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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歷 史 物

江華道(高麗宮址,支石墓)

 

  

(高麗宮址)

 

 

高麗는 高宗 19년 蒙古의 侵略에 對抗하기 위하여  崔後의 勸誘로 都邑을 松都에서 天惠의 要素인 江華島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都邑터가 高麗宮址로 元宗 11년 開城으로 還都할때까지 38년간 使用되었다. 高麗宮址는 松都 宮闕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宮闕 뒷산 이름도 松嶽이라 하여 王道의 制度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고 한다.  1636년 丙子胡亂란 시 江華城이 靑나라 軍에게 陷落되는등 여러차례 戰亂을 겪으면서 宮闕과 城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高麗宮址에는 朝鮮時代의 建物인 昇平門,江華留守府東軒,吏房廳,鐘閣등이 復原되었다. 

 

 

 

외규장각

(外奎章閣)

 

朝鮮 貞祖때 王室 관련 書籍을 保管할 目的으로 江華島에 設治한 圖書館으로 王立圖書館인 奎章閣의 附屬圖書館 役割을 하였다.  設治 以後 王室이나 國家 主要行事의 內用을 整理한 儀軌를 비롯한 王室關係 書籍을 保管 하였으나 1866년 (高宗3년) 丙寅洋擾 때 프랑스軍이 江華都를 襲擊하면서 儀軌를 포함한  書籍등을 掠奪하였으며 나머지는 불타 없어졌다. 大韓民國 政府와 民間團體에서 프랑스政府에 계속해서 外奎章閣 圖書의 回收를 要求해왔으나  返還協商이 延期되거나 프랑스측에서 繼續協商을 遲延시키는등  消極的 姿勢를 보이다 2010년 11월 12일 G 20 頂上會議에서 兩國의 大統領간에 外奎章閣 圖書를 5年마다 更新하는 賃貸形式으로 貸與하기로 合意 하여 145년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강화동종

(江華銅鐘)

 

朝鮮時代 江華城門의 여는時間과 닫는時間을 알리는데 使用하였던 鐘으로 높이가  198 cm 입지름이 138 cm 이다. 鐘 꼭대기는 龍무늬로 彫刻되었고 韓國鐘의 特色인 音筒이 없다, 鐘 中央에는 두 鐘의 橫線을 둘러 上,下로 2 等分 하였으며 어깨 부분에는 꽃무늬로 乳廓帶가 있고 그안에 9개의 연꽃이 새겨져 있다. 橫線아래로는 鐘 入口 바로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粧飾은 하지않았으며 만든時期 (肅宗 37년)를 알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鐘 中央을 띠로 粧飾하는 것을 高麗時代와는 다른 朝鮮時代 文化의 特徵이라 하겠다.

 

 

강화유수부이방청

(江華留守府吏房廳)

 

江華留守府의 行政實務者들이 業務를 보던곳이다. 孝宗 5년 留守 鄭載圭가 세웠고 貞祖 7년 留守  金魯鎭이 內部를 修理 하였다.  1915년 以後 登記所로 使用되다가 1972년 有形文化財로 指定되었다. 1977년 江華 重要國防遺跡 復原淨化事業으로 整備 되었다.  構造는 ㄷ 자형 單層 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 規模이다. 

 

 

유수부동헌

(江華留守府東軒)

 

朝鮮時代 官衙의 建物로서 江華地方의 中心 業務를 보던 東軒은 오늘날 郡廳과 같다. 英祖 45年 (1769)에 留守 黃景源의 顯允觀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現在는 明威軒 이란 懸板이 걸려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名筆이며 學者인 白下 尹淳이 썼다. 建物은 正面 8칸 側面 3칸  겹처마에 단층지붕이며 2중의 長臺石 基壇 위에 네모꼴 柱礎石을 놓고 네모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강화산성

(江華山城)

 

高麗가 代蒙抗爭을 위해 高宗 19년(1232)에 都邑을 江華로 옮기고 宮闕을 지을때 都城도 함께 쌓았는데 開城의 城郭과 비슷하게 內城,中城,外城으로 이루었졌으며 1232년 부터 築造되었다. 이중 內城에 해당하는것이 現在의 江華山城 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肅宗 3年 (1677)에 現在와 같은 石城을 이루었다. 城의 주위 길이는 7,122 m 이며 4개의 大門 4개의 暗門, 2개의 水門, 2개의  城門將廳이 있었다. 南門은 晏波樓,北門은 鎭松樓,東門은 望漢樓, 西門은 瞻華樓 이다.

