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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B 旅 行/登 山

南漢山城

(南漢山城)

 

일시: 2011년 5월 28일

 

 

南漢山城은 朝鮮時代 뿐 아니라 三國時代부터 天然의 要塞로 重要한 役割을 하던곳이다. 百濟의 始祖인 溫祖의 王城이었다는 記錄이 있고 羅唐戰爭이 한창이던 新羅文武王 12년 (672)에 漢山州에 쌓은 周章城이라는 記錄도 있다. 高麗時代에는 蒙古의 侵入을 擊退한곳 이기도 한곳이도 하고 日帝强占期엔 抗日運動의 據点이 되기도 한곳이다. 그러나 南漢山城은 주로 丙子胡亂으로 記憶 는곳이다. 朝鮮 仁祖 14년 (1636년)에 靑나라가 侵略해오자 王은 이곳으로 避身하여 抗戰하였으나 王子들이 避身해 있던 江華島가 陷落되고 敗色이 짙어지자 世子와 함께 城門을 열고 三田渡에 나가 恥辱的인 降伏을 한 場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南漢山城은 敗北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城의 外部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接近이 어렵고 內部는 경사가 緩晩하여 넓은 耕作地와 물을 갖춘 天惠의 전력적인 要衝地이기 때문에 丙子胡亂당시 수적 劣勢에도 불구하고 靑軍에 陷落 당하지 않고 47일이나 抗戰 할수 있었던 것이다. 이 처럼 오랜기간동안 迂餘曲折을 가진 城의 歷史처럼 城郭의 形態 또한 單純하지 않아서 하나의 閉曲線으로 이루어진 것이아니라 本城,봉암성,한봉성,신남성과 5개의 甕城으로 이루어진 複雜한 構造이다. 仁祖 4년 1625년에 中央部의 가장 큰 閉曲線인 本城인 旺盛되었고 丙子胡亂 以後 防禦力을 높이기 위하여 東쪽의 봉암성,한봉성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增築을 거쳐 現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어장대

(守禦將臺)

 

守禦將臺는 指揮와 觀測을 위한 軍事的 目的에서 지은 樓閣이다. 南漢山城에 있던 5개의 將臺중 唯一하게 남아있으며 城 안에 남아있는 가장華櫚하고 雄壯하다. 仁祖 2년 1624년 南漢山城 築工때 斷層으로 지어 서장내라 불리던 것을 英祖 27년 1751년 留守 이기진이 王命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짓고 수어장대 (守禦將臺)라는 扁額을 달았다. 守禦將臺 2층 內部에는 무방루 (無忘樓)라는 扁額이 달려 있는데 丙子胡亂때 仁祖가 겪은 試鍊과 8년간 靑나라에 不毛로 잡혀 있다가 歸國하여 北伐을 이루지 못하고 僧下한 孝宗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英祖가 지은것이다. 現在 無望樓 扁額은 守禦將臺 오른편에 保護閣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保管하고 있다.

 

 

무망루

(無忘樓)

 

朝鮮 英祖 27년 1751년 廣州 留守 이기진 (廣州留守李箕鎭)의 내편 (內便) 門樓로서 그 편액 (扁額)이 2층 樓閣에 있어 1989년 前脚을 建立하고 이 안에 현판을 (懸板)을 새로 設置 一般人이 볼수 있게 하였다. 無忘樓는 丙子胡亂때 仁祖가 겪은 試鍊과 8년간 靑나라 심양 (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歸國 후 북벌을 (北伐)을 꾀하다가 昇遐한 孝宗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英祖가 이름지은 것이다.

 

 

서암문

(西暗門)

 

暗門은 敵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設置한 一種의 秘密通路이기 때문에 크기도작고 敵에게 쉽게 識別될수 있는 施設도 設置하지 않았다. 이 暗門은 城壁의 흐름方向과 달리 入口가 北西쪽으로 向하고 있어 外部에서 쉽게 觀測되지 않토록 하였다. 또한 北東쪽의 城壁을 突出하여 暗門으로 接近하는 저을 側面에서 效果的으로 攻擊할수 있도록 하였다. 原城性에 設置된 12개의 暗門의 外側 개구부 (開口部)는 大部分 홍예식 (虹霓式)이지만 제2暗門과 더불어 이 暗門의 開口部는 평거식 (平据式)이다. 仁祖 15년 1637년 1월 23일 한방중에 襲擊해온 靑兵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暗門 부근을 西暗門 破敵地라 부른다.

 

 

매바위

 

南漢山城의 東南쪽 築造를 맡았던 이회 (李晦)는 工事에 完璧을 기하기 위하여 徹底하게 點檢을 하여 工事를 進行하다가 期日內에 完工을 하지못하였다. 뿐만아니라 工事費用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雪上加霜으로 工事費用이 不足하게 된 理由가 이회將軍이 酒色雜技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結局 이회는 斬首刑에 처하게 되었고 그는 죽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뒤 아무런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罪가 있는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그가 絶命하는 瞬間 매 함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슬피 울다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청량당

(淸凉堂)

 

이 祠堂은 南漢山城을 쌓을때 東南쪽 築城의 責任者였던 이회 (李晦)將軍과 그의 夫人의 넋을 기리기 위해 建立되었다. 이화는 工事費를 橫領했다는 陋名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消息을 들은 夫人 宋氏는 漢江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는 죽을때 自身의 罪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는 豫言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後에 陋名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工事가 가장 잘된것으로 알려지자 祠堂을 지어 초산을 安置하고 넔을 기렸다. 元來의 淸凉堂은 6.25 戰爭때 燒失되어 西將臺가 있는山 이름이 淸凉山이므로 淸凉堂이라 이름 지었다.

 

 

병암남성신수비

(屛岩南城新修碑)

 

屛岩南城新修碑는 先祖들의 建築實名制를 한 斷面으로 理解할수 있는 重要한 金石文이다. 正祖 3년 1776년 6월 18일까지 약 50여일간에 걸쳐 守禦使 서명웅의 指揮아래 南漢山城을 大大的으로 補修한 事實을 傳해지고 있다. 비분에는 山城을 增,改築하는데 돈 1만냥과 쌀 900석의 財政을 投入하였다는 것과 당시 監督官인 光州府尹 이명중의 指揮아래 벽돌,石灰,등을 구어 運搬하는 管理者와 補修 領域을 18區域으로 나누어 擔當한 18 매장의 이름등이 記錄되어 있다. 두개의 돌로 되어있고 屛岩 이란 글자가 鮮明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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