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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旅 旅 行/國 外

日本 (對馬島)

(日本)

 

(對馬島)

 


쓰시마는 규슈 最北端에 있으며 本土에서 132 km  韓國까지는  불과 49.5 km 떨어진 國境의 島 입니다. 두개의 海流에 의해 만들어진 海岸線은 곧장 山과 가파른  비탈로 이어집니다. 天惠의 漁港이 많고  사철 豊要로운  漁場이 形成되어 있으며 島의 89 % 를 차지하는  山間地域 에서는  짙푸른  常綠闊葉樹林과  맑은 溪谷이 남아 있어 大陸界의 진귀한 動植物이  棲息하고 있읍니다.  또한 옛날부터 大陸과의 中繼地로 서 傳來된 文化는 生活 風習과 祝際 또는 神仰속에 지금도 여전히 숨쉬고 있읍니다.  高麗時代를 거쳐 朝鮮時代에 이르기까지 對馬島 征伐 計劃이 뜻대로 이루어졌다면  大韓民國 땅이 되지 않았을까 ?  하는 아쉬움이 있는 島이다. 

 

 

 

조선통신사비

(朝鮮通信使之碑)

 

히타카츠항

 

에보시타케전망대

 

 마치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같은 에보시타케 展望臺에서 바라본 景致  소나기가와서 寫眞이 밝지 못합니다.

 

 

와타즈미신사

(和多都美神社)

 

와타쓰미신사는 엔기식(延喜式)신명장(神名帳)에 기재되어 있는 와타즈마신사로 간주되는 遺書 깊은 神社 입니다. 그 建物은 廣大하고 깊은 原始林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境內  全體의 景觀은 큰 規模의 照葉樹林 으로 構成되어 있읍니다. 이 原始林 뿐만 아니라 北方系,大陸系 혹은 高地性 植物이 海岸 周邊에 混成되어 있는것도 特徵 입니다. 多樣한 植物生態가 모여있는 숲에는 溪流의 水源과 豐富한 종류의 鳥類가 많습니다. 이곳은 (1976년 나가사키현 天然記念物로 指定)

 

 

와타쓰미신사

(和多都美神社)

 

와타즈미 신사는 히코호호데 미노미코토와 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를 기리는 海宮으로 바다신 神社중에서 가장 遺書깊은 神社로 豫로부터 龍宮 傳說이 傳해 집니다. 本殿 정면의 5개의 門中 2개는 바다속에 세워져 있어 밀물과 썰물에 따라 그 모습이 變하여 먼 옛날 神話時代를 聯想할 수 있는 神秘로운 風景이 펼쳐 집니다.

 

 

아유모도시자연공원

(鮎 もどし 自然公園)

 

珍貴한 花崗巖으로 뒤덮인 세가와 강청류를 中心으로 大自然을 景觀을 살려만든 男女老小 즐길수 있는 레져公園 이다.

 

 

천지우

(天地宇)

 

이즈하라

(IZUHARA)

 

수선사

(修善寺)

 

천지우

(天地宇)

 

순국비

(殉國碑)

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19世紀 末 外勢가 이 땅에 밀려올 때에 가장 줄기차게 抵抗運動을 벌인 代表的인 儒林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 課程에서 幽閉된 땅인 對馬島에서 죽었기 때문에 民族運動의 先鋒으로 꼽혀왔다  京畿道 抱川 出身으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런 家庭的 背景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聰明한 아들의 出世를 위해 移徙를 다니며 아들의 敎育에 남다른 勞力을 기울였다. 崔益鉉이 楊平에서 많은 弟子를 기르고 있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門下에 들어간 것은 열네 살 때였다. 어린 그는 아버지의 돌봄에 힘입어 화서에게서 性理學의 깊은 理致를 열심히 익혔다. 그리하여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의 뒤를 따라 고제(高弟)의 班列에 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아버지의 希望을 充足시켜 주었다  [Daum百科]人物韓國史

 

 

가네이시성

(かねいしじょう)

 

가네이시성은 16세기 以後 소 家門이 居主하던 城이다. 내분으로 邸宅이 消失되자 難을 벗어난 소 모리카타(宗盛賢)는 가나이시하라에 가네이시 邸宅을 짓는다. 소 요시자네는 火焰으로 큰 被害를 입은 마을을 整備함과 同時에 가네이시 自宅 修理에 着手한다.  고쿠분지를 移動시키고 城壁을 整備하고 樓門을 지었다.  간분9 (1669)년 까지 工事가 進行된 이 邸宅이 바로 가네이시 城이다. 城은 가네이시현을 따라 지어졌으며 石壁으로 築造되었다. 樓門을 빠져 나오면 오른쪽에 네모진 빈터가 나온다.  빈터 북쪽에는 오다이도코로몬(御대所門)이 있으며 이는 城內와 連結되어 있다. 樓門에서 서쪽으로 가면 居處가 있었던 平地가 나온다. 같은 方向으로 더 나아가면 17世紀 末에 지어진 가네이시형 庭園이 있다. 1995년 國家事蹟으로 指定