 

 

강화도부근리지석묘

(江華富近里支石墓)

 

1964년 7월 11일 史蹟 제137호로 指定되었다. 지금까지 發見된 北方式 고인돌 가운데 大型에 속하는 것으로, 地上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7.1m, 너비5.5m이며 花崗巖으로 되어 있다. 富近里 고인돌은 모두 10  基로, 非指定인 128번 고인돌을 제외한 9 基가 世界遺産에 包含되어 있다.大村부락 마을會館 앞에 있으며 美軍部隊 轉入 등으로 現在 4 基만 남아 있다 支石은 두개의 긴 굄돌만 있는데 方向은 대략 南北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表面 調査가 이루어졌을 뿐 아직 學術的인 發掘調査는 行 해지지 않은 遺跡이다. 이 고인돌 바로 옆에 또 하나의 破壞된 고인돌이 있는데, 굄돌은 없어지고 판석의 뚜껑만 垂直으로 엎어진 채 남아 있다. 이 밖에도 江華道에는 삼거리·하도리 등지에 北方式 과 南方式 이 10여 기 남아 있어서 富近里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社會의 規模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강화성당

(江華聖堂)

 

國家指定 文化財(史蹟 제424)인 江華聖堂은 外部는 傳通韓屋 樣式으로 內部는 Basilica 樣式으로 지어진 서구 基督敎의  土着化 産物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漢屋 聖堂이며 지금까지 每 主日 禮拜가 進行되고 있다.

 

 

玄關기둥의 5매 柱聯

 

無始無終先作形馨眞主宰

처음도 없고 끝도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분이 진실한 주재자 이다.

 

宣仁宣義聿昭拯濟大權衡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 하느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神化周流囿庶物同胞之樂

하느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것이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 이다.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교회종

(敎會鐘)

 

1914년 英國에서 江華聖堂에 寄贈한 鐘은  1944년 日帝에 徵發당하고 現在의 鐘은 梵鐘의 形態로 1989년 敎友들의 奉獻으로 製作 하였다.

 

 

월곶진

(月串鎭)

 

月串鎭은 漢江 河口에 위치하여 鹽河를 通하여 仁川方面을 거쳐 三南地方으로 往來할수 있는 要衝地에 位置하고 이었다. 따라서 韓國戰爭 以前만 하드라도 매우 蕃盛한 浦口중 하나였다. 元來 交通에 있던 鎭을 朝鮮 孝宗 7 年에 江華留守 洪重普가 이곳으로 以前 하였다고 한다. 月串鎭 周邊에는 月串墩臺와 黃衡宅址,燕尾亭 등의 遺跡이 있다. 周邊에서는 相當量의 기와편과 자기편등이 發見되고 있다.

 

 

조해루

(朝海樓)

 

월곶돈대

(月串墩臺)

 

月串鎭에 속한 月串墩臺는 南으로는 鹽河와 連結하고 北으로는 조강을 通하여 西海로 進出할수 있다. 또한 過去 서울,仁川,延白 등지로 交通할수 있는 월곶 나루가 있던 海上路의 要衝地 이기도 하다, 月串墩臺는 朝鮮 肅宗 5 年 江華留守 尹以濟가 整備한 墩臺로 楕圓形을 이루고 있으며 規模는 東西 폭 47 m 南北 폭 38 m 이다. 西쪽 下端部에는 月串鎭의 門樓인 朝海樓를 復原 하였다.

 

 

황형택지

(黃衡宅址)

 

朝鮮中期 武臣이었던 黃衡이의 옛 집터이다. 先生의 자는 彦平,諡號는 장무이며 본관은 昌原으로 성종 11년 武科및 進獻使에 及第하고 1486년 武科 중시에 壯元及第 하였다. 以後 해산진 僉節制使,훈련도정,義州牧使,회령부사,咸鏡道,慶尙道 兵馬節度使를 歷任하고  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中宗 5年 三浦倭亂시 全羅左道 防禦使로 薺浦에서 倭敵을 크게 무찔렀다. 中宗 7년 咸鏡道 地方에서 野人들이 叛亂을 일으키자 이를 鎭壓하고 平安道,咸鏡北道 兵馬節度使를 거쳐 工曹判書에 이르렀다. 王이 그의 公을 讚揚하여 燕尾亭을 하사 하여 이곳 월곶리에서 晩年을 보냈다고 한다. 宅址는 月串鎭을 設置한 뒤 官衙로 使用 하였다.

