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募 臨/募(釣士)臨

OB 송년낚시여행

OB 송년

(2017년)

 

日時 2017년 12월 27 ~29일

 

場所: 望祥修鍊院 

 

東海市

(湫岩 촛대바위)

 

 

東海市의 名所 湫岩 촛대바위는 水中의 奇巖 怪石이 바다를 背景으로 촛대바위와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秘境으로 感歎을 자아내는 場所다. 촛대처럼 생긴 奇異하고 絶妙한 모습의 바위가 무리를 이루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모습은 가히 壯觀이다. 촛대바위와 周邊 奇巖怪石群을 둘러싼 바다는 수시로 그 모습을 바꾼다. 波濤 거친 날에는 흰거품에 가려지며 昇天하는 龍의 모습을 닮기도 하고 波濤 잔잔한 날에는 깊은 湖水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곳 해돋이는 워낙 有名해 많은 旅行客들과 寫眞作家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尤庵 宋時烈도 이곳을 둘러보고는 발길을 떼지 못했다는 말이 傳 해지는 곳이다. 촛대바위, 兄弟바위의 日出은 愛國歌 첫 소절의 背景畵面으로도 자주 나온 곳이다. (出處 東海文化觀光)

 

 

촛대바위의 전설

(촛대바위傳說)

 

옛날에 한 漁夫가 살았는데, 그 漁夫에게는 情實이 있었다고 한다. 그 情實이 얼굴이 밉상이었는지, 마음이 고약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漁夫는 妾을 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妾이 天下一色이라, 情實의 猜忌를 사고 말았고, 밥만 먹으면 처 妾이 서로 아웅다웅 싸우는데, 從來는 하늘도 그 꼴을 보지 못하고, 그 두 女人을 데리고 갔단다. 그러자 홀로 남은 漁夫는 하늘로 가버린 두 女人을 그리며 그 바닷가 그 자리에 하염없이 서 있다가 望夫石처럼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지금의 촛대바위라고 한다고 한다. 지금의 촛대바위 자리에 元來는 돌기둥이 세 개가 있었다. 그런데 작은 기둥 2개가 벼락을 맞아서 부러졌는데, 그것을 두고 民家에서 野談으로 꾸민 이야기가 口傳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한다(百科事典)

 

 

촛대바위

 

能波臺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높이는 5~6m 쯤 된다. 바위가 元來 두개였는데, 그 중 하나가 肅宗 7年(1681年) 5월 11일 江原道에 地震이 났을 때 中間 部分이 10尺가량 부러져 나갔다고 한다. 破損된 바위는 그 痕跡이 아직도 남아 있다. 愛國歌 첫 小節의 背景畵面으로 登場하는 촛대바위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어 主位 奇巖怪石과 함께 보는이로 하여금 感歎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며, 특히 아침 해돋이가 壯觀 이루는 海岸線景이다.

 

 

북평해암정

(北坪 海岩亭)

 

1361년 (恭愍王 10) 三陟 沈씨의 始祖인 沈東老가 벼슬을 버리고 이 地域에 내려와 生活 할때 처음 지은것으로 後學 養成과 風月로 餘生을 보낸 곳이다. 그後 火災로 타 버렸다가 1530년 (中宗 25) 에 沈彦光이 다시 짖고 1794년 (正祖 18년)에 크게 修理 하였다.  20世紀 末에 다시 保修한 海岩亭은 正面 세칸,側面 두칸의 建物로 기둥은 모두 둥글며 正面을 制外한  3面을 모두 4척 程度의 높이까지 壁體를 세우고 上部는 開方하고 있다. 初翼工 樣式의 촏처마에 팔작지붕의 이 곳은 宋時烈이 咸鏡道 德源으로 歸養을 가다가 둘러 글을 남긴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東海의 莊嚴한 日出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하다. 

