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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B 旅 行/登 山

雲吉山

(雲吉山)

 

일시: 2012년 1월 19 일

 

새해 맞이 登山

 

 

구름이 가다가 山에 걸려서 멈춘다고 하여 운길산 (雲吉山) 이라 불린다고 한다. 江原道 金剛山에서 發源하여 華川,春川을 거쳐 약 371 km 를 흘려 내려온 北漢江물과 大德山에서 發源하여 寧越,忠州를 거쳐 흘러내려온 南漢江물이 서로 만나는 地点에 位置하고 있으며 산수 (山水)가 모두 秀麗하게 調和를 이루고 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 이라면 장미꽃 넝쿨우거진 그런집을 지어요?

(다리에 부상을 입은 용산역 비둘기)

 

 

자 出發 합시다.

마치 遊擊 訓練 같습니다.아이고 힘들어, 昨年하고 또 다르네. 쉬었다 갑시다.

 

 

기분 좋을때는

이렇케 表現 하지요.

 

 

운길산정상

(雲吉山頂上)

 

雲吉山(610m)은 서울에서 東쪽으로 40km, 北漢江과 南漢江이 合流되는 兩水里에서 西北쪽으로 4km 거리에 솟아 있는 山이다. 山 아래까지 市內버스가 連結돼 交通이 便利하다. 山勢가 부드럽고 登山路가 順坦하여 家族山行이나 가벼운 週末山行에 適合한 곳이다. 특히 山 중턱에 있는 水鐘寺에는 地方文化財 제22호인 八角 5층 石塔과 500년이 넘는 壽齡을 자랑하는 銀杏나무가 있다.무엇보다도 南漢江과 北漢江을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景觀이 뛰어나 海東 第一의 寺刹이라 옛사람들은 傳했다.徐居正, 草衣先師, 丁若鏞, 宋寅, 李珥 등이 머물던 곳으로 시 몇 수가 傳해진다. 물 맛이 좋아 茶와도 因緣이 깊은 곳이다.

 

(雲吉山水鐘寺)

 

 

北漢江과 南漢江이 만나는 이곳 운길산 雲吉山는 멀리 新羅時代부터 내려오는 옛 伽藍이다. 高麗太祖 王建이 祥瑞로운 氣運을 좇아 이곳에 이르러 구리鐘을 얻음으로써 부처님의 헤랑을 東海高麗를 建國했다는 傳說이 傳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世宗 21년에 이르러 世宗의 여섯째아들 錦城大君이 貞懿翁主의 浮屠를 세우고 金製 9층탑 水亭舍利函 에다  靑瓷항아리를 담아 浮屠안에 모셨다. 1458년 世祖가 두물머리에서  머물다 새벽에 종이 울려 올라와 보니 그 鐘소리는 다름아닌 바위굴속에서 물이떨어지는 소리였다 世祖는 굴속에서 18 羅漢을 發見하고 功德을 쌓았으며 八道傍白에 重創을 名하였다. 道場은 이러힌 緣由에 의해 水鐘寺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459년에 水鐘寺塔을 建立하였다.  

 

 

 

운길산수종사

(雲吉山水鐘寺)

 

 

약사전

(藥師殿)

 

 

불이문

(不二門)

 

미륵불

(彌勒佛)

 

지금은 천인(天人)을 위하여 설법(說法)하고 있는 僧侶이나, 釋迦가 입멸(入滅)한 後에 來世에 成佛하여 衆生을 制度한다는 菩薩. 도솔천(兜率天)에 살며 56억 7천만 년 後에 衆生을 救濟한다는 菩薩이다.

 

 

수종사전경

(水鐘寺全景)

 

보호수

 

樹種은 銀杏나무로서 壽齡은 약 500여년으로 追從되며 南楊州市 1982년 10월 15일 指定 保護樹로 管理하고 있다.

 

수종사 (水鐘寺) 대웅보전(大雄寶殿)에서 바라본 부처님의 밭같 世上 모습은 이러하다.

 

해탈문

(解脫門)

 

범종

(梵鐘)

 

대웅보전

(大雄寶殿)

 

정의옹주사리조탑

(貞懿翁主舍利造塔)

 

수종사오층석탑

(水鐘寺五層石塔)

 

水鐘寺는 朝鮮世祖 6년 에 建立되었다고 하는데 이 塔은 現在 大雄殿 옆에 있지만 原來는 境內에서 東쪽으로 벗어난곳에 있었다. 基壇으로 부터 塔身에 이르기까지 八角形의 平面構造를 이루고있는데 地臺石과 基壇의 角面에는 直四角形 틀안에 안상이 세겨져 있다. 3차례에 걸쳐 移轉과 海菜 復元되었는데 그때마다 많은 舍利가 出土되었다. 1939년에는 舍利裝置인 高麗靑瓷 안에서 金銅九層塔,銀製淘金肉刻感이 각 1점씩 나와 寶物 제259호로 指定되었다.

 

 

남양주수종사부도

(南楊州水鐘寺浮屠)

 

王命에 의하여 세워진 水鐘寺에 남아있는 八角原糖型 浮屠이다. 八角原糖型 浮屠는 지붕과 기왓골등 細部는 木造建物의 樣式을 模倣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지붕돌 落水面에 태종태후정의옹주사리조탑시주기계유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십월일입 (太宗太后貞懿翁主舍利造塔施主杞械兪氏金星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立) 이라는 名文이 새겨져 있어 世宗 21년 (1439년) 王室의 命으로 製作 되었음을 알수있다.

 

 

응진전

(應眞殿)

 

2011세계유기농대회정

(世界有機農大會亭)

 

環境保全과 安全한 農産物 生産및 地域經濟 活性化를 위해 아시아 最初로 2011년 제17차 世界有機農大會亭 (IFOAM OWC)를 南楊州市 早雁面 一圓에서 開催한것을 記念하기 위해 이곳에 2011 世界有機農大會亭을 建立하였다.

 

 

2011 世界有機農大會亭 에서 바라본 兩水里의 모습  두물머리,北漢江 鐵橋, 自轉車길, 雲吉山驛등 보인다.

 

 

정약용필적하피첩

(丁若鏞 筆蹟 霞帔帖)

 

序文에 적혀있듯이 丁若鏞이 康津에 流配되었을 때 아내 洪氏夫人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부쳐오자 두 아들에게 敎訓이 될 만한 句節을 直接 짓고 써준 것이다. 製作年代는 庚午年 즉 1810년(純祖 10) 7월과 9월로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이 書帖의 數量은 原來 네 첩이었으나 現在 세 첩만 알려져 있다. 現在의 《霞帔帖》3첩은 그 하나가 缺落된 셈인데, 各帖 表紙에 ‘霞帔帖’이란 題目은 좀 남아 있으나 그 아래의 ‘첩 順序’[帖次]는 脫落되어 몇 번째 帖이 없는지를 알 수 있다. 《霞帔帖》3첩은 그 중 두 첩에 각각 1810년 7월[首秋]과 1810년 9월[菊秋]의 서문이 있어 康津 流配時節인 1810년 己年作이란 점에 意味가 있다. 또 原來의 네 첩 모두가 傳하지는 않지만 現在의 세 첩 중에는 두 아들에게 警戒하는 句節을 지어 써주다[“作戒語以遺二子”ㆍ“寫戒子句”]는 序文이 있어 丁若鏞이 直接 짓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康津 流配 以後 丁若鏞의 典型的인 行草書風을 보여주며, 특히 세번째 帖에 실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는 다른 書帖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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