原郡 北方에 있는 白馬高地는 6. 25 動亂 당시 피 비린내 나는 激戰地 였다.  1952 년 10월 6일  中共軍의 대공세 에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白馬高地 戰鬪는 약 30 萬의 砲彈이 이 地域 에서 使用 되었으며 高地의 主人도 24 番이나 바뀌었다. 이 戰鬪에서  1 萬 4 千여명의 死傷者를 낸 中共軍 2 개 師團이 와해 되었으며 國軍 제 9 師團白馬高地 戰鬪의  대승을  계기로 白馬師團이라고 命名 되었다. 白馬高地 死守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國軍 제 9 師團 將兵의 넑을  追慕하기 위해  이곳에 白馬高地 戰蹟碑가 建立 되었다. 

 

 

建立에 부치는 글

 

이곳에는 아직도 砲聲이 들리는 듯 하다.

慘酷한 戰亂으로 平和롭던 이 江山이 廢墟로 變했던 그 時節 勇士들은 戰友의 屍體를 넘어

저 白馬山頂을  向하여 울부짖으며 突進해 갔다

歲月은 모든것을 忘却하는가.

記憶하는 이는 점점 世上을 등지고

젊은이들은 무엇을 爲해 싸웠는지를 되묻고 있다.

이제 우리는 피흘려지킨 自由의 所重한 값을 큰소리리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祖國의 永生繁榮을 爲한 것이다.

統一을 懇切히 念願하며 이 戰跡地를 님들과 後孫들에게 바친다.

步兵第 5 師團

師團長 少將  金 奉 燦

 

 

노동당사

(勞動黨舍)

 

鐵原 勞動黨舍는 1946 년 北韓 勞動黨이 鐵原과 그 隣近 地域을 管轄하기 위해 지은 建物 이다.  地域 住民의 勞動力과 資金을 强制로 動員하여 지었으며 住民을 統制하고 思想運動을 抑壓하는 口實을 하였다.  이곳은 韓國戰爭으로 인해 모든  建物 이 破壞 되었지만 鐵筋構造에 벽돌과 시멘트로 壁을 쌓아 매우 견고하게 지어진 建物勞動黨舍는 現在의 모습으로 남아 分斷과 戰爭의 慘狀을 證言하고 있다.

 

 

노동당사

(勞動黨舍)

 

共産 治下 5년 동안 鐵原,金化,平康,抱川 一帶를 관장하며 良民收奪과 愛國人士들을 逮捕, 拷問, 虐殺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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