 

 

湫岩 海水浴場

 

삼척

(海神堂公園)

 

三陟에는 東海岸에서 唯一하게 男根 崇拜民俗이 傳來되고 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海神堂이 있는 신남 마을 이다. 海神堂 公園에는 漁村民의 生活을 느낄수 있는  漁村民俗展示觀,諧謔的인 웃음을 자아내는 男根彫刻公園등으로 具成되어 있다. 또한 公園을 따라 펄쳐지는 소나무 散策路와 푸른바다가 어우려져 스트레스 解消는 물론 웃음 바이러스가 넘쳐나는 곳이다.  (三陟市海神堂公園案內文)

 

 

12지신상

(十二支神像)

 

모든 韓國사람들은 自身이 태어난 해를 따라 "띠"를 가자고 있다. 이 띠는 12 動物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十二支神라고 한다. 12 라는 숫자는 1년 12 달을 意味하는符號로 使用되었다고 볼수 있는데 時間과 防衛의 槪念이 結合되고 나아가 12 動物과 結合하여 十二支干이 完成된다. 이렇듯 年,月,日,時를 나타나는데 使用된 十二支는 사람의 生年月日 과 連結되어 그 사람의 性格이나 運勢를 占치는 등 우리生活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十二支간은 쥐,소,범,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로 區分된다.

 

 

12 지간

(十二支干)


十二支의 槪念은 中國의 은나라에서 始作되어, 漢나라 中期에 이르러 防衛나 時間에 對應하는 意味로 使用되기 時作했다. 以後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닭, 개, 돼지의 十二支의 順序에 대해 여러 說話가 있다. 動物의 발가락 數를 基準으로 定했다는 設, 各 시(時)에 活動하는 動物 順으로 定했다는 說, 正月 初하루에 第一 먼저天上의 門에 到着한 動物 順으로 定했다는 說등이다.

 

 

애바위전설

 

옛날 新南 마을에 結婚을 約束한 애랑과 덕배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海草作業을 위해 덕배는 海邊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애랑을 태워주고 다시돌아올것을 約束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波濤와 심한 强風이 불어 애랑은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以後 바다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 마을사람들이 處女의 寃魂을  달래기 위하여 實物 模樣의 男根을 만들어 祭祀를 지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傳說이 傳 해지고 있다.

 

(烏竹軒)  

 

寶物 제165호. 이 建物은 1452년(文宗 2)에 登第하여 大司憲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古宅에 딸린 別堂으로, 1536년(中宗 31) 李珥가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平面構造는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일(一)자집이며 大靑·온돌방·툇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李珥가 태어난 房은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한다. 커다란 長臺石으로 쌓은 斷層 기단 위에 막돌礎石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結構했으며,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으로 處理한 이익공(二翼工)집이다. 앞면에는 띠살窓戶를, 옆면에는 骨板門을 달았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이 建物은 韓國住宅史에서 現存하는 유구(遺構)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매우 重要하다. 그러나 房과 大靑으로만 構成된 別堂만 남아 있고, 본채가 없어 朝鮮 初期의 住宅構造를 알 수 없는 것이 有感이다.

 

 

오죽헌

(烏竹軒)

 

申師任堂(1504∼1551)과 栗谷 李珥(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師任堂 申氏는 뛰어난 女流 藝術家였고 賢母良妻의 본보기가 되는 人物이며, 申씨의 아들 栗谷 李珥는 朝鮮時代 退溪 李滉과 雙璧을 이루는 훌륭한 學者였다. 烏竹軒은 朝鮮時代 文臣이었던 崔致雲 1390∼1440)이 지었다. 規模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模樣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大靑마루로 使用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模樣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形態로 짜은 翼工계 樣式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住宅 建築物 중에서 比較的 오래된 建物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歷史를 가진 建物이다.

 

 

非禮勿視

예가아니면 보지도말고

非禮勿聽

예가아니면 듣지도말고

非禮勿言

예가아니면 말 하지도 말고 

非禮勿動

예가아니면 행동하지 말아야 할것이니 

四者修身之要也

이 네 가지는 몸을닦는 요점이다.


 

몽룡실

(夢龍室)

 

1536년 12월 26일 申師任堂이 龍이 문저리에 서려있는 꿈을꾸고 栗谷 을 낳은것이다. 夢龍室 이라 부르고 있는 이 房에는 申師任堂의 影幀이 모셔져 있다.