 

 

덕혜옹주결혼기념비

(德惠翁主結婚記念碑)

 

朝鮮國第 26代 高宗의 王女 德惠翁主는 1931年 5月 宗武志公과 結婚하여 同年 11月에는 對馬를 訪問 했다. 옛 對馬島主 宗家堂主가 朝鮮의 王女를 夫人으로  맞이하여  來島하여 하였으므로 熱烈한 歡迎을  받았다. 이 碑는 두분의 成婚을 祝賀하여 對馬居住 韓國人들이  建立했다. 한편 淸水山城에는 對馬島民들이 慶祝하여 세우고 심었던 철죽이 지금도 잘 남아 있다. 結婚生活은 많은 苦難이 있었으나  딸 正惠를 낳아 서로 信賴와 愛情이  깊었다. 그러나 兩國의 關係는 葛藤이 심하여 두분은 1955년에 離婚 하였으며 武志公은 1985년에 德惠翁主는 1961년 歸國後  1989년에 別世 하였다. 이제 歷史에 묻혀있던 이 記念碑를 再建하여 두분의 힘들었던 生涯를 되돌아 보면서  兩國民의 진정한 和解와 永遠한 平和를 希望한다.

 

 

조선통신사비

(朝鮮通信使之碑)

 

朝鮮後期의 通信使는 宣祖 40년(160) 부터 純祖  11년(182)사이에 12회 派遣 되었다. 이들은 朝鮮과 日本 사이의 善隣友好를 위한 國家外交의 使節이며 아울러 一大 文化使節 이기도 하였다. 때로 正使를  비롯한 五百名에 이르는 使行은 그 行列이 壯嚴하기 이를데 없었고 이들은 先進 學問에 洗練된 藝術 그리고 純煙한 새 文化의 香?을 전해 주었다. 이 通信使의 有形,無形의 행적은 지금도 日本 各地에 역력히 남아있어 近世  日本이 鎖國時代에도 言語와 慣習을 달리하면서도 精誠과 믿음 으로 交流한 이웃나라와 그 들에게 한층 尊景의 情을 더해가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東아시아 國際社會 形成에  즈음하여 朝鮮通信使 永遠한 歷使的 意義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된다.

 

 

성신지교린

(誠信之交隣)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 1668~1755) 先生 顯彰碑 交隣의길은 誠信에 있고 지금부터 훗날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眞實한 誠意의 마음은 돼지나 물고기에게 까지 미치는 것이지만 그 瞬間 그 場所에 限定된 誠意는 어린 아이도 움직일수 없다. 

 

 

現在 日本 對馬島 月貰 價格

 

쓰루가오카하치만구

( (つるがおか はちまんぐう)

八幡宮 神社

 

마신

(馬神)

 

만관교

 

두 개로 나누어진 對馬島를 이어주는 다리

 

한국전망대

(韓國展望臺)

 

韓國樣式을 본떠만든 展望臺 氣象條件에 따라 釜山市 거리가 보인다.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朝鮮國譯官使殉難之碑)

 

朝鮮 肅宗 29년 癸未(1703) 2월 5일 淸明한 아침에 釜山을 떠난 韓天錫 以下 108명의 朝鮮譯官 一行은 저녁무렵 對馬島의 馭浦 入港直前에 갑자기 불어닥친 暴風으로 哀惜하게도 全員이 죽음을 當하였다. 당시 漢陽을 비롯한 各地에서 選任된 이 使節은 正副面使와 上官 28명  中官 54명  下官 24名으로 構成되었는데 이들은 對馬島의 第 3 代 반主宗義眞의 죽음을 哀悼하고 新반州인  第 5 代  宗義方의 책봉을  祝賀 하기 위하여 派遣된  國家外交 使節團 이었다. 江戶時代 鎖國體制下에서도 日本이 唯一하게 定式으로 國交를 維持한 나라가 朝鮮이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朝鮮과의 信賴를 지켜온 善隣外交였다.  이러한 外交政策을 遂行함에 있어 朝鮮에서 朝鮮에서 江戶까지 往復 했던 通信使와는 달리 對馬島의  府中이었던 嚴原까지 往復했던 一行 百名 程度의 國家使節이 譯官이었다. 江戶幕府가 朝鮮과의 外交에 있어서 日本側의 권한을 對馬藩에게 일임하고 있었던것만 보아도 眞情한 善隣外交 主軸을 이루었던것이 바로 이 譯官이라고  하겠다.

 

 

미우다해수욕장

(三宇田海水浴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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