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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族/國 內 旅 行

雪岳山百潭寺

(百潭寺)

 

 

江原道 麟蹄郡 北面 용대리 에 있는절 新羅 眞德女王  1년(647)에 慈藏이 創建 하였다. 大韓佛敎曹溪宗 제3교구 本社인 新興寺의 末寺이다. 이 절의 紀元은 647년(眞德女王 1)에 자장(慈藏)이 創建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神文王 10)에 火災로 消失된 것을 719년(聖德王 18)에 再建했다. 785년(元聖王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成宗 3)에 다시 火災로 燒失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雲興寺地의 北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改稱했다. 1432년(世宗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改稱했다. 1443년 火災로 燒失되자 1447년 옛 터 西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世祖 1)에 다시 火災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上流 20리 되는 곳에 重建하고 百潭寺라고 改名했다.

 

 

 

백담사

(百潭寺)

 

1775년(英祖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重建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改稱했으나 1783년(正朝 7)에 다시 百潭寺로 還元했다. 1915년에 일어난 火災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住持였던 인공(印空)이 重建에 着手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鐘과 북을 鑄造해 落城法會를 열었다. 近代에 韓龍雲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 〈佛敎有神論 佛敎維新論〉을 執筆하는 등 萬海思想의 産室이 되었다. 6·25戰爭 때 불탄 것을 1957년 重建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大統領 內外가 대(對) 國民謝過聲明 發表 후 이 절에 隱居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延禧洞 私邸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現存 당우로는 大雄寶殿·七星閣·선원(禪院)·寮舍채 등이 있고, 南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觀音殿이 있다. 그밖에 자장의 遺物로 傳하는 阿彌陀상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下賜品인 옥탑(玉塔), 설담당(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다.

 

 

산령각

(山靈閣)

 

 山神은 보통 호랑이와 함께 있는 백발에 수염이 있는 神仙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位牌는 '○○산신위(山神位)' 또는 '○○산령위(山靈位)'라 해서 山의 이름을 적어놓는 경우와 山의 이름은 없이 그냥 山神位 또는 山靈位라 적어두는 境遇가 있다. 建物 正面에 懸板이 걸려 있는데, 山神閣이라는 名稱 외에 山神堂·山鳴堂이라는 名稱이 使用되기도 한다.

 

 

금강문

(金剛門)

 

寺刹에 따라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기도 하며, 어느 경우에는 金剛門과 天王門이 함께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金剛門이 天王門 밖에 세워진다. 金剛門은 보통 앞면 3칸,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건축된다. 中央門은 앞뒤 모두 아무런 窓戶를 달지 않고 開放하며, 양 옆칸은 모두 벽체를 친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공포는 익공식(翼工式)이나 다포식(多包式)을 사용했다. 안에는 중앙문만 사람이 通行할 수 있게 하고, 양 옆칸에는 중앙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세웠다. 이 門을 通過함으로써 寺刹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惡鬼)가 제거되어 가람(伽藍)의 내부는 청정도량(靑淨道場)이 된다는 것이다.

 

 

한용운

(韓龍雲)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韓國의 詩人, 佛敎 僧侶이자 獨立運動家이다. 호는 만해(萬海)이다. 日帝에 대한 抵抗 精神으로 집도 朝鮮總督府 反對 方向인 北향으로 지었고, 食糧 配給도 拒否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有名하다. 또한, 變節한 親日派 崔南善이 韓龍雲과 가까운 사이임을 가장 하자, 韓龍雲은‘崔南善이라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미 葬禮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전기로 고은의 《韓龍雲 평전》(1975)이 있으며, 외아들 한보국은 故鄕인 洪城에서 社會主義 運動을 하다가 韓國戰爭 때 越北했다.

 

沈默

 

 

                                                        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씁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向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黃金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美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香氣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念慮하고
警戒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離別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離別은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으로
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念慮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