 

 

 

燕尾亭高二水中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三南漕路檻前通

삼남지방 조운길이 난간앞에 통했네

 

浮浮千帆令何在

떠나니던 천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想是我朝淳古風

생각건대 우리나라 순고한 풍속 이었네

 

 

연미정

(燕尾亭)

 

高麗時代 세워진 이 정자는 墩臺 앞 물길이 제비꼬리 같다하여 燕尾亭이라 이름 붙였다. 寫眞은 江 건너 北韓이 咫尺에 보이는 月串墩臺의 城郭 안이다. 500년 넘은 느티나무 두구루가 웅장한 姿態 감싸고 있는 燕尾亭은 曲線을 그리며 날엽하게 올라간 처마의 선, 四方으로 탁 트인 정자의 모습과 城壁 같은 墩臺가 둘레를 치고 있어 아늑하고 風光이 秀麗하다. 정자에 올라 바라본 고요한 아침 風景과 해지는 夕陽은 가이 숨을 멈추게 한다.  귀한 사람과 演戱를 나누는 마음으로 撮影에 임 한다면 멋진 寫眞 뿐 아니라, 귀한 時間과 空間을 누리는 體驗이 될것 입니다.

 

 

광성돈대

(廣城墩臺)

 

廣城墩臺는 廣城堡에 所屬된 3개 墩臺중 하나로서 肅宗 5년 咸鏡道,黃海道,江原道의 僧軍 8,000명과 御營軍 4,300명이 40 일만에 完工 하였다.  1977년 砲左 4 個所와 砲 3門이 復原 設置 되었다. 大砲는 홍어포 라고도 하며 射程거리 700 m 로서 포알은 火藥이 爆發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자체는 爆發하지 않아 威力은 弱하다. 丙子胡亂떼에도 使用되었다고 한다. 小砲의 射程거리는 300 m 로 포알은 大砲와 같다. 大砲는 照準이 않되나 小砲는 照準이 된다. 작은것은 불량기라 하고 프랑스軍이 쓰던것이라  한다.

 

 

광성포대

(廣城砲臺)

 

廣城砲臺는 朝鮮後期 江華道 海岸守備를  위해 設置된 防禦施設 가운데 하나이다. 國防 强化策으로 肅宗은 江華道내에 內城,外城, 12진보,54墩臺 등을  築造하여 要塞化를 이루었으나 丙寅洋擾와 辛未洋擾를 거치면서 火力을 增加 시키는것이 시급한 課題로 登場함에따라 高宗 11년 龍津鎭,廣城鎭,德津鎭,草芝鎭에 砲臺를 設置 하였다.  各各 9좌 4좌 3좌 의 標的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중 가장  規模가 큰  中央砲隊는 길이 80 m  砲左의 크기 약 8m 程度로 推定하고 있다.  1878년 雲揚號事件을 계기로 外勢에 門戶를 開放함에 따라 破壞 되었던 것을 2004년 發掘調査를 실시 遺跡이 確認되어 復元整備 하였다.

 

 

광성보

(廣城堡)

 

朝鮮 孝宗 9年에 設治한 江華道 海岸守備 陣地의 하나 이다. 1679 년 肅宗 5年에 江華道의 國防施設을 擴張할때 하도墩臺,廣城墩臺,를 함께 築造하여 이에 所屬 시켰다. 辛未洋擾 때 美國軍隊와 死鬪를 벌린 激戰의 現場으로서  이 때 戰死한 어수영 將軍을 기리는 戰蹟碑와 350 여명의 殉國 英靈들을 기리는  辛未殉義塚이 있다.

 

 

대포

(大砲)

 

浦口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한 다음 뒤쪽 구멍에 點火하여 射擊하는 浦口裝塡式火砲 로 射程거리는 700 m 이며 朝鮮英祖때부터 주조하여 使用하였다. 火藥의 爆發하는 힘으로 砲彈은 날아가나 砲彈 自體는 爆發하지 않아 威力은 弱하다.

 

 

갑곶돈대

(甲串墩臺)

 

甲串墩臺는 史蹟 제306호로 高麗때 江華의 外城으로 江華海狹을 方禦하며 觀察하고자 墩臺로 肅宗 5年 (1679)에 築造되었다.

