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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B 旅 行/國 內

慶州 (大陵苑)

千年古都慶州訪門 

 

 

慶州市內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巨大한 古墳들이다 지금부터 千年도 넘는 時節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테 어울려 있기에 時間과 空間을  初月한 神秘感이 더 眞하게 느껴진다. 특히 慶州의 古墳들이 平地에 자리잡고 있는것은  당시의  다른地域들에 繭紬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南山의 北쪽에서부터 國立慶州博物館 자리와 半月城을 거쳐 황오동,노동동,노서동,으로 이어지는 平地에는 古墳들이 集中的으로 모여있다. 그 가운데 약 12만 5,400 평의 平地에 23개의 陵이 솟아있는 皇南洞 大陵苑은 古墳群의 規模로는 慶州에서 가장 큰 陵 이다.

 

 

대릉원

(大陵苑)

 

慶州市內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巨大한 古墳들이다 지금부터 千年도 넘는 時節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테 어울려 있기에 時間과 空間을 初月한 神秘感이 더 眞하게 느껴진다. 특히 慶州의 古墳들이 平地에 자리잡고 있는것은 당시의 다른地域들에 繭紬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南山의 北쪽에서부터 國立慶州博物館 자리와 半月城을 거쳐 황오동,노동동,노서동,으로 이어지는 平地에는 古墳들이 集中的으로 모여있다. 그 가운데 약 12만 5,400 평의 平地에 23개의 陵이 솟아있는 皇南洞 大陵苑은 古墳群의 規模로는 慶州에서 가장 큰 陵 이다.

 

천마총

(天馬塚)

 

天馬塚은 新羅時代의 代表的인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이다. 밑둘레 157 m 높이 12.7 m 되는 比較的 큰 무덤으로 5 ~ 6 世紀경에 築造된 어느왕 무덤으로 推定된다. 구조는 平地위에 나무널(木棺)과 껴묻거리(副藏品) 상자를 놓고 그 밭깥에 나무로 짠 덧널(木槨)을 設置하여 돌덩이를 쌓고 흙으로 덮었다. 發掘助事했을때 金冠을 비롯한 遺物 11,500여점이 出土되었다. 그 중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말 그림(天馬圖)이 그려진 말다래 가 나왔으므로 "天馬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出土된 主要 遺物은 複製品으로 만들어 展示하고 무덤의 內部構造를 볼수 있도록 꾸몄다.

 

경주동부사적지대

(慶州東部史積地帶)

 

이 일대는 東西로는 雁鴨池(안압지)에서부터 喬桐까지 南北으로는 月城(월성) 南쪽의 南川에서 現在 古墳公園 앞 첨설오에 이르는 廣大한 史跡地隊 이다. 新羅와 우경의 中心部 였기 때문에 月城,雁鴨池.瞻星臺,鷄林,등의 중요한 事蹟이 많음. 뿐만아니라 奈勿王陵을 비롯한 數十期의 古(고) 新羅 古墳이 完全한 形態로 密集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 地下에는 封土가 없어진 많은 古墳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地域은 慶州에서도 新羅의 옛모습을 잘 間直하고 있는곳이다.

 

첨성대

(瞻星臺)

 

瞻星臺는 新羅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 ~ 647)때 만들어진 東洋에서 가장 오랜 天文 觀測臺 이다. 화강석(花崗石)을 加工하여 造成한 기단 (基壇) 위에 27단의 석단(石段)을 원통형의 곡선(曲線)으로 쌓아올이고 그 위에 장대석(長大石)을 우물정자형(井)으로 築造하여 頂上部에서 天文을 살피도록 施設되어 있다. 정남(正南)쪽의 食團에는 아래로부터 제 13 단과 제 15 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出入口)가 있어 내부(內部)로 들어갈수 있게 되어있고 이 出入口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되어있다. 이 곳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觀察했던 것으로 보인다. 規模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  m이며 지대석 한변의 길이는 5..35m 이다. 新羅時代의 石造物로 直線과 谷線이 잘 어우러진 安定感 있는 建築物이다.

 

계림

(鷄林)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성)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慶州 金氏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傳說이 있는 遺緖 깊은 곳이다. 新羅 탈해왕(脫解王)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王이 몸소 숲에 가서 金櫃를 내렸다, 뚜겅을 열자 궤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境內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誕生에 관한 記錄이 새겨져 있다.

 

석빙고

(石氷庫)

 

石氷庫는 朝鮮 영조(英祖) 14년(1738) 月城(月城)안에 만들 얼음 倉庫이다. 月城 안의 北쪽 城樓 위에 南北으로 길게 자리하고있다. 길이 19m 너비 6 m 높이 5.45 m 의 石室(돌방)은 直四角形 으로 만들어졌는데 약 1000여개의 돌이 쓰였고 天仗 外部는 封土의 形象이다. 무지개 模樣으로 만든 天仗에는 공기 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지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出入口는 南쪽에 있고 階段을 通하여 出入하게 되어있다. 石氷庫 出入門 이맛돌에 "승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英祖 17년(1741)에 옮겨 세워음을 알수 있다. 옆에 있는 石碑(석비)에는 慶州 府尹 조명겸(조명겸)이 얼음 倉庫를 돌로 만들어다가 3년만에 이곳으로 옮겼다 고 적혀 있다. 現在 石氷庫 西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가 있다. 

