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家 族/國 內 旅 行

回龍臺.三江.浮石寺.法住寺

(回龍臺)

 

 

유서 깊은 場所는 아니나 回龍浦 全景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많이 찾는다. 展望臺에는 高麗時代 文人 李奎報가 長安寺에 머물면서 지었다는 詩가 걸려 있다. 長安寺 뒷길을 따라 약 10분 오르면 된다.

 

 

 

회룡전망대

(回龍全望臺)

 

飛龍山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會龍展望臺는 洛東江물 휘감아 돌아가는 模樣과 陸地속 의 섬마을 항 가시거리에 들어 온다

 

 

회룡포

(回龍浦)

 

洛東江의 支流인 내성천(乃城川)이 용(龍)이 비상(飛翔)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190 m 의 비룡산(飛龍山)을 다시 350도 되돌아서 흘러나가는 (육지속의섬마을)이다

 

 

회룡포

(回龍浦)

 

맑은물과 白沙場이 어우러진 天惠의 景觀을 가지고 있으며 飛龍山에는 숲속 登山路와 散策 코스가 있다 이 산에는 新羅時代의 千年古刹인 長安寺(長安寺)가 山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飛龍山 登山路를 따라가 보면 낙동강(洛東江)내성천(乃城川)금천(錦川)이 합쳐지는 삼강(三江)이 보이는데 깍아지르는 듯한 이곳에는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激戰地로 유명한 원산성(願山城)이 있다

 

 

 

天惠의 要勢로된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된 성(城) 周邊에는 많은 古墳이 흩어져 있으며 봉수대(捧隧臺)가 남아 있다 百濟始祖 溫祖가 南下할때 마한(馬韓) 最後의 堡壘인  이 곳 원산성(願山城)을 占領한 후 百濟를 세웠다고도 傳해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상당기간 百濟의 요세로 삼국(三國)이 衝突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얼마나 격전지(擊戰地)였던지 지금도 피 끝이라는 언덕에는 비가오면 성아대마을 성저(城底)마을에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원혼(寃魂)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傳說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溫達將軍이 이 城을 점령(占領)하려고 南下(南下)하다 阿遮城에서 전사(戰死)하였다고하나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삼 

(三江)

 

 

洛東江, 乃城川, 金川 등 세 개의 江이 만나는 合水머리에 位置한 酒幕이다. 三江나루터는 예부터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장사하던 배들이 洛東江을 오르내렸고, 聞慶새재를 가기 前에는 반드시 거쳐야 해 사람들의 往來가 많았다.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2006년 할머니가 世上을 떠난 뒤 放置되다가 2007년 醴泉郡에서 새롭게 復元해 酒幕을 運營하고 있다.

 

 

 

(法住寺)

 

大韓佛敎曹溪宗 제5교구의 本寺 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創建했으며, 法住寺라는 절 이름은 義信이 西域으로부터 佛經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說話에서 由來된 것이다. 776년(惠恭王 12)에 金山寺를 創建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重創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彌勒信仰의 中心道場이 되었다. 그후 法住寺는 王室의 庇護 아래 8차례의 重修를 거쳐 60여 개의 建物과 70여 개의 庵子를 갖춘 大刹이 되었다.

 

 

(浮石寺)

 

大韓佛敎曹溪宗 제16교구 本寺인 고운사(孤雲寺)의 末寺이다. 〈三國史記〉·〈三國遺事〉에 의하면 義湘大師가 新羅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創建하고 華嚴宗을 널리 傳했다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義湘과 善苗, 浮石寺 創建에 관한 說話가 자세히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