 

 

배롱나무

 

江陵의 시화 (市花)로 꽃피는 期間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百日紅 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古死한 원 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 申師任堂과 栗谷 母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栗谷松 栗谷梅와 함께 오늘날 烏竹軒을 지켜주는 守護木으로서의 役割을 해오고 있다.

 

 

율곡송

(栗谷松)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할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

   

안채

 

안채 朝鮮初期에 지어진 烏竹軒 내의 建物들은 1505년 兵曹參判을 지낸 崔應賢에 傳承되어 오다가 烏竹軒 淨化事業으로 烏竹軒 (別堂)과 받깥채를 除外하고 모두撤去되었다. 現在의 모습은 1996년 政府의 文化財 復原計劃에 따라 옛 모습대로 復原한 것이다. 안채는 안主人이 生活하던곳이고 바깥채는 바깥 주인이 居處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뒷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柱聯은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바깥채

 

안채朝鮮初期에 지어진 烏竹軒 내의 建物들은 1505년 兵曹參判을 지낸 崔應賢에 傳承되어 오다가 烏竹軒 淨化事業으로 烏竹軒 (別堂)과 받깥채를 除外하고 모두撤去되었다. 現在의 모습은 1996년 政府의 文化財 復原計劃에 따라 옛모습대로 復原한 것이다. 안채는 안主人이 生活하던곳이고 바깥채는 바깥主人이 거쳐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뒷마루 기둥에 걸려있는 柱聯은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신사임당

(申師任堂)

 

申師任堂은 江原道 江陵 胎生으로 그의 生家 烏竹軒은 지금도 保存되고 있다. 本名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龍仁 李氏 집안의 선비인 李思溫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號를 지었는데, 周나라의 기틀을 닦은 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傳한다.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號도 가졌다고 한다. 1522년 德修 李氏의 이원수(李元秀)와 結婚하여 江陵에서 서울로 移徙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栗谷 李珥는 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畵家로서 7살 때 世宗 時代의 畵家 安堅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肅宗, 宋時烈 등 여러 知識人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跋文을 쓸 程度였다. 書藝家이자 詩人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다. 別世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다. 詩·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士大夫 婦女에게 要求되는 德行과 才能을 兼備한 賢母良妻로 稱頌된다. 本官은 平山.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어머니는 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李珥는 〈行狀記〉를 지어 師任堂의 藝術的 才能, 優雅한 天稟, 純孝한 性品 등을 記錄했다. 師任堂은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本받는다는 뜻의 堂號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江陵 外家에서 자랐으며, 19세에 德修李氏 원수(元秀)와 婚姻했다.

   

 

利得을 보거든 옳은 일인가를 生覺하라

 

 

율곡 이이

(栗谷李珥)

 

栗谷李珥(1536∼1584) 先生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學文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合格하고 명종(明宗) 19년(1564)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後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 登科 이조(吏曹)·형조(刑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歷任하였다. 조선(朝鮮) 유학계(儒學界) 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先生과 雙璧을 이루는 대학자(大學者)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形成했고 붕당(朋黨)의 조정(調停), 10만(十萬) 군대(軍隊)의 양병(養兵)을 主張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 사창(社倉)의 實施에 勞力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孝誠이 至極하였다.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20여개 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烏竹軒은 江陵 유현(儒賢)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창건(創建)으로 아들 응현(應賢)은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주고 李思溫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申命和)(師任堂의 父親)에게,申命和는 그의 사위 권화(權和)에게 물려 주면서 그 후손(後孫)들이 管理하여 오던 중 1975년 烏竹軒 정화사업(淨化事業)으로 문성사(文成祠), 記念館 등이 建立되어 現在와 같은 面貌를 갖추고 先生의 偉業과 敎訓을 길이 추앙(追仰)하게 된 것이다.

 

 

 문성사

(文成祠)

 

栗谷 李珥의 影幀을 모신 祠堂이다. 이 자리에는 御製閣이 있었는데 1975년 烏竹軒 淨化事業때 西쪽으로 옮기고 文成祠를 지었다. 文成은 1624년 仁祖임금이 栗谷에게 내린 詩號로 道德과 學文을 널리들어 막힘이 없이 通했으며 百姓의 安定된 삶을 위하여 政事의 根本을 세웠다.는 意味를 담고 있다. 文成祠의 懸板은 朴正熙 大統領이 썼다.

