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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旅 旅 行/國 內

光化門廣場

(光化門廣場)

 

 

範圍는 光化門에서 世宗路 사거리 및 淸溪廣場에 이르며, 폭 34미터, 길이 740미터의 常侍廣場과 平常時에는 車道이나 大規模 行事시 廣場으로 活用可能한 往復 10차선 豫備廣場으로 構成되어 있다.  서울市는 世宗路가 過去 朝鮮時代 六曹거리로 歷史·政治·行政·業務가 結集된 곳이었으나 自動車 通行 爲主의 아스팔트 空間으로 建設되어 있어 國家의 象徵家로로서 또는 中心廣場으로서의 役割에 미치지 못하는 空間이었기 때문에, 世宗路를 車輛中心에서 人間中心의 空間으로, 淸溪川과 景福宮을 連結하는 步行 네트워크 空間으로, 景福宮, 北岳山 등 아름다운 自然景觀 眺望空間으로, 六曹거리의 復元을 通한 歷史·文化 體驗 空間으로 再誕生시키기 위한 事業이라고 밝혔다.

 

 

 

해 치

(獬豸)

 

서울의象徵이며 善惡을 判斷하는 定義로운 意味이외에 火災나 災殃을 물리치는 愼獸로서의 意味를 지니고 있읍니다. 朝鮮時代에 景福宮의 光化門 앞과 勤政殿 처마밑 마루등 宮闕에 곳곳에 獬豸의 像이 놓여졌는데  現在 景福宮 앞에 위치한 獬豸像은 그런 意味의 善과惡을 判斷하는 審判者로서 意味보다는 서울을 지켜주는 守護的 存在로 解釋하는것이 바람직하며 단지 火魔 뿐만아니라 온갖나쁜 起運을 막아줌과 동시에 幸運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存在로 說明 될수 있읍니다.

 

 

세종대왕

(世宗大王)

 

朝鮮의 제4대 왕(1418~50 재위).在位其間 동안 儒敎政治의 기틀을 確立하고, 공법(貢法)을 施行하는 등 各種 制度를 整備해 朝鮮王祖의 基盤을 굳건히 했다. 또한 한글의 創製를 비롯하여 朝鮮時代 文化의 隆盛에 이바지하고 科學技術을 크게 發展시키는 한편, 蓄積된 國力을 바탕으로 國土를 넓혔다. 이름은 도(  ).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閔氏이다.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세종문화회관

(世宗文化會館)

 

1961년 10월 建立된 市民會館이 1972년 12월 火災로 인해 燒失된 후 서울特別市에 의해 1974년 1월 着工되어 1978년 4월 建立되었다. 建物은 엄덕문建築硏究所에 의해 設計되었으며, 外部壁面이 花崗石으로 治粧되고 水準 높은 藝術作品이 여러 곳에 비치되어 있는 등 韓國의 傳統적 建築樣式을 具現했다. 地上 6층, 地下 3층으로 되어 있으며, 建築 延面積 1만 6,122평, 부지 5,611평이다.

 

 

의사안중근

(義士安重根)

 

大韓帝國의 敎育家,獨立運動家, 大韓義兵 參謀中將이다. 本官은순흥, 高麗朝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1905년 朝鮮을 事實上 日本의 植民地로 만든 乙巳條約이 締結된 것에 抵抗해, 獨立 運動에 投身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中國 하얼빈 驛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狙擊, 射殺했다. 어려서 안응칠(安膺七)이라는 兒名으로 불렸으며, 篤實한 天主敎 信者였던 그의 洗禮名은 司徒 聖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安重根 토마스(혹은 도마 安重根)라고도 불린다.

 

 

이순신

(李舜臣)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壬辰倭亂으로 나라가 存亡의 危機에 處했을 때 바다를 制覇함으로써 戰亂의 歷史에 決定的인 傳奇를 이룩한 名將이며, 謀陷과 迫害의 온갖 逆境 속에서 일관된 그의 憂國知性과 高潔廉直한 人格은 온 겨레가 推仰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民族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本官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광화문비각

(光化門碑閣)

 

