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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陵&園&墓

尨村黃喜墓

(尨村黃喜)

 

 

高麗末.朝鮮 初期의 代表的인 政治家로 淸白吏의 表象이다. 初名은 수로 (壽老)호는 방촌(尨村)이며 本官은 장수(長水)이다. 1363년(恭愍王12)開城 가조리에서 出生하였는데 어머니 龍宮金氏가 그를 孕胎했던 열달동안 松嶽山 鎔巖瀑布에 물이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376년(우왕2)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合格하고 1389년(昌王1)文科에 及第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高麗가 亡하자 杜門洞에 隱居했으나  朝鮮朝廷의 要請과 同僚들의 推薦으로 1394년 (太祖3)成均館學官 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兼任하고 그후 여러 職責을 맡았다. 農事의改良,禮法의 改定 천첩(賤妾)小生의 천역(賤役)免除등 業績으로 世宗으로부터는 가장 信望받는 宰相으로 名聲이 높았다.

 

 

 

방촌기념관

(尨村記念館)

 

尨村記念館은 黃喜先生 遺跡地 聖域化 事業의 一環으로 1999년 6월 完工되었다. 內部에는 黃喜先生의 一代記를 비롯해 先生의 삶과 思想을  한눈에 알수있도록 만든各種 資料들이 展示되어있다.

 

 

 

진눈깨비가 내린 어느 겨울날 退闕한 領議政 黃喜가 夫人에게 서둘러 옷을 뜯어서 빨면 밤사이에 말리고 꿰매서 내일 아침 入闕할때 입을수 있을것이라 했다. 領議政 黃喜의 겨울옷은 단벌이어서 속옷차림 으로 冊을 뒤적이고 있을때 속히 入闕하라는 御命이 떨어졌다. 黃喜는 하는수없이 솜을 몸에 두루고 夫人이 바지솜과 저고리 솜을 얼기설기 이어주자 黃喜는 그 위에 官服을 덧입고 서둘러 入闕했다. 重臣들을 불러놓고 慶尙道에 侵入한 倭寇를 물리칠 對策을 講求하라 이르던 世宗의 눈에 黃喜의 官服밑으로 비죽이 나온 하얀것이 얼핏 보였다. 世宗은 양털로 입었냐고 물었다. 黃喜는 唐惶하여 가까스로 솜 이라고 解明하였고 世宗은 黃喜의 옷 밑으로 빠져나온 솜을 만져보았다. 誤解가 풀린 世宗은 黃喜에게 비단 열필을 何事하였지만 黃喜는 百姓들은 繼續된 凶年으로 인하여 헐벗고 굶주린 百姓이 많은데 이런때에 어찌 영상인 신의몸에 비단을 걸치겠냐며 하사한 비단을 거두어 달라 請했다. 世宗은 黃喜의 뜻을 알고 비단 하사하기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시 조

(詩調)

 

두문동에서 황희를 떠나보내며 아쉬움을 표현한 시조

 

君登靑雲去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고

子望靑山歸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가네

雲山從此別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

淚濕碧羅衣    눈물이 벽라의를 적시는 구려

 

 

서각대

(犀角帶)

 

코뿔소뿔 소재로 하여 만든 각대이다. 豫로부터  코뿔소뿔은 材料의 稀貴성과 象徵的 意味로 인해 귀하게 여겨졌다. 결이 곱고 누른빛이나 검은빛깔이 나는 꽃무늬가 있다. 띠나 裝飾品에 많이 쓰였는데 朝鮮時代 官服帶의 材料로 使用되었다.

 

 

옥서진

 (玉書鎭)

 

옥으로된 종이누르는데 쓰는 文房具

 

 

갓 끈

(珊瑚纓)

 

黃喜先生이 使用하던 珊瑚鉤슬을  꿰어만든 갓끈 

 

 

벼 루

黃喜先生이 使用하던 玉으로된 벼루

 

 

소공대비

(昭公臺碑)

 

江原道觀察使를 지낸 黃喜의 善政을 기리기 위해 關東地方 百姓들이 세운것이다. 1423년 (世宗5)關東地方에 凶年이들자 觀察使로 派遣된 黃喜는 精誠을 다하여 百姓을 救護하였고 이에 感動한 당시 黃喜가 쉬던 와현(瓦峴)에 돌을 쌓아 대비 (臺碑)를 세우고 소공대 (昭公臺)라 하였다. 지금의 昭公大碑는 1578년 宣祖11년 황연식이 三陟府使로 赴任 하였을때 다시 세운것이다.  