 

태종무열왕릉

(太宗武烈王陵)

 

이 碑石은 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왕 在位 654 ~ 661)의 偉大한 業績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碑는 武烈王陵의 左側에 位置하고 잇다 現在 빗돌(碑身)은 없어지고 거북 模樣의 받침돌(龜?)과 龍을 새긴 머릿돌 만 남았다. 길이 333 cm  너비 254 cm  높이 86 cm  이며 거기에 彫刻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처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모습으로 新羅人의 進就的인 氣像을 잘 보여주고있다. 눞이가 110 cm 인 머릿돌 左右에는 여섯마리의 龍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如意珠를 몰고있는 모습이다. 앞면 中央에 武烈王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碑의 主人公을 밝혀 주고있다. 이 碑는 表現이 事實的이고 生動感이 있어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東洋權에서 가장 뒤어난 傑作이라 일컬어지는 作品이다.

 

김유신장군묘

(金庾信將軍墓)

 

이 무덤에는 金庾信(595 ~ 673)將軍이 모셔져 있다.忠孝洞 송화산(松花山)에서 南쪽으로 뻗어내린 丘陵의 끝에 位置해 있으며 흙을 둥굴게 쌓아올린 模樣이다. 金庾信은 금관가야(金官伽倻) 마지막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으로  15세에 花郞이 되엇으며 武藝와 智略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指揮하였다. 신라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660)에 羅唐 연합군(羅唐 聯合軍)이 結成 되었을때 新羅軍 總司令官이 되어 百濟를 倂合하였고 이어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는 高句麗를 倂合하엿으며 韓半島 全體를 復屬시키려는  野心을 가지고 있던 唐나라 軍事도 물리쳤다. 文武王 때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작(官嚼)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興德王)때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推捧되었다. 陵은 믿둘레가 50 m 지름이 18   높이는 5.3 m 인데 아래쪽에는  높이 1.2 m 의 십이지상(十二支神像)을 새긴 保護石이 둘러져 있다. 十二支神像은 平服을 입고 武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形體이고 머리는 動物 模樣이다.

 

포석정지

(鮑石亭址)

 

鮑石亭은 新羅 王室의 別宮으로 歷代 임금들이 延禧를 베풀던 곳읻다. 지금은 丁字등 建物이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石造 構造物만 남았는대 花崗石으로 만든 수로(水路)의 기링 는 약 22 m 이다. 임금은 이곳에서 臣下들과 더불어 盞을 띄우며 詩를 읆었을 것으로 보인다. 鮑石亭에 대한 記錄은 新羅 제 49 대 헌강왕(憲康王)이 臣下들과 어울려 餘興을 즐길때 南山의 神이 王 앞에서 춤을 추자 王도 딸도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라는 新羅춤이 만들어 졌다고 傳해진다. 경애왕(景哀王) 4년 (927)王이 後百濟 견원 軍隊의 襲擊을 받아 最後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中國이나 日本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風流와 氣像을 엿볼수 있는 場所이다.

 

분황사

(芬皇寺)

 

石塔은 現在남아 있는 新羅 石塔가운데 가장 오랜 것으로 新羅 선덕여왕 (善德女王) 3년(634)에 안산암(安山庵)을 벽돌模樣으로 다듬어 쌓아 올인 모전석탑(模傳石塔)이다 基壇의 規模나 塔의 形態로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推定된다. 1915년 日本人이 허물어진 것을 解體.修理 하였다. 1층 몸체돌이 四方에는 쌓여단이 돌문으로 된 佛像을 모시는 監室 이있고 監室 양쪽으로 불법(佛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이 돈금 새김되어 있다. 自然石으로 지키는 된 基壇위에는 네마리 석사자(石獅子)  를 配置하였다. 塔에서 나온 돌 사리함(舍利函)에는 여러가지 구슬.가위.金.銀바늘.은함 숭영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銖)이 들어 있어 高麗 肅宗 睿宗 年刊에 解體 修理 되었던것이 記錄 되어있다.

 

분황사화쟁국사비부

(芬皇寺和諍國師碑趺)

 

碑趺는 高麗時代에 세워진 원효대사(元曉大師)비의 받침돌이다. 碑石은 高麗 숙종(肅宗) 6년 (1101) 8월에 내린 調書에 으해 芬皇寺에 建立되었다. 肅宗은 元曉가 東方의 成人 인데도 不具하고 碑石 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德이 크게드러나지 않음을 哀惜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詩號를 내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碑를 세우게 하였다. 現在 碑는 없어지고 碑片만 가끔씩 發見되고 있다.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가 碑身을 받혔던 碑臺를 境內에서 發見하여 이를 確認 하였다. 現在 碑臺石에는 "此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쓴 金正喜의 親筆이 陰刻되어 있다. 碑臺는 直六面體이고 上面에는 碑身을 揷入하는 直四角形의 홈이 파져 있다.

 

분황사석정

(芬皇寺石井)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고도 불리는 新羅時代 우물이다. 우물 틀의 外部는 높이 70 cm 의 8각이고 內部는 原形인데 이것은 佛敎의 팔정도(八正道)와 원융의 眞理를 우물안의 4각형 格子는 佛敎의 根本敎理인 사성제(四聖帝)를 뜻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元聖王(원성왕) 11년 (795)에 당(唐)나라의 使臣이 와서 新羅의 護國用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變信시킨 뒤 잡아서 本國으로 떠났다. 그 하루뒤에 두 女人이 元聖王 앞에 나타나서 自身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에사는 두 護國用의 아내인데 唐나라 使臣과 하서국(河西國)사람들이 自身의 男便과 芬皇寺 팔각정(八角井)에 사는 護國用을 主文을외워 작은 물고기로 變化시켜 대나무 통에 넣어 가지고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呼訴하였다. 王이 사람을시켜 唐나라 使臣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다시살게 하였다 는 傳說이 記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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