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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族/國 內 旅 行

秋史金正喜故宅

추사

(秋史金正喜故宅)

 

 

秋史故宅은 秋史의 曾祖父이며 英祖大王의 駙馬이신 月城慰 金漢藎께서 1700年代 中般에 建立한 53칸 規模의 兩班 대갓집으로 秋史先生이 태어나서 成長한 곳이며 周邊에는 秋史先生의 墓 月城慰,화순옹주 墓와 정려문,白松, 秋史先生이 修道하던 화암사등 秋史先生과 關聯된 文化遺跡이 있다.

 

 

 

秋史金正喜故宅

 

솟을대문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大門으로 左右 행랑채보다 훨씬높이어 우뚝 솟게 짓는 名文大家나 四大夫들의 家屋에 代表的으로 짓는 大門 이다,

 

 

솟을대문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大門으로 左右 행랑채보다 훨씬높이어 우뚝 솟게 짓는 名文大家나 四大夫들의 家屋에 代表的으로 짓는 大門 이다,

 

 

석년

(石年)

 

사랑채앞 댓돌 앞에 세워진 이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用途로 쓰였으며 石年 이라는 글씨는 秋史先生의 아들인 商佑가 秋史體로 쓴것을  刻字한것이다.

 

 

신안구가완당제

(新安舊家阮堂題)

 

朱子性理學의 시조인 朱熹가 新安人이므로 朱子性理學者의 傳統을 가진 집이라는 意味다.

 

 

불이선란

(不二禪蘭)

 

秋史先生은 특히 蘭草를 잘 쳤는데 蘭草치는 法 역시 隸書쓰는 法과 비슷해서 반드시 文字香과 書卷氣가 있어야만 잘할수 있으며 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强調 하였다. 이 蘭草 그림은 草書와 隸書의 奇字의 法으로 그린 것으로 破格을 넘어 不二禪의 境地에 다다른 不計工拙의 名畵 이다.

 

 

유복량수

(有福量壽)

 

많은 福과 한없는 壽命이라는 뜻.

 

 

사당

(祠堂)

 

가묘(家廟)라고도 하며 祠堂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는 오래되었으나, 자리를 잡고 一般 庶民에게 널리 行해진 것은 朝鮮 中期에 들어와 儒學이 國家의 基本 理念으로 자리 잡히면서였다. 특히 宣祖 以後에는 士大夫는 물론 一般 庶民들도 대청 한모퉁이나 집의 적당한 곳에 神主를 모시고 받들었다. 대개 祠堂에는 3년상을 마친 神主를 모시며, 집을 짓기 前에 먼저 지었다. 祠堂이 있는 집은 종자(宗子)가 대대로 지키고, 부득이 한 경우가 아니면 헐지 않았다. 位置는 정침(正寢) 동편에 3칸을 세우고, 앞에 門을 내며, 門 밖에 섬돌을 2개 만들어 東쪽을 조계(祚階), 西쪽을 서계(西階)라고 했는데 모두 3階段으로 했다. 祠堂 안에는 4감(龕)을 만들어 4대조를 奉安했는데, 반드시 北壇에 西쪽부터 제1감에 고조고비(高祖考妣), 제2감에 증조고비(曾祖考妣), 제3감에 조고비(祖考妣), 맨 끝인 東쪽 제4감에 고비(考妣) 차례로 神主를 모신다. 감 밖에는 장(帳)을 드리우고, 각 位牌마다 제상(祭床)을 놓고 그 위에 촛대 1쌍씩을 놓으며, 최존위(最尊位) 앞에 향상(香床)을 놓은 다음, 그 위에 향로는 西쪽, 香盒은 東쪽에 놓는다. 담을 쌓아 祠堂을 가리고 앞에 大門을 만들었다.

 

 

안채

(安寨)

 

여섯칸 대청과 두칸의 안방, 두칸의 건넌방 그리고 안방부엌,안대문, 협문, 광,등을 갖춘 ㅁ자형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툇마루가 있고 부엌천정은 다락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秋史先生의 筆蹟으로 推定되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六間大廳은 그리 흔하지 않은 큰 마루이다. 이러한 規模가 큰 ㅁ자형 家屋은 주로 中部地方과 嶺南地方에 分布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 형이다. 

 

 

무량수승연노인

(无量壽勝蓮老人)

 

한없는 壽命 이란 뜻으로 佛敎의 輪廻說에 立脚하여 쓴글이다. 부처님의 法身은    三世 古今을 通하여 恒常 存在하여 滅하지 않으므로  그 壽命이 살로 无量하여 限이 없기 때문에 无量壽라 하였다. 왼쪽이 勝蓮老人은 秋史先生의 號 이다.

 

 

만수무강

(萬壽無疆)

 

建康과 長壽를 빌때 쓰는 말로써 "한없이 목숨이김"을 나타내는 뜻이다.  禮書에서 오른쪽의 小蓮正之는 秋史先生의 號 이다. 이 글씨는 누구에게 언제 쓴 作品인지는 알수 없으나  濟州道 流配生活과 官職을 떠나 71 세때 京畿道 果川 奉恩寺에 起居하고 계실때 大烹豆夫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이란 글씨를 杏農  兪麒煥에게 膳物할 즈음 다른 親舊에게 써준 글씨로 推定 된다

 

 

김정희선생묘

(金正喜先生墓)

 

1937년에 초배 (初配)인 한산 이씨 묘에 秋史墓와 계배 (繼配)인 예안 이씨 墓를 移葬하여 3위를 合葬하였다. 墓에는 石像과 望柱石 1 雙이 있고 그해 9 月에 세웠는데 종인 (宗人) 김승렬 (金承烈)이 짓고 썻다.

 

 

일장수죽반상서          만수기화천포약

 

온 집안은 대나무가 꽉차있고 冊床 위에는 冊이 반이다만 그루는 기이한 꽃이고 천 이랑은 작약밭이요

 

고회부처아녀손          정좌처다반향초

(高會夫妻兒女孫)                      (靜坐處茶半香初)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아들딸,孫子의 모임이다.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香氣가 나기 始作하는듯 하고

 

 

고회부처아녀손       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                (大烹豆腐瓜薑菜)

 

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婦夫와 아들,딸,孫子 (아무리 높은벼슬을 하고 豪華스런 生活을 해도 家族끼리 모여서 素朴한 飮食으로 즐기는 재미에 비할수 없다)

 

 

추사김정희초상

(秋史金正喜肖像)

보물 547호

 

祠堂에 걸괘 (乞掛)로 있는 金正喜의 초상 (肖像)이다.  權敦仁이 이한철 (李漢喆)을 시켜서 그린 秋史의 正本 肖像이다. 官服을 입은 前身 교의좌상 (交椅坐像)으로 禮山의 秋史古宅에 봉안 (奉安)되어 오다가 國立中央博物館에 寄託 되었다.

 

 

우물

(井)

 

이 우물은 水量이 豊部하여 大代로 役割을 다해 왔으나 한때 水量이 메말라 周圍의 안타까움이 極에 달하였으나 金正喜가 태어난해 水量이 다시 넘쳐 흘렀다 한다.

 

 

海底泥牛 含月走 崑崙騎象駑絲牽 雪竇持誦老膠

바다밑으로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곤륜산에서 코끼리 타니 백로가 고삐를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