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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旅 旅 行/國 內

巨濟島捕虜囚容所

거제도포로수용소

(巨濟島捕虜囚容所)

 

 

1983년 12월 20일 慶尙南道文化財資料 제99호로 指定되었다. 6·25戰爭의 慘喪을 알리는 民族歷史敎育 場所이다. 1950년 9월 15일의 仁川上陸作戰으로 많은 捕虜가 생겨 釜山·慶北 등지에 分理 受容했으나 施設이 不足했다. 1950년 11월 27일 巨濟島 고현·수월·양정·상동·용산·해명·저산 지구를 中心으로 360만 平에 捕虜收容所를 設置했다.이 施設에 人民軍 15만, 中共軍 2만, 女子 捕虜와 義勇軍 3천 명 등 最大 17만 3천 명을 受容했다. 그 당시 巨濟에는 主民 10만 명, 避難民 약 15만 명, 捕虜 17만 등 약 42만여 명이 居住했다. 

 

 

거제도포로수용소

(巨濟島捕虜受容所)

 

6·25戰爭 중 北韓軍과 中共軍 捕虜들을 集團으로 受容하던 收容所.약 13만 2 000명의 捕虜가 受容되어 있었다

 

 

 

收容所 안의 捕虜 가운데 反共捕虜와 共産捕虜 간의 反目이 極甚했다. 理由는 유엔군측이 1949년에 締結된 제네바協約의 送還原則을 違反하고 捕虜들에게 本國歸還을 포기시키려고 狹薄과 拷問을 하자 共産捕虜들은 激烈하게 抵抗했고, 이 科程에서 수많은 死傷者가 發生했다. 또한 5월 7일 아침에 受容所長 F.T.도드 准將이 76捕虜收容所 視察중 拉致 監禁되는 事件이 發生했다. 後任인 찰스 콜슨이 도드의 釋放을 促求하면서 5월 9일 고현지구 民間人 1,116世代에 대해 24時間 이내에 다른 곳으로 强制紹介命令을 내렸다. 名分은 拉致사건 및 暴動은 民間人과 捕虜 간의 接觸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主民들은 정든 땅과 집을 버리고 3년 동안 避難 아닌 紹介민으로 生活하였다.

 

 

全世界가 注目했던 이 暴動은 도드 准將이 拉致된 지 4일 만에 美國의 殘虐行爲를人情하고 나서야 釋放됨으로써 일短絡되었다. 釋放 後 그는 捕虜受容所長에서 解任되었을 뿐만 아니라 助事委員會에 回部되어 審査를 받았다. 그 後에도 收容所 내에 이러한 크고 작은 暴動이 繼續되었으나, 1953년 6월 18일 李承晩이 反共捕虜 27,389명을 釋放시키고 7월 27일 休戰協定이 調印되자 收容所는 閉鎖되었다.

 

 

지금은 建物 一部만 남아 있고 고현리·수월리 등지에 당시의 遺跡이 남아 있다. 1983년에 建立된 遺跡館에는 그 당시의 寫眞과 裝備 및 儀服 등이 展示되어 있고 6·25戰爭과 捕虜收容所에 대한 映畵도 部分的으로 製作 上映하고 있다.

 

 

 

巨濟市에서는 遺跡館 옆 일대 1만 5천여 平에 새로운 戰爭記念館을 建立. 6·25戰爭 당시 收容所 130만 평에 設置되었던 施設 全部를 縮小  收容所 內部建物도 縮小·復元된다. 現在 主位 不知에 復元整備事業이 進行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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