 

 

황희선생유묵

(黃喜先生遺墨)

 

風波存止水世間  물세상의 사이에 풍파가 머물러 있는데

 何事不能平去  무슨일로 평평하게 하여 없앨수 없나

 或舞或蹈  혹은 춤추고 혹은 뛰놀며

顧飛欲走   돌아보고 날면서 달리려고 하는데 

 狀如蠻蠻   그 모습이 괴물 같구나.

 

 

所信原則을 지키며 寬容베풀줄 알라.

 

 

우리의 몸이 없어진 뒤의 일은 단지 淸廉 렴(廉) 자(字) 하나를 지키는 것이다.

 

 

百姓이오직 나라의 根本이요

根本이 튼튼해야 나라가 便安 합니다

조그만 잘못으로 커다란 被害가 생김니다. 

 

 

황희선생영당

(黃喜先生影堂)

 

이 곳은 朝鮮初期의 名宰相이며 淸白吏의 代表的인 黃喜(1363 ~ 1452)先生의 遺業을 記念하기 위하여 後孫들이 影幀을 모시고 祭祀를 지내는 곳으로 坊村靈堂 경모재,반구정, 仰止臺가 있다. 黃喜先生은 朝鮮조의 여러要職을 두루거치면서 文物과 制度의 整備에 勞力하였고 世宗代에는 領議政이 되어 世宗을 도와 훌륭한 業績을 남기었다. 이 靈堂은 6.25事變으로 全燒된것을 1962년 後孫들이 復元 하였는데 正面3칸 側面 2칸 인 초익 공양식의 맞배지붕에 丹靑이 되어있고 솟을 三門이 있다. 

 

 

사직제

(舍直齊)

 

목 단

(牧丹)

 

꽃잎은 8장, 꽃받침잎은 5장이며 수술은 많고 암술은 2~6개이다. 구형(球形)의 열매는 가을에 익고 검은색 씨가 들어 있다. 뿌리껍질을 말린 목단피(牧丹皮)는 漢方에서 消炎·陣痛·精血·高血壓 등에 쓰고 있다. 中國이 原産地이며 韓國에서는 꽃을 感想하거나 뿌리를 藥으로 쓰기 위해 널리 심고 있다. 모란은 또한 牧丹이라고도 하고 많은 園藝品種이 만들어졌다.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라며, 繁植은 작약 뿌리나 모란 줄기에 접붙여서 하고 뿌리가 깊지 않다.키는 1~2m 정도 자라며 가지가 굵다. 잎은 잔잎 3장으로 이루어진 겹잎으로, 하나하나의 잔잎은 다시 3~5갈래로 갈라지며 잎 뒤는 흰색을 띠고 있다. 자색의 꽃이 5월에 가지 끝에 피고 지름이 15~20㎝에 이른다

 

 

소양공월헌선생부조묘

(昭襄公月軒先生不조廟)

 

先生의 휘는 맹헌 자는 老境 호는 月軒이고 領議政 坊村先生의 玄孫이다. 中宗反正에 功을 세워 분의 政局功臣으로 冊奉되시고. 禮曹判書와 漢城府判尹을 歷任하시다.

 

 

월헌사

(月軒祠)

 

月軒祠는 黃喜先生의 고손 (高孫)인 소양공(昭襄公) 월헌 황맹원(月軒 黃孟獻)先生의 神位를 모신 부조묘 (不조廟)이다. 황맹원은 黃喜先生의 曾孫인 부사 (府使)황관(黃瓘)의 아들로 文章과 글씨가 뛰어나 소세앙(蘇世讓) 정사룡 (鄭士龍)과함께 當代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시사(竹枝詞)는 明나라에서 激讚을 받았다고 傳해진다.

 

 

황희선생영당지

(黃喜先生影堂址)

 

朝鮮 初期의 名宰相이며 淸白吏의 歸勘인 坊村 黃喜先生의 影幀을 모시고 祭祀를 지내는 곳이다. 黃喜는 高麗 우왕2년 음직으로 官職에 進出하였다가 恭讓王 1년 文科에 及第 하였다. 太祖1년 朝鮮王朝가 들어서자 杜門洞에 隱居하였으나 太祖3년 朝廷의 要請과 杜門洞 同僚들의 薦擧에 의해 朝鮮朝廷에서 여러官職을 歷任 하였다. 世宗13년 領議政이 되어 18년간 世宗과 함께 國政을 다스려 各種 文物 制度의 整備에 큰功을 세웠다. 靈堂內部에는 中央에 別途의 監室을 두고 그안에 影幀을 모셨다. 

 

 

경모제

(景慕齊)

 

黃喜先生울 추모(追募)하기 위해 세운 祠堂이다.

