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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B 旅 行/登 山

峨嵯山

(峨嵯山)

 

장소: 아차산

 

일시: 2011년 10월 18일

 

 

峨嵯山과 峨嵯山城의 漢字表記는 普通  峨嵯山. 峨嵯山城 으로 한다. 峨嵯山城에 대한 가장 앞선 記錄인 廣開土王碑 414년 에는 아단성 (阿旦城)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하단 (阿旦)은 漢字의 소리 (音)를 빌어 表記한 것이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아차성 (阿且城)으로도 表記 되면서 아단 (阿旦)보다는 아차 (阿且)가 자주 쓰였다. 단 (旦)과 차(且)가 金石文이나 板刻 印刷에서 흔히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기 떼문이다.  단 (旦) 자가 朝鮮太祖 李成桂의 나중 이름과 같기 때문에 피휘 (避諱) 임금이나 祖上의 이름자를 使用하지 않음)해서 차 (且)로 澤하므로 피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高麗時代 後期부터 本來의 峨嵯에 뜻(訓)을 붕한 아차산 (峨嵯山)이 쓰이면서 現在까지도 峨嵯山 峨嵯山城 으로 表記한다. 아 (峨) 아 (아)는 모두 山이 우뚝솟다. 라는 뜻이다. 다만 峨嵯山城의 경우 文化財廳이 1973년 國家事蹟 제 234호로 指定 告示할때 三國史記 를 根據로 峨嵯山城 으로 表記하면서 公式 文化財 案內文 등에는 이를 따르고있다.  

 

 

 

 

명품소나무2호

(名品松2호)

 

峨嵯山의 바위틈에서 한가을 바라보며 오랜歲月 歷史와 함께한 소나무 이다. 밑동에서부터 여러개로 자라올라 하늘을 향해 쭉쭈뻗은 품세가 一品이다. 하늘을 치솟는 듯한 붉고 生動感있는 樹幹은 씩씩하고 勇猛한 高句麗의 氣象을 담고있는 듯하여 峨嵯山名品 소나무 2호로 命名 하였다.

 

 

아차산1보루

(阿且山 1 堡壘)

 

峨嵯山 5堡壘에서 南쪽으로 200 m 떨어진 峰우리에 만들어진 것이다. 1994년 地表調査에서 高句麗 吐器彫刻이 여러개 發見되었고 堡壘東쪽 南쪽 에서 城壁이 確認되었다. 遺跡의 存在가 제대로 確認되지 않은 始期에 南쪽城壁 一部를 破壞하고 峰우리 頂上을 지나는 登山路가 만들어 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堡壘 바깥을 지나도록 새로운 길을 만들어 遺跡을 保存하고 있다. 이곳 峨嵯山 1堡壘에서는 南쪽과 南東쪽으로 峨嵯山城과 風納土城,夢村土城 자리를 한눈에 볼수있고 北東쪽으로는 峨嵯山  5 堡壘를 볼수 있다.

 

 

명품소나무2호

(名品松2호)

 

峨嵯山의 바위틈에서 한가을 바라보며 오랜歲月 歷史와 함께한 소나무 이다. 밑동에서부터 여러개로 자라올라 하늘을 향해 쭉쭈뻗은 품세가 一品이다. 하늘을 치솟는 듯한 붉고 生動感있는 樹幹은 씩씩하고 勇猛한 高句麗의 氣象을 담고있는 듯하여 峨嵯山名品 소나무 2호로 命名 하였다.

 

 

고구려정

(高句麗亭)

 

峨嵯山은 高句麗,百濟,新羅 古代 三國時代의 治熱한 角逐場 이었던 峨嵯山城과 高句麗 軍事寶樓가 있는 우리民族歷史의 現場으로서 도도히 흐르는 漢江과 어우러진 首都서울의 絶景을 한눈에 볼수있는 이곳에 1984년 콘크리트 建築構造로 八角亭을 建立 하였다. 八角亭은 그동안 많은 住民들과 登山客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老後로 인해 建物全體가 기울어지는 現狀이 發生하여 精密診斷後 2008년 1월에 撤去하였으며 南韓 最大의 高句麗 遺跡 遺物이 山材한 이터에 古代史 硏究 歷史學者들의 徹底한 考證과 自問을 커쳐 2009년 2월에 着工하여 같은해 7월에 竣工하였으며 名稱을 八角亭에서 高句麗亭으로 變更 하였다.