 

 

어제각

(御製閣)

 

栗谷의 李珥 著書 [격몽요결 (擊蒙要訣)]과 어린時節 使用하였던 벼루를 保管하기 위하여 지은것이다. 1788년 正祖임금은 栗谷이 어렸을때 쓰던 벼루와 親筆로 쓴 (擊蒙要訣)이 烏竹軒에 保管되었다는 事實을 듣고 그것을 宮闕로 가지고 오게하여 親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栗谷의 偉大함을 讚揚한 글을 새기고 冊 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保管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命을받은 江原道觀察使 金載瓚이 이를 保管할수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御製閣이다.

 

 

진또배기

 

江陵의 진또배기는 나무로 오리세마리를 깍아 솟대위에 올려 마을의 길목에 새우고 人間과 神, 하늘과 땅을 連結하는 一種의 우주목(宇宙木)으로 숭배(崇拜)해 왔다 오랜歲月을 通하여 같은 地域에서 共同生活을 해온 바닷마을 사람들은 진또배기가 그들의 生活을 威脅하는 水災,火災,風災(水災,火災,風災)를 막아주고 마을의 安寧과 풍농,풍어(豊農,豊漁)를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다.

 

 

벼루

 

栗谷 李珥 先生이 어렸을때 使用하던 벼루

 

격몽요결

(擊蒙要訣)

 

1788년 正租임금은 栗谷先生이 쓴 (擊蒙要訣)과 어렸을때 使用하던 벼루를 直接보고 擊蒙要訣 序文과 벼루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며 別途의 집을 지어 保管하도록 하였읍니다. 御命으로 지었다고 해서 御製閣이라고 부르며 벼루뒷면의 內容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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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묘

(辛師任堂墓)

 

朝鮮時代에 뛰어난 女流 書畵家이며 栗谷 李珥 어머니인 申師任堂의 墓로 男便 李元壽와 合葬墓로 造成되어 있다. 師任堂은 堂號로서 그 뜻은 당시 最高의 女性像인 中國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申師任堂은 外家인 江陵 北平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7세에 이미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본보기를 삼아 배웠다고 한다. 그림뿐만아니라 글씨도 잘썼으며 漢詩 역시 잘지었다. 師任堂은 儒學의 대가 李珥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男便을 잘 輔弼한 아내로서 그리고 敎養과 學文을 갖춘 藝術家로서 朝鮮時代 代表的인 女性으로 評價받고 있다. 墓域은 封墳앞 中央에 墓碑와 上石 香爐石이 一列로 놓여 있으며 左右로 文人石이 세워져 있다.

 

 

묘비명

(墓碑名)

 

贈宗政大夫議政府左贊成行司憲府監察德水李公諱元秀之墓

贈貞敬夫人申師任堂平山申氏

 

 

이이선생묘

(李珥先生墓)

 

朝鮮中期의 學者이며 政治家인 栗谷 李珥 (1536 ~ 1584)의 墓이다. 江陵 烏竹軒에서 태어나 坡州 栗谷里에서 成長한 李珥는 朝鮮時代 代表的인 性理學者일 뿐만아니라 十萬養兵說 大同法의 實施 사장의 設置등 情致 經濟 社會 全般에 걸쳐改革을 主張한 代表的인 政治改革가 였다. 著書로 同好問答 聖學輯要 擊蒙要訣 등이 있으며 大司憲을 비롯하여 大提學,戶曹,兵曹,吏曹判書 등의 官職을 歷任하였다. 李珥는 儒學에 있어서 退溪 李滉과 雙璧을 이루는 學資로서 李滉과 徐敬德의 理論을 折衝하여 一元論的 理氣二元論을 主張하였고 畿湖學派를 形成하여 後世의 學界에 强力한 影響을 끼쳤다. 世上을 떠난後 이곳 坡州 紫雲山 先山에 묻혔는데 墓域은 夫人 谷山 魯氏墓와 위 아래로 造成되어있다. 封墳 정면에 上石과 오른쪽에 墓碑가 位置해 있으며 左右로 望柱石과 文人石을 세웠다.

