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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歷 史 物

東海岸旅行/正東津,別莊.花津浦

여행

 

(東海岸旅行)

 

 

 

정동진역

(正東津驛)

 

嶺東線의 鐵道驛이다. 江原道 江陵市 江東面 正東津里에 있으며, 코레일 管理한다. 驛의 이름인 “正東津”은, 朝鮮 時代에 光化門에서 보아 正東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1962年 11月 8日 에 旅客과 貨物을 取扱하는 驛으로 開業하였다. 以後 持續的인 人口 減少로 閉驛이 고려되었으나, 드라마 모래時計의 撮影地로 알려지면서 觀光 需要가 急增하여 비둘기호만 停車하는 簡易驛에서 새마을호가 停車하는 主要 驛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驛은 乘降場이 바로 白沙場 으로 連結되어 있어서 入場券으로 驛 乘降場은 물론 白沙場까지 나갈 수 있는 특이한 形態를 갖추고 있다.

 

  

모래시계소나무

(沙時計松樹)

 

江原道 江陵市에 조그만 바닷가로 全國에서 가장 海岸에 가까운 驛이 있는  곳이다. 드라마  '모래시계' 의 撮影場所 이기도 하다.  地名 의 大部分이 그러하듯 正東津은 서울 光化門의 定東쪽에 자리잡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江陵에서 7번 國道를 따라 南쪽으로 내려가면  바닷가와 나란히 奇巖絶壁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그 아래  우거진 松林 사이로 아기 자기한 白沙場이 펼져 친다. 正東津驛은 '모래시계'의 舞臺로 알려지면서 週末이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바다와 소나무, 한적한 歷史와 氣車 라는 浪漫的인 景致를 갖추고 있다. 1995년 年初에 放映된 모래시계는 韓國 放送史를 다시 쓰게 할 程度로 驚異的인 視聽率을 記錄한 드라마였다. 現在까지 모래시계의 感動을 記憶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래시계 撮影地를 찾아 江原道로 向하고 있다.

 

 

이승만대통령별장

(李承晩大統領 別莊)

 

1948년 제1 ~ 4대 大韓民國 大統領  1960년 4.19 義擧로 失脚. 하와이로 亡命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인 李承晩이 머물렀던 곳으로 1954년에 新築된 뒤 1961년에 廢虛가 되었다가 1999년 展示館으로 復元되었다.  別莊의 外部는 別莊답지 않게 아담하고 소박하며 허름하게 보인다. 內部는 寢室과 執務室로 쓰이던 房 두개와 居室로 區分되어 있으며 遺族들에게 寄贈 받은 物品들로 展示하여 李承晩大統領이 起居하던 時節의 모습을 그대로 再演 하였다. 단출한 家口와 소박한 物建들 그리고 生前의 寫眞들로 그 당시의 雰圍氣를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別莊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周邊의 울창한 松林과 한데 어우러진 花津浦의 두개의 湖水가 한눈에 보이는 까닭에 花津浦의 세 別莊 중 가장 景致가 뛰어나다는 評을 받고 있다. 조용히 바깥 風光을 즐기며 便安하게 쉴수 있는 平穩하고 조용한 別莊이다.

 

 

이승만박사자작한시

(李承萬博士自作漢詩)

 

                  萬枝同根만가지로 나누어져도 뿌리는같고                尊祖崇宗조상을 높이고 조상을 존중하여

                  百派一源백번갈라진 물도 근원은 하나로서               愛親睦族어버이를사랑하고 동족이 화목하고

                  愛親睦族어버이를사랑하고 동족이 화목하고                 敬老慈幼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斥邪護正틀린것을 물리치고 바른것을 수호하자            永無或簪길이길이 변함없게

 

화진포설화

 

이승만대통령낚시터

 

이기붕별장

(李起鵬別莊)

 

1920년대 外國人 宣敎師들에 의해 建築되어 使用된 建物로써 解放以後 北韓共産黨의 幹部 休養所로 使用 되어오다가 休戰以後 副統領 이었던李起鵬氏의 夫人 朴마리아 女史가 個人別莊으로 使用하다가 閉鎖되었으나 1999년 7월 歷史 安保 傳示觀으로 改收하여 觀覽客에게 展示하고 있다.

