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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歷 史 物

三陟/竹西樓

(三陟竹西樓)

 

 

 

現在 三陟市 성내동 오십천 絶壁에 위에 위치한 寶物 제219호인 竹西樓는 樓閣 이다. 樓閣 이란 一般的으로 기둥 層 받침이되어 마루 높이된 重層의 다락집을 말한다. 보통樓閣 의 1 層 바닥은 自然狀態 혹은 基壇으로 남겨두고 그 上層에우물마루 바닥이나 온돌바닥을 깔았다 이러한 樓閣은 그 機能狀으로 볼때 여러 種類로 區分 할수있으나 竹西樓는 朝鮮時代에 일종의 官衙施設로 活用된 樓閣이었다고 하겠다. 즉 朝鮮時代 三陟府의 客舍였던 眞珠館의 附屬 建物이었다. 客舍란 地방에 派遣된 中央管理들이 묵던 宿所를 말한다. 따라서 朝鮮時代 竹西樓는 公共施設로서 接待와 饗宴을 위한 場所로 活用되었다.물론 三陟地方 兩班 士大夫의 三陟을 찾아오는 詩人 墨客들의 精神 休養을 위한 休息空間으로 使用되었다.

 

 

  

삼척죽서루

(三陟竹西樓)

 

이 樓閣이 언제 創建되었는지는 確實하지 않지만 高麗 明宗때의 文人 金克己가 쓴 竹西樓詩가 남아 있는것으로보아 12세기 後半에는 이미 存在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구후 1403년 太宗 3 년 당시 三陟府使  金孝孫이 고쳐 지었다. 絶壁 위 自然巖盤을 基礎로 하여 建築되어 있고 樓 아래의 13개 기둥중 9개는 自然巖盤을 基礎로 나머지 여덟개의 기둥은 동로 많든 基礎위에 세웠으므로 13개 의 기둥길이가 각각다르다. 上層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形成하고 있다. 自然主義 의 傳統 建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關東第一樓라 할수있다. 現在는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原來는 5칸이었을것으로 推定되고있다.  原來 建物인 가운데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筒간이고 후에 增築된것으로 보이는 兩側칸의 기둥配列은 原來樣式에 拘礙받지않고 서로다르게 配置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天障은 燃燈 天障인데 左側 뒷간 一部는 우물天障으로 하였다. 樓閣에 걸린 글씨 중 第一溪亭 1662년 顯宗 3 府使 許穆이 쓴것이고 關東第一樓는 1711년 肅宗 37 府使 李聖肇가 섰으며 海仙遊戱之所는 1837 顯宗 3 府使 李奎憲이 쓴것이다. 이 밖에 肅宗 正祖 栗谷李珥先生 등 많은 名士들의 詩가 걸려 있다.

 

 

해선유희지소

(海仙遊戱之所)

 

憲宗 3 年 (1837년) 三陟府使 李奎憲글씨

 

제일계정

(第一係亭)

 

顯宗 代 (1660 ~ 1662년) 三陟府使  許穆 글씨

 

 

송강정철

(松江鄭撤)

 

鄭撤 (1536 ~ 1593년) 은 朝鮮의 中期의 詩人이자 政治家 이다. 本官 은 延日,또는迎日 자는 溪函 이고 ,호는 松江 시호는 文靑이다.

 

 

용문바위

(龍門巖)

 

新羅 第30代 文武王이 死後 護國龍이 되어 東海 바다를 지키다가 어느날 三陟의 五十川으로 뛰어들어 竹西樓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護國龍이 五十川으로 뛰어들때 竹西樓 옆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龍門巖 이다. 그 後 龍門바위는 아름다움과 長壽 多福의 祈願處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아와 龍門을 드나들며 所願을 빌었다. 竹西樓 東쪽 옛 연근당 자리 가까이에 있는 바위門 行草書로 龍門 이라 새긴 陰刻글씨가 남아 있으며 바위 上部에 聖血遺跡이 있다. 聖血은  豊饒와 多産을 意味하는 先史時代의 象徵物이지만 朝鮮時代에 와서는 民間神仰으로 定着되어 得男의 祈願處로 變貌하게된다. 즉 七月 七夕날 子正에 婦女子들이 聖血址에 다가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致誠을 드린후 좁쌀을 치마폭에 감추어가면 아들을 낮는다고 믿는 民間神仰이 있다. 龍門바위 聖血은 크기가 직경 3 ~4 cm 程度의 크기로 10개가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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