 

 

묘비명

(墓碑名)

 

文成公栗谷李先生之墓

貞敬夫人谷山盧氏墓後左

 

오죽헌(烏竹軒)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師表)가 되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 태어나고 또한 偉大한 경세가(經世家)요 철인(哲人)이며 정치가(政治家)로서 구국애족(救國愛族)의 대선각자(大先覺者)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先生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1504∼1551)는 性品이 어질고 착하며 孝誠이 至極하고 지조(志操)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文章), 침공(針工), 자수(刺繡)뿐만 아니라 시문(詩文),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第一의 여류(女流) 예술가(藝術家)라 할 수 있으며 子女敎育에도 남다른 勞力을 기울여 현모양처(賢母良妻)의 歸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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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許均,許蘭雪軒記念館)

 

江陵 바닷가 사천과 이어진 蛟龍山 定氣를 타고난 蛟山 許筠과 蘭초향과 눈처럼 깨끗한 性品을 지닌 蘭 雪軒 許楚姬는 聞香 江陵이 낳은 오누이 文人 이다. 梅泉 皇憲은 이들과 虛封을 가리켜 草堂家門에 세구루 寶배로운 나무 第一의 神仙在住는 "景樊에 束하였네" 라고 찬국조제가 시에서 稱頌하였는데 특히 그중 蘭雪軒의 글在住가 가장 돋보여 詩仙在住를 닮았다고 하였다. 오누이는 아버지 許曄과 장남 虛星 그리고 虛封과 함께 許氏 5 文章家를 이루어 글 잘짓고 學文하는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江陵땅 草堂에서 살면서 鏡浦湖의 아름다운 風光을 探勝하여 詩를 읊고 文學性을 키워 나갔다. 특히 막내 許筠의 詩 "鏡浦湖를 그리워하며" 에서 내집은 鏡浦湖 西쪽에 있으니 바위돌 골짜기들이 回啓名山과 같아라 라고 하는등 여러 作品을 通해 江陵에 대한 愛着을 表現했다.

 

 

난설헌허초희

(許蘭雪軒許楚姬)

 

우리나라 代表的인 女流詩人의 한사람인 許蘭雪軒은 本名이 초희(楚姬)로 호는 난설헌(蘭雪軒)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1563년 江陵에서 태었났다. 어릴때부터 在住가 非想하고 出衆하였으며 兒名을 楚姬라 했다. 許蘭雪軒은 和談 徐敬德의 文人인 許曄의 딸이자 미암 柳希春의 文人인 許筬과 虛封의 同生이며 柳成龍과 李達 에게 文章과 詩를 배운 許筠의 누이였다. 이런 家庭環境과 文學敎育이 許蘭雪軒 詩文學의 뿌리가 되었다. 許蘭雪軒이 어린나이에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天才性을 有感없이 發揮한 作品이다. 中國 兩朝平壤錄, 金萬重의 西浦漫筆 에서도 許蘭雪軒의 才能을 激讚한바 있으며 오빠 虛封도 蘭雪軒의 詩는 배워서는 그렇게 될수없다.라고 할만큼 許蘭雪軒의 在住가 天賦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허난설헌생가

(許蘭雪軒生家)

 

朝鮮 宣祖때 草堂 許曄이 사던곳으로 許蘭雪軒이 태어났으며 許筠이 살았다고 傳한다. 오늘날 地名인 草堂은 許曄과 關聯이 있는것으로 보인다. 土담과 周邊솔밭이 調和를 이룬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 明堂으로 알려져 있다.

 

 

   

行至沙村忽解顔    사촌에이르러얼굴문득풀리니 

蛟山如待主人還   교산은주인오기를기다린것같구나

紅亭獨上天連海   홍정에올라보니하늘과 다이어지고

我在蓬萊間  봉래산아득히그사이에내가있구나

  

 

朝鮮中期 改革을 펼친 思想家이며 最初의 한글小說인 "洪吉童傳"의 著者인 蛟山 許筠과 卓越한 感覺으로 國內는 물론 中國과 日本에 그 天才性을 認定받았던 蘭雪軒 許楚姬의 文學性을 紹介 하고있다. 두오누이의 思想과 文學作品을 中心으로 影像資料와 國祖資産,荷谷朝天記,蘭雪軒集,石欄油分 등을 展示하고 있으며 當代 뛰어난 時在와 文才를 發揮하였던 "許氏 5 文章"을 紹介 하고 있다.