 

 

대포

(大砲)

 

浦口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한 다음 뒤쪽 구멍에 點火하여 射擊하는 浦口裝塡式火砲 로 射程거리는 700 m 이며 朝鮮英祖때부터 鑄造하여 使用하였다. 火藥의 爆發하는 힘으로 砲彈은 날아가나 砲彈 自體는 爆發하지 않아 威力은 弱하다.

 

 

소포

(小砲)

 

浦口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한 다음 뒤쪽 구멍에 點火하여 射擊하는 浦口裝塡式火砲 로 射程거리는 300 m 이며 우리나라 在來式 火砲중 가장 發達된 形態를 갖추고 있다.

 

 

초지진

(草芝鎭)

 

 

草芝鎭은 海上으로부터 侵入하는 外的을 防禦하기위하여 朝鮮孝宗 7년에 構築한 要塞이자 高宗 8년 4월에 通商을 强要하며 來侵한 美國로저스 아세아 艦隊와  熾烈한 激戰을 벌인 激戰地 이다. 당시 美國,日本의 艦隊는 優秀한 近代式武器를 가진대 비해 우리軍은 사거리도 짧고 正照準도 안되는 劣勢한 武器로 外勢에 對抗에 싸웠던 것이다. 특히 日本軍의 雲揚號 侵攻은 高宗 13 년에 强壓에의한 江華道 守護條約을 맺어 仁川,元山,釜山港을 開港하게 되고 또한 우리나라의 主權을 喪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草芝鎭에는 兵馬節制使 1인 軍官 11인 軍事 320인 전건 3 척이 駐屯 하였었다. 이곳은 民族 試鍊의 歷史的 現場으로서 愛國愛族 및 護國精神의 敎育長으로 活用하고자 1973년 城郭을 保守하고 당시의 大砲를 展示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포

(大砲)

 

浦口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한 다음 뒤쪽 구멍에 點火하여 射擊하는 浦口裝塡式火砲 로 射程거리는 700 m 이며 朝鮮英祖때부터 주조하여 使用하였다. 火藥의 爆發하는 힘으로 砲彈은 날아가나 砲彈 自體는 爆發하지 않아 威力은 弱하다.

 

 

어재연장군

(魚在淵將軍)

 

朝鮮 後期에 武臣 으로 1841년 (顯宗7)에 武科에 合格하여 忠淸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866년 丙寅洋擾 때에는 廣城鎭을 守備하였으며 1871년에 辛未洋擾가 일어나자 鎭撫中軍 으로서 廣城堡에서 美軍과 熾烈한 戰鬪를 벌였으나 戰力의 劣勢로 敗하고 殉節 하였다. 後에 兵曹判書知三軍府事 에 追從되었다. 諡號는 忠莊公 이다.

 

 

쌍충비

(雙忠碑)

 

1871년 辛未洋擾 때 廣城堡 戰鬪에서 殉節한 중군 魚在淵외 59명 殉節碑 이다.  1기는 廣城把守殉節碑로 碑의 規模는 폭 81m 높이 168 m 두께 25 cm 의 兩面碑로 1873년 建立 된것이다. 다른 1기는 魚在淵 과 魚在淳 殉節碑 인데 폭이 58 cm 높이 177 cm 두께  26.5 cm 의 兩面碑로 역시 1873년에 建立 했다. 高宗때부터 祭祀를 지내왔으며 1970 년부터는 魚在淵의 後孫들이 祭祀를 올려 忠節의 遺業을 追慕하고 있다.

 

 

불랑기

(佛狼機)

 

佛狼機는 壬辰倭亂을 契機로 널리 使用된 火繩으로 砲 1문에 다섯개 에서 아홉개 의 子砲를 結合하여 連續 射擊할수 있는 發達된 火氣이다.

 

 

손돌목돈대

(孫乭項墩臺)

 

孫乭項墩臺는 朝鮮 肅宗 5年 1679 年에 築造된 墩臺로 원래 墩臺 中央에 3칸의 武器庫가 있었고 砲左 3 개가 있었다. 墩臺 넓이는 778 m 에 城郭길이가 108 m 이다. 高宗 8年 (1871) 辛未洋擾때 美國 海軍과 熾烈한 白兵戰이 벌어졌던 現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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