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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 族/朴 裕 盛

朴裕盛/오늘은어린이날

어린이

 

2019. 5. 5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고려궁지

(高麗宮址)

 

고려는 고종 19년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천혜의요소인 강화도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 개성으로 환도할때까지 38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궁지는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고 궁궐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여 왕도의 제도를 잊지 않으려하였다고 한다.  1636년 병자호란 시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는등 여러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궁궐과 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조선시대의 건물인 승평문,강화유수부동헌,이방청,종각등이 복원되었다. 

 

 

외규장각

(外奎章閣)

 

조선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도서관 역활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한 왕실관계 서적을 보관 하였으나 1866년 (고종3년) 병인양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의궤를 포함한  서적등을 약탈하였으며 나머지는 불타 없어졌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에서 프랑스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회수를 요구해왔으나  반환협상이 연기되거나 프랑스측에서 계속협상을 지연시키는등  소극적 자세를 보이다 2010년 11월 12일 G 20 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 하여 145년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강화동종

(江華銅鐘)

 

조선시대 강화성문의 여는시간과 닫는시간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던 종으로 높이가  198 cm 입지름이 138 cm 이다. 종 꼭대기는 용무늬로 조각되었고 한국종의 특색인 음통이 없다, 종 중앙에는 두 종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으며 어깨부분에는 꽃무늬로 유곽대가 있고 그안에 9개의 연꽃이 새겨져 있다. 횡선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않았으며 만든시기 (숙종 37년)를 알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종 중앙을 띠로 장식하는 것을 고려시대와는 다른 조선시대 문화의 특징이라 하겠다.

 

 

 강화유수부이방청

(江華留守府吏房廳)

 

강화유수부의 행정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곳이다. 효종 5년 유수 정재규가 세웠고 정조 7년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 하였다.  1915년 이후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 되었다.  구조는 ㄷ 자형 단층 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 규모이다. 

 

 

강화유수부동헌

(江華留守府東軒)

 

조선시대 관아의 건물로서 강화지방의 중심 업무를 보던 동헌은 오늘날 군청과 같다. 영조 45년 (1769)에 유수황경원의 현 윤관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현재는 명휘원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이 썼다.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3칸  겹처마에 단층지붕이며 2중의 장대석 기단위에 네모꼴 주초석을 놓고 네모로 다듬은 기둥을 세웠다.

 

 

강화산성

(江華山城)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1232)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지을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의 성곽과 비슷하게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었졌으며 1232년 부터 축조되었다. 이중 내성에 해당하는것이 현재의 강화산성 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숙종 3년 (1677)에 현재와 같은 석성을 이루었다. 성의 주위 길이는 7,122 m 이며 4개의 대문 4개의 暗門, 2개의 水門, 2개의  城門將廳이 있었다. 南門은 안파루,北門은 鎭松樓,東門은 망한루, 西門은 침화루 이다.

 

 

강화성당

(江華聖堂)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424)인 강화성당은 외부는 전통한옥 양식으로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서구 기독교의  토착화 산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성당이며 지금까지 매주일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현관기둥의 5매 주련

(玄關기둥 5매 柱聯)

 

 

無始無終先作形馨眞主宰

처음도 없고 끝도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분이 진실한 주재자 이다.

 

宣仁宣義聿昭拯濟大權衡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 하느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神化周流囿庶物同胞之樂

하느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것이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 이다.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교회종

(敎會鐘)

 

1914년 영국에서 강화성당에 기증한 종은  1944년 일제에 징발당하고 현재의 종은 범종의 형태로 1989년 교우들의 봉헌으로 제작 하였다.

 

 

한옥사제관

(韓屋司祭館)

 

성당과 함께 지어진 사제관이 1985년 화재로 소실되어 당시 재건축 하였다. 희준교육관 신축이후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강화도부근리지석묘

(江華富近里支石墓)

 

1964년 7월 11일 사적 제137호로지정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지상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7.1m, 너비5.5m이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부근리 고인돌은 모두 10기(基)로, 비지정인 128번 고인돌을 제외한 9기가 세계유산에 포함되어 있다.대촌부락 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미군부대 전입 등으로 현재 4기만 남아 있다 받침돌[支石]은 두개의 긴 굄돌만 있는데 방향은 대략 남북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표면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직 학술적인 발굴조사는 행해지지 않은 유적이다. 이 고인돌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파괴된 고인돌이 있는데, 굄돌은 없어지고 판석의뚜껑만 수직으로 엎어진 채 남아 있다. 이 밖에도 강화도에는 삼거리·하도리 등지에 북방식과 남방식이 10여 기 남아 있어서 부근리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사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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