 

 

허균,허난설헌기념관

(許均,許蘭雪軒記念館)

 

朝鮮中期 改革을 펼친 思想家이며 最初의 한글小說인 "洪吉童傳"의 著者인 蛟山 許筠과 卓越한 感覺으로 國內는 물론 中國과 日本에 그 天才性을 認定받았던 蘭雪軒 許楚姬의 文學性을 紹介 하고있다. 두오누이의 思想과 文學作品을 中心으로 影像資料와 國朝詩刪,荷谷朝天記,蘭雪軒集,石欄油分 등을 展示하고 있으며 當代 뛰어난 時在와 文才를 發揮하였던 "許氏 5 文章"을 紹介 하고 있다.

 

 

국조시산

(國朝詩刪)

 

蛟山 許筠이 엮은 詩集으로 1706년 木板 刊行本

              

   

蘭雪軒肖像丹靑畵

 

오문장비

(五文章碑)

  

허균,허난설헌기념관

(許均,許蘭雪軒記念館)

 

朝鮮中期 改革을 펼친 思想家이며 最初의 한글小說인 "洪吉童傳"의 著者인 蛟山 許筠과 卓越한 感覺으로 國內는 물론 中國과 日本에 그 天才性을 認定받았던 蘭雪軒 許楚姬의 文學性을 紹介 하고있다. 두오누이의 思想과 文學作品을 中心으로 影像資料와 國朝詩刪,荷谷朝天記,蘭雪軒集,石欄油分 등을 展示하고 있으며 當代 뛰어난 時在와 文才를 發揮하였던 "許氏 5 文章"을 紹介 하고 있다.

 

 

 

 강릉 정동진 해안단구

(江陵 正東津 海岸段丘)

 

부채길

 

 

正東深谷 바다 부채길의 "正東"은 朝鮮時代 임금이 居處하는 漢陽에서 正方向으로 東쪽에 있는 地域이라는데서 由來된 이름이고 "深谷"은 深谷港의 地名으로 본래 마을 地形이 종이를 바닥에 깔아놓은듯이 平平하면서 그 옆에 붓이 놓여 있는 形局이라 하여 前에는 紙筆로 불리었는데 1916년 行政區域 變更시 "깊은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으로 深谷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다른 마을과 멀리 떨어진 奧地이고 양쪽이 山으로 가로막혀있어 6.25 戰爭 때에도 戰爭이 일어난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부채바위의 전설

 

深谷의 서낭당에는 여서낭 세분이 모셔져 있다. 옛날 어떤사람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바닷가에 나가 보라고 해서 나가 보았더니 여서낭 세분이 그려진 그림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낭단을 짖고 거기에 모시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림의 색깔이 變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서낭神이 몹시 靈驗이 있다고 믿어왔으며 마을에 重大한 일이 있으면 꼭 가서 告한다고 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傳해오고 있다. 지금부터 한 200여년 前에 李氏 老人의 꿈에 어여뿐 女人이 咸鏡道 吉州에서 왔다고 하면서 애가 深谷과 正東津 사이에 있는 부채바위 근방에 떠내려가고 있으니 求해달라 고 했다. 李氏 老人이 이튼날 새벽 일찍 배를 타고 가 보니 부채 바위 끝에 나무 궤짝이 떠내려 와 있어서 열어보니 女子의 畵像이 그려져 있어 이를 부채바위에 安置해 두었다. 그 뒤 李氏 老人은 萬事가 亨通했다고 한다. 얼마後 老人의 꿈에 그 女人이 외롭다고 해서 서낭당을 짓고 畵像을 모셔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강릉정동진해안단구

(江陵正東津海岸段丘)

 