 

 

아차산5보루

(阿且山 5 堡壘)

 

峨嵯山 6 堡壘에서 南쪽으로 약 250 m 떨어진 작은 峰우리 에 있다. 둘레 약 158 m 內部面積은 약 1,818 ㎡ 로 推定된다. 이곳에서는 漢江 南쪽의 岩寺洞에서 風納土城,夢村土城등 蠶室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으며 頂上部와 連結된 北쪽 비탈면에 石築 一部가 露出되어 毁損 되고 있었던것을 흙을 덮어 保存하고 있다. 이곳 頂上의 돌무더기는 比較的 最近에 쌓은것으로서 무너진 성돌을 주워 使用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統一新羅 時代의 吐器彫刻이 여러점 發見되어 三國時代 堡壘를 破壞하고 統一新羅時代 古墳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推定하기도 한다.

 

 

峨嵯山 5 堡壘에서 바라본 夢村土城과 風納土城이 한눈에 보인다.

 

명품소나무 1호

(名品松1)

 

峨嵯山의 바위틈에서 한가을 바라보며 오랜歲月 歷史와 함께한 소나무 이다. 四方을 向해 뻗은 가지는 골곡이 自然스러우며 수피가 붉고 아름다워 우아하면서도 端雅한 姿態를 자랑하고 있어 峨嵯山 名品소나무로 命名하였다.

 

 

아차산성

(峨嵯山城)

 

峨嵯山城은 三國史記에 記錄된 아단성 (阿旦城)또는 아차성(峨嵯城)이다. 三國史記에 이 城을 186년 (百濟 책계왕 28)에 修理하였다는 記錄이 있는것으로 보아 그 以前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396년에는 高句麗 廣開土大王이 이 城을 빼앗았으며 475년에는 百濟 蓋鹵王이 이 城 아래에서 죽었다는 記錄이 있다. 1997년과 1999년에 城壁과 城內部에 대한調査가 部分的으로 이루어졌다. 峨嵯山城은 부정 六角形의 布穀式 山城으로 둘레는 1 km 가 넘는다. 城壁은 높이가 7m 가량으로 推定되는데 안팎 모두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이 山城는 漢江流域을 둘러싼 三國의 角逐을 보여주는 重要한 遺跡이다.

 

(廣開土太王)

 

 

韓半島 歷史에서 唯一하게 廣闊한 大陸 정복(征服)을 通해 漢民族의 氣象을 드높였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活躍相을 力動的인 畵面 가득 構成하여 드라마를 通해 視聽者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使臣에 의한 판타지 즉, 廣開土大王과 함께 高句麗 江西古墳壁畵의 四神圖에 그려져 있는 四神을 드라마 속에 登場시켜 판타지적인 要所를 가미(加味)하였으며, 四神과 함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王이 되어가는 課程을 通해 逆境과 苦難을 딛고 일어서는 廣開土太王의 成功 스토리와 그 科程에서 보여지는 神話와 國民을 사랑하는 따뜻하고 人間的인 王의 모습이 征服君主로써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모습과 함께 어울러져 視聽者들이 畵面을 通해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을 直接 보고 느끼실수 있는 판타지 序詞 드라마를 만들게 되었다.

 

 

 

아차산촬영지

(峨嵯山撮影地)

 

峨嵯山 一圓에는 高句麗의 南進定策과 關聯된 약20개의 高句麗堡壘들이 集中的으로 分布하고 있다. 이 地域의 海拔高度는 200 ~ 300m로  동으로는 서울 風納土城과 夢泉土城을 包含하여 漢江以南 地域을 北으로는 中凉川과王肅川一帶를 넓게 眺望할수 있는 戰略的 要衝地에 該當된다.  代表的인 高句麗關聯 遺跡이다.  高句麗가 5世紀 後半에 漢江流域에 進出 한후 551년 新羅와 百濟에 의해 漢江流域을 喪失하기까지 漢江을 中心으로 展開된 三國의歷史를 間直하고 있는 遺跡으로 國家事蹟 455호로 指定되었다.

 

 

거믈촌

高句麗 대장간마을의 會議場所를 念頭에 두고 만들었다. 거믈촌 壁面에는 高句麗의 古墳壁畵에 나타나 있는 靑龍,白虎,朱雀,玄武 使臣중 北方의 玄武를 四方에 그려 넣었다. 玄武는 거북과 뱀이 합쳐진 形象으로 冷徹함과 智慧를 뜻한다. 이 場所는 太王四神旗 거믈村長 의 會議場面과 治療室場面을 撮影한곳이다.