 

 

화진포의성

(金日成別莊)

 

花津浦의 城은 지하 1층, 地上 2층의 石造 建物로 지어져 당시 建築物로는 제법 華櫚함이 엿 보인다. 花津浦의 城에는 옛 別莊의 모습을 담은 寫眞資料를 비롯해 金日成 家族이 使用했던 應接 세트 등 各種 遺品이 模型物로 만들어져 展示 되었다. 海岸가 山기슭에 위치한 花津浦의 城은 光復 直後 建立, 韓國戰爭 以前까지 金日成이 아들 金正日, 딸 金慶喜와 함께 隨時로 利用했던 곳으로 本來 地下 1층, 地上 2 層의 石造物이었으나 戰爭 중 크게 毁損되어 64년 陸軍이 本來 建物을 撤去하고 지금의 1層 建物로 再建築 했었다. 새롭게 丹粧된 花津浦의 城은 內部에 金日成의 正體, 獨裁體制 構築課程, 韓國戰爭 挑發, 그리고 停戰協定 以後 北韓의 挑發蠻行 등 北韓關聯 資料를 판넬식으로 揭示하고 있으며 金正日과 金慶喜가 어린 時節 이 곳에서 찍은 寫眞 등 關聯資料寫眞도 展示하고 있다. 花津浦의 城의 絶景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마주 보이는 금구도라 불리는 바위섬으로 花津浦 海邊에서 3백여m 떨어진 금구도는 거북 模樣을 닮은데다 가을철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全體가 黃金빛으로 물든다.

 

 

광개토대왕릉

(廣開土大王陵)

 

高句麗 年代記에 따르면 廣開土大王 3 年(394)8 月경 花津浦 거북섬에 壽陵 築造를 始作했으며 廣開土大王 18년 8월 花津浦의 壽陵 築造 現場을 大王이 直接 訪問하기도 했던것으로 記錄되 있다. 廣開土大王이 逝去한 이듬해인 長壽王 2년 (414) 9월 29일 花津浦  거북섬에 廣開土大王의 屍身을 安葬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廣開土大王陵 守備隊가 王陵을 지키고 있었고 桂林(新羅)의 軍事와 守備隊간 잦은 紛爭이 있었던 것으로 技術하고 있다.  文咨明王 2 年에 이곳에서 廣開土大王의 望祭를 지냈다는 記錄이 있다. 現在 있는 거북섬 城의 構造는 2중 構造로 되어 있는데 섬의 頂上部인 약 45 m 높이의 高地를 中心에 두고 海岸線 地形을 따라 花崗巖을 利用하여 石築으로 築造하고 城壁上段은 삭토하여 還都를 開設한 痕跡이 200 m 에 뚜렸이 남아 있으며 山情附近의 瓦片과 柱礎石의 殘骸는 祠堂으로 推定하고 있다 섬 북쪽의 巖石 低地帶는 협축법으로 石築한 保護壁(城)과 防波城이 약 60m 높이 170  ~ 230 cm  3개 區間에 남아있다.

 

 

화진포해수욕장

(花津浦海水浴場)

 

民間人 出入이 許容되는 海水浴場 중에서 가장 北쪽에 자리하고 있다. 白沙場 길이는 약 1.7km이며, 水沈 1~1.5m로 경사가 매우 완만하다. 모래에 모나즈(monaz) 成分이 많아 減縮이 부드러우며, 개미와 昆蟲이 들끓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모래에서 쇳소리가 난다고 하여 鳴沙 라고도 불린다. 울창한 숲, 맑은 湖水, 奇巖怪石 등 조용하고 빼어난 周邊 景觀으로 인해 많은 避暑客이 몰려들며, 花津浦에 隣接하고 있어 年中 민물·바다 낚시꾼들로 붐빈다. 7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海水浴이 可能하다. 周邊의 觀光地로 統一展望臺 ·거진海水浴場 등이 있다.

 

 

화진포금강소나무숲

(花津浦金松)

 

金剛소나무는 우리나라 太白山脈을 中心으로 江原道. 慶尙北道,東海岸에 生育하고 있으며 代表的으로는 金剛山 地域에 分布하고 剛松,春陽木,金剛松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줄기가 곧고 붉은색을 나타내며 나무껍질이 얇고 材質이 優秀하여 文化財 建築用材로 使用되는 所重한 나무입니다 우리모두 소나무 保護에 힘 써야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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