正東津 海岸段丘는 제 3期末에 일어난 地盤 湧起作用에 의하여 形成된 것으로 解釋되며 段丘層은 200 ~ 250萬年前에 形成된것으로 推定된다. 海岸段丘가 海水面과 接하는곳에 傾斜가 급한 巖壁인 海飾崖 가 存在 하는것은 이地域역의 基盤巖이 주로 沙巖으로 構成되어 있고 또 오랫동안 波濤의 浸蝕 作用에 의하여 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海岸段丘에는 東海쪽으로 수개의 깊은 골짜기가 形成되어 있는데 이 골짜기 에도 海水의 浸蝕과 關聯이 있다한다. 正東津 海岸段丘는 우리나라 地槐가 약 200 ~ 250萬年前에는 海水面이 現在보다 약 80 m 높은곳에 있었는데 그 후 地盤 隆起作用에 의하여 現 海水面 까지 後退 했다는것을 알려준다.

 

 

深谷港燈臺

수호랑                                                  반다비

 

2018年 平昌冬季olympic 成功開催를 起源 하면서

 

 

추암해수욕장

(湫岩 海水浴場)

 

東海市 北平洞 南部에 있는 湫岩理 마을 앞에 길이 150m의 白沙場을 가진 海邊이다. 海岸絶壁과 洞窟, 칼바위, 촛대바위 등의 크고 작은 바위섬이 場觀을 이루고 있으며, 조용하고 水深이 얕아 家族單位 避暑地로 適合하다. 뛰어난 景勝地로 海金剛이라 불려 왔으며 朝鮮 世祖때 韓明澮가 江原道 觀察使로 있으면서 그 景勝에 취한 나머지 能波臺라 부르기도 했었다. 高麗 恭愍王 10年에 三陟 沈氏 始祖인 沈東老가 官織에서 물러나서 지은 丁字인 地方文化財 "海岩亭"이 所在해 있다.

 

 

망상해수욕장

(望祥海水浴場)


白沙場의 길이가 2㎞에 이르며, 水心이 0.5∼1m로 緩慢하여 家族單位 避暑客들에게 適當한 곳이다. 海岸線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白沙場과 푸른 물, 은빛 파도, 울창한 森林과 맑은 空氣는 朝鮮時代 歌詞文學의 巨峯인 정철(鄭澈)이 이곳에서 강도(講道)를 열었을 만큼 景勝을 자랑하고 있다. 1977년 도(道)가 指定한 國民觀光地 제2호이다

 

 

동 해

(天谷天然洞窟)

 

東海市 天谷天然洞窟은 國內에서 唯一하게 市內 中心部에 位置한 洞窟로 1991년 Apt工事를 하던중 最初 發見되어 開發에 着手 1996년에 一般에게 公開된 洞窟로서 總길이   1510 m 의 石灰巖 水平洞窟로서 生成時期는 4 ~ 5億年으로  推定되며 ,  國內 最長의 天井用식구, 커튼형 鐘乳石, 石灰化단구, 從遊瀑布 등과 稀貴石들이 한데 어우러져 學術的 價値와 함께 太古의 神秘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內部는 鍾乳石, 石筍, 石柱 등 20여 종이 2차 生成物로 構成되어 있어 地球科學에 대한 自然學習帳으로 最適의 條件을 갖추고 있다. 또한, 宇宙의 誕生과 洞窟의 生成課程 등 洞窟의 生態系 全般에 관한 理解를 돕고, 學習效果를 높이기 위해 展示館과 映像室이 設置되어 있다.

 

 

방패종유석

 

이 鍾乳石의 무게는 약 2톤 以上으로 推定되고 있으나 側面에 붙어있는 面積은 0.3 ~ 0.4 mm 程度 밖에되지 않아 많은 觀覽客들이 떨어지지 많나를  걱정하지만 現在까지는 떨어지지 않고 있읍니다.  

 

 

 
* 旅行은 만남입니다.
비도 만나고, 文化도 만나고, 傷處도 만나고,
사람도 만납니다. 偶然히 만났을 뿐인데, 그러나
그 만남이 결코 偶然이 아닌 것을 發見하게 됩니다.
마치 오래 前부터 이미 이어져왔던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성큼 다가와
꿈이 되고, 治癒가 되고, 사랑이 됩니다.
그 旅行에서 만났던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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