 

 

방촌황희선생상

(尨村黃喜先生像)

 

坊村先生의 모습을 形象化해 세운 銅像이다. 銅像座臺에는 黃喜先生이 1423년 監事 在職시 남긴 遺墨이 陰刻되어 있다.

 

 

軒高能却暑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蒼豁易爲風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통하기 쉽네

老樹陰垂地   큰 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遙岑翠掃空  먼산 봉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것 같네

 

 

앙지대

(仰止臺)

 

仰止臺는 伴鷗亭이 元來 位置했던 자리터이다. 1915년 伴鷗亭을 現 位置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黃喜先生의 遺德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六角亭을 짖고 仰止臺라 이름하였다. 仰止臺 상랑문에 오직 선(善) 만이 寶配로 여기고 다른마음이 없는 한 臣下가 있어 온百姓이 우뚝하게 솟은 山처럼 모두 처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仰止臺란 이름은 詩經의 好人이라는 뜻을 取했다 라고 적고 있다.

 

 

반구정

(伴鷗亭)

 

朝鮮初期의 名宰相이며 淸白吏의 龜鑑인 坊村黃喜 先生이 官職에서 물러나 餘生을 보내던곳으로 豫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삼는 亭子 라고 이름지었다. 伴鷗亭은 臨津江이 내려다 보이는 奇巖絶壁 위에 位置하고 있는데 푸른물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松林이 울창하여 좋은 風見을 이루고 있다. 米壽 許默先生이 지은 伴鷗亭記를 보면 亭子는 坡州 서쪽 15 리 臨津江 아래에있고 조수때마다 백구가 강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님 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 리이다. 라고 描寫해 놓았다.

 

 

반구정중수기 

(伴鷗亭重修記)

 

반구정기 (伴鷗亭記) 반구정중건기(伴鷗亭重建記)

 

 

伴鷗亭에서 바라본 長湍面 一帶 (開城公團으로가는 送電線이 보입니다.)

 

 

황희선생묘역

 

彈絃面 金蠅利에 位置하고 있으며 京畿道 記念物 제34호이다. 墓域은 3단으로 넓게 造成되었고 封墳의 規模가 크다. 封墳의 構造는 正面을 ㄷ 자모양으로 花崗岩 長臺石을 利用하여 前方을 向해 3단의 虎石을 쌓아 封墳과 連結시킨 특이한 構造이다. 封墳앞에는 鴻儒石.上石. 香爐石이 密着되어 있으며 그 正面에는 4개의 火窓이 透加된 長明燈이 있다.

 

 

신도비

(神道碑)

 

碑閣에는 神道碑가 세워져 있는데 1505년(燕山君11)에 세워졌으며 申叔舟가 글을 짖고 安琛이 썻다. 月來의 神道碑 碑文은 磨耗가 심해 判讀이 어려워  1945년 그 옆에 새로 神道碑를 製作해 세워 놓았다.

 

 

황희묘

(黃喜墓)

 

朝鮮時代를 通하여 가장 名望있는 宰相으로 稱頌되는 坊村 黃喜 의墓이다. 황희는 장수 黃氏로 開城에서 태어나 1389년 文科에 及第하였다. 高麗가 亡하자 杜門洞에 隱居하다 朝廷의 要請으로 官職에 나오게 되었다. 世宗 13년 議政府 최고의 官職인 領議政副使에 올라 國家開士를 돌보았다. 世宗 31년 86세로 隱退한 後에도 世宗이 國家의 重大事를 諮問하는등 影響力을 發揮하였다. 4군 6진의 開拓과 外交와 文物制度 의저입 集賢殿을 中心으로 한 文物의 振興등을 指揮 監督하여 朝鮮의 王朝를 通하여 가장名望 있는 宰相으로 稱頌되고있다. 政經夫人 淸州楊氏와 함게 合葬되어있다.

 

 

비 문

(碑文)

 

領義政翼成公尨村黃喜之墓

繼配貞敬夫人淸州楊氏祔

 

 

황희선생묘역

 

彈絃面 金蠅利에 位置하고 있으며 京畿道 記念物 제34호이다. 墓域은 3단으로 넓게 造成되었고 封墳의 規模가 크다. 封墳의 構造는 正面을 ㄷ 자모양으로 花崗岩 長臺石을 利用하여 前方을 向해 3단의 虎石을 쌓아 封墳과 連結시킨 특이한 構造이다. 封墳앞에는 鴻儒石.上石. 香爐石이 密着되어 있으며 그 正面에는 4개의 火窓이 透加된 長明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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