이 碑閣의 전액은 皇太子인 純宗이 쓴 것으로 '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 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송(大韓帝國皇帝寶齡望 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頌)'이라고 쓰여 있으며, 碑文은 議政府 의정인 윤용선이 지었으며 당시 陸軍部將이던 민병석이 썼다. 특히 秘閣의 앞문 役割을 하는 萬歲門은 日帝時代에 日本人이 떼어내 家庭집의 門으로 使用하던 것을 解放 후 찾아서 復元한 것이다. 한 王家의 記念 碑閣 正門이 一般 사삿집의 門으로 利用되어 왔던 것이다. 한편 韓國戰爭으로 一部 破損되었던 碑閣은 1954년에 들어 保守한 후 1979년에 完全히 解體한 후 復元함으로써 모습만은 옛 모습 그대로 갖추게 되었다. 大韓帝國 皇帝 高宗은 이런 식으로 自身의 權勢와 大韓帝國의 位勢를 널리 떨치려 했던 것일까. 나라의 힘이 微弱하면 苦痛받는 것은 一般 百姓들이지 高官大作들이 아니었다. 나라가 沒落해가는 亡國에 皇帝 卽位 40년이 갖는 意味는 무엇이었을까. 위세 당당한 敎譜文庫 앞의 쓸쓸한 碑閣이 우리에게 건네는 對話는 무엇일까.

 

 

청계천

(淸開川)

 

개천(開川)'이라고도 함. 총길이 5.84km, 산책로 12.04km, 하루 물 소비량 120,000톤. 淸溪川은 四方이 山으로 둘러싸여 相對的으로 地帶가 낮은 서울 道心으로 모인 물길이 東쪽으로 흐르다가 살곶이다리 近處에서 中浪川과 合流하여 漢江으로 빠져나간다. 自然常態의 河川이었던 淸溪川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많은 被害를 입었기 때문에 서울을 都邑으로 정한 朝鮮時代부터 整備가 本格的으로 始作되었다.

 

 

청계천발원지

(淸溪川發原池)

 

淸溪川의 人爲的 發源地

 

 

 

太宗은 卽位 初인 1406~07년 淸溪川의 바닥을 넓히고 둑을 쌓는 등 처음으로 淸溪川을 整備하기 始作했다. 1411년(太宗11) 12월 河川을 整備하기 위한 臨時機構로 개거도감(開渠都監, 이듬해 開川都監으로 名稱 變更)을 設置하고, 다음 해부터 大大的으로 整備를 했으며 鑛筒橋·惠政橋 등 돌다리를 만들었다. '개천(開川)은 '내를 파낸다'는 뜻으로 河川을 整備하는 土木工事의 이름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淸溪川을 '開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441년(世宗 23)에는 洪水를 豫防하기 위해 마전교(馬前橋) 西쪽 수중(水中)에 눈금을 새긴 수표(水標)를 세워 開川의 水位를 測定할 수 있도록 했다. 1759년에는 英祖가 濬川을 管理하기 위해 준천사(濬川司)를 設置하고 이듬해부터 本格的으로 整備를 했다.

 

 

 

開川'이라는 이름이 '淸溪川'이라고 불리기 始作한 것은 日帝强占基 때였다. 이 始期에 제대로 管理가 되지 않고 放置된 淸溪川은 1925년부터 '整備'라는 名目으로 지금의 鍾路區 新橋洞에서 都染洞까지, 즉 白雲洞川·玉流動川·司直洞川 등이 복개(覆蓋)되었고 1937년에는 太平路에서 武橋洞 九干이 覆蓋되었다. 1950년대 中半 戰爭이 끝난 後 淸溪川은 여전히 代表的인 落後地域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覆蓋되기 始作했다.

 

 

 

1955년 鑛筒橋 上流 약 136m, 1958년 5월∼1961년 12월 廣敎에서 淸溪6가 東大門運動場까지, 1965년∼1967년 淸溪 6가에서부터 淸溪8가 新設洞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新畓鐵橋까지 覆蓋되었다. 또한 廣敎부터 馬場洞까지 총길이 5,6km, 폭 16m의 淸溪高架道路가 1967년 8월 15일 着工되어 1971년 8월 15일 完工되었다.

 

覆蓋되어 整備된 淸溪川은 1960~70년대에는 近代化의 象徵이 되기도 했으나 工具·衣類 등 여러 가지 産業이 執中되면서 施設落後, 公害 등 여러 가지 問題點이 나타나 都市發展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自然環境을 復元시키고 삶의 質을 높이며, 歷史文化를 復元한다는 趣旨로 淸溪川 復元事業이 始作되었다. 淸溪川 復元 區間은 太平路 時点에서 新畓鐵橋까지이며, 工事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2년 3개월에 걸쳐 약 3,900억원을 投入하여 進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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