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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族/家 族 (募臨)

夫婦旅行

2021

 

일시 : 10월 3일

 

高會夫妻兒女

가장 훌륭한 모임은

夫婦,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다.

 

栗谷

 

 

(栗谷李珥)

 

栗谷 李珥(1536∼1584)先生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學文을 배워 13세에 進士初試에 合格하고 明宗 19년(1564) 生員試, 式年文科에 모두 壯元及第한 후 黃海道 觀察使, 大司憲 등과 吏曹·刑曹·兵曹의 判書를 歷任하였다. 朝鮮 儒學界 에 退溪 李滉 先生과 雙璧을 이루는 大學者로서 畿湖學派를 形成했고 朋黨의 調停, 十萬  軍隊의 養兵을 主張하였으며 大同法, 社倉의 실시에 努力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孝誠이 指極하였다.文廟에 從祀되었고 宣祖의 廟庭에 配享되었으며 坡州의 紫雲書院, 江陵의 松潭書院 등 20여개 書院에 祭享되고 있다. 烏竹軒은 江陵 儒賢인 崔致雲(1390∼1440)의 創建으로 아들 應賢은 사위 李思溫에게 물려주고 李思溫은 다시 그의 사위 申命和(사임당의 부친)에게,申命和는 그의 사위 權和에게 물려 주면서 그 後孫들이 管理하여 오던 중 1975년 烏竹軒 淨化事業으로 文成祠, 記念館 등이 建立되어 現在와 같은 面貌를 갖추고 先生의 偉業과 敎訓을 길이 追仰하게 된 것이다.

 

 

 

몸달아
기다리다
피어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 주신 노래는
아직도
맑은 이슬

뜨거운 그 말씀
재가 되겐 할 수 없어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 길
노을이 탄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코스모스를 노래함

 

내 마음은 코스모스 마음이고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 이다.

 

栗谷 樹木園

 

李珥(이이 1536 ~ 1584) 本官은 德水 자는 淑獻 호는 栗谷 이다. 官職은 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文成 이다. 朝鮮 中期 儒學者이자 겸세가인 李珥先生은 中國의 性理學과 差別되는 朝鮮 性理學會의 土臺를 닦은 人物로서 우리나라 精神史에 至大한 業績을 남겼다. 李珥 先生은 百姓을 根本으로 하는 政治를 해야 한다고 主張하면서 萬言封事를 지어 政治,經濟,社會改革을 東湖問答과 聖學輯要를 지어 君王의道를 개진 하였다. 또한 國防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10만 兩性論을 主張 하였으며 鄕約을 制定하여 地方自治제를 壯麗하고 社倉 制度를 施行하여 貧民을 救濟하는대 에 힘섰다.京畿道 坡州市에는 그의 影幀이 奉安돼 있는 書院인 紫雲書院(史蹟 第 525號)과 餘生을 보낸 樓閣 花石亭(京畿道유형文化材 제 61호)이 있다.

 

 

낙상홍

 

日本 원산의 낙옆 關木으로 암수 딴구루이다. 높이 2 ~ 3m 로 全國에서 잘자란다. 꽃은 5 ~ 6월에 연한 자색의 작은 꽃들이 모여 핀다. 열매는 붉은색으로 10월에 成熟한다. 觀賞用으로 利用한다.

 

 

花石亭

 

臨津江가에 세워져 있는 亭子로 朝鮮中期의 大學者 栗谷 李珥(栗谷李珥 1536 ~ 1584)가 弟子들과 함께 詩를 짓고 學文을 논하던 곳이다. 世宗 25년 (1443) 栗谷의 5 대조인 李明晨 이 亭子를 建立하는데 成宗 9년 (1478) 李珥의 曾祖父 이의석이 重修하고 이숙함이 花石亭 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壬辰倭亂때 불타 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顯宗 14년 (1673)에 後孫들이 復元하였으나 6. 25戰爭때 다시 消失되어 버리고 말았다. 1966년 坡州의 儒林들이 誠金을 모아 다시 復元한 것으로 建築樣式은 八작지붕 겹처마에 初翼工 形態로 朝鮮時代 樣式을 따랐다. 懸板 글씨는 朴正熙 大統領의 揮毫 이다. 

 

 

花石亭

(八歲賦詩)

 

栗谷이 8세때 이곳 花石亭 에서 지은 詩

 

林亭秋己晩 (임정추기만)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숲속 亭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詩人 의 詩想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에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丹楓은 햇볕을  向해 붉구나.

 

山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은 萬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邊防의 기러기는 어느곳으로 날아가는고 ?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임진강

 

花石亭에서 바라본 臨津江 壬辰倭亂때 宣祖가 移駐로 避難하게 되었는데 가는길에 暴風後가 너무심해 한치 앞을 볼수 없는 어려움이 닥쳤읍니다. 이에 避難길을 따르던 李恒福이 栗谷의 密封한 便紙를 열어보니  花石亭에 불을 지르라 고 쓰여 있었읍니다.  기름이 잘먹은 花石亭에 불이 붙자 관솔이 타듯 불길이 올라 나루 近處가 대낮같이 밝아져서  宣祖 一行이 무사히 江을 건널수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강

 

1593 년에 다시 漢陽으로 돌아오면서 이 江에 當到하였고 나라의 百姓을 위하여 殉國한 兵士들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 江邊 모래사장에 祭物을 차려놓고 慰靈祭를 지냈읍니다. 義州로 避難가던 당시 달빛조차 희미한 4월 그믐밤 暴風雨 속에서 勞心焦思 苦生끝에 이 나루를 건너게 된 쓰라린 아품을 記憶하고 이 江을 지키고자 내 목숨을 지푸라기와 같이 버린 용감한 忠臣들의 冥福을 祈願하는 가운데 宣祖가 痛哭하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 하여 神智江을 臨津江으로 改稱하게 되었다는 日話가 傳해저 내려오고 있다.

 

 

保護樹

 

느티나무 560年

 

平和의象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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