 

 

대장간

高句麗는 일찍부터 靑銅製 武器를 鐵製武器로 對替하여 使用하면서 戰爭을 通해 地域統合을 이룩하고 支配權力을 强化하여 古代國家로 發展하였다. 高句麗 대장간에 대한 記錄은 없으나 九里市 阿遮山 4 堡壘에서 發見된 간이 대장간 터와 高句麗壁畵의 대장장 이신을 根據로 상상하여 製作되었다. 이곳은 담덕과 그 軍隊의 갑옷과 各種武器를 만들어내던 場面을 찍은곳이다.

 

 

태왕사신기

(太王史神記)

 

韓半島 歷史에서 唯一하게 廣闊한 大陸 정복(征服)을 通해 漢民族의 氣象을 드높였던 광개토대왕(廣開土太王)의 活躍相을 力動的인 畵面 가득 構成하여 드라마를 通해 視聽者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使臣에 의한 판타지 즉, 廣開土大王과 함께 高句麗 江西古墳壁畵의 四神圖에 그려져 있는 四神을 드라마 속에 登場시켜 판타지적인 要所를 가미(加味)하였으며, 四神과 함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왕이 되어가는 課程을 通해 域境과 苦難을 딛고 일어서는 廣開土太王의 成功 스토리와 그 課程에서 보여지는 神話와 國民을 사랑하는 따뜻하고 人間的인 王의 모습이 征服君主로써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모습과 함께 어울러져 視聽者들이 畵面을 通해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을 直接 보고 느끼실수 있는 판타지 序詞 드라마를 만들게 되었다.

 

 

담덕상

(談德像)

 

高句麗王子 談德이 廣開土大王으로 登極하기 전까지의 活躍上을 그린 판타지 史劇이다. 高句麗 19대 王인 廣開土大王은 396년에 峨嵯山城을 獲得하고 漢江건너 百濟를 屈服시켰다고 廣開土大王비에 記錄되어있다.  高句麗 軍事遺跡地였던 이곳 峨嵯山자락에 談德 銅像을 세워 高句麗의 進就的인 氣象과 燦爛했던 文化를 繼承 發展시켜 나가고자한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는 高句麗 제19대 廣開土大王 (319 ~ 412)의 業績을 기리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 (長壽王)이 414년 당시 首都였던 國內城 東쪽언덕(中國의 吉林省 집안시)에세운 紀念碑이다.  碑身은 응회암(凝灰岩)으로  눞이 6.39 m 너비 1,35 ~ 2 m 에 달하는 東洋最大 크기를 자랑하며 四面에는 高句麗 特有의 雄渾한 書體로 1775개의 文字가 세겨져 있다. 이 碑文은 高句麗의 建國事實 廣開土大王의 活躍上과 遺訓등을 記錄하고 있으며 당시 廣闊한 領土를 開拓하고 東北아시아를 주름잡았던 高句麗의 드높은 氣象과 깊이 있는 文化를 가늠하게 해준다.

 

 

   아차산유적전시관

 

遺跡과 出土遺物을 保管 展示하는 博物館이다. 峨嵯山 4 堡壘는 南北으로 뻗은 峨嵯山 稜線의 가장 北쪽 峰우리에 位置하며 南下한는 高句麗軍의 交通路를 確保하기 위한 前礎基地 또는 漢江을 건너 北上하는 敵軍을 防禦하기 위한 防禦施設의 技能을 하였다. 이 遺跡에서는 多樣한 吐器類 鐵器類가 出土되었다. 出土된 吐器類는 大形옹,양이부장이동옹,시루,동이,접시,등 저장,운반,조리,배식을 위한 실용기가 大部分이며 鐵器類는 武器類를 中心으로 하여 마구류,농工具類 등으로 區分된다.

 

 

아차산큰바위얼굴

 

高句麗 대장간 마을을 建立하고 太王四神旗 撮影이 이루어질 무렵 發見한 사람形象의 바위이다. 威嚴을 風氣는 묵직한 雰圍氣는 恰似 將軍의 形相이다. 廣開土大王의 발자취를 間直하고 있는 峨嵯山이니 이곳에서 神秘한 일이 있지 않을까? 太王四神旗에서 廣開土大王役으로 熱演하고 있는 배용준이 대장간 마을에서 撮影中 發見되었다고하니 배용준과 닮은것 같기도하며 神奇하게도 배용준이 서있